김기석(2018/10/21)
듣기
탕자의 심회로 바라보다
사29:9-14
[너희는 놀라서, 기절할 것이다. 너희는 눈이 멀어서, 앞을 못 보는 사람이 될 것이다. 포도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는데, 취할 것이다. 독한 술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는데, 비틀거릴 것이다. 주님께서는 너희에게 잠드는 영을 보내셔서, 너희를 깊은 잠에 빠지게 하셨다. 너희의 예언자로 너희의 눈 구실을 못하게 하셨으니, 너희의 눈을 멀게 하신 것이요, 너희의 선견자로 앞을 내다보지 못하게 하셨으니, 너희의 얼굴을 가려서 눈을 못 보게 하신 것이다. 이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밀봉된 두루마리의 글처럼 될 것이다. 너희가 그 두루마리를 유식한 사람에게 가지고 가서 “이것을 좀 읽어 주시오“ 하고 내주면, 그는 “두루마리가 밀봉되어 있어서 못 읽겠소” 하고 말할 것이다. 너희가 그 두루마리를 무식한 사람에게 가지고 가서 “이것을 좀 읽어 주시오” 하면, 그는 “나는 글을 읽을 줄 모릅니다 하고 말할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고, 입술로는 나를 영화롭게 하지만, 그 마음으로는 나를 멀리하고 있다. 그들이 나를 경외한다는 말은, 다만 들은 말을 흉내내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다시 한 번 놀랍고 기이한 일로 이 백성을 놀라게 할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지혜가 없어지고, 총명한 사람들에게서 총명이 사라질 것이다.]
∙눈이 열리지 않은 사람들
곤고한 모든 이들의 품이 되어주시는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오색으로 물들어가는 가을산을 바라보는 일이 큰 즐거움입니다. 어제 아침 산책을 하다가 문득 스테인드글라스와 같은 색채의 마술에 놀라 눈을 들어보니 단풍잎 사이로 찬란한 아침 햇살이 번지고 있었습니다. ‘아, 참 좋다.’ 저절로 이런 감탄사가 나옵니다. 종교체험을 ‘아하, 체험’(A-ha experience)이라고 말한 이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풍경 혹은 장엄한 풍경 앞에서 ‘아’ 하고 놀랄 때, 맑고 웅숭깊고 아름다운 영혼과 만나 ‘아’ 하고 경탄할 때, 우리를 옥죄고 있던 마음의 지각이 툭 터짐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좋은 음악도 우리 영혼을 고요하게 만들어줍니다. 놀람 혹은 경탄은 우리 마음을 또 다른 세계에 접속시켜 줍니다.
얼마 전에 EBS 다큐 프라임에서 방영된 “챠강티메-흰 낙타 이야기” 가운데 나오는 한 장면이 제게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몽골 남고비 사막인 가르빈 지역에 사는 유목민들은 척박한 환경 속에서 낙타를 키우며 강인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낙타는 새끼를 낳을 때 무리에서 떨어져 홀로 지냅니다. 어미와 새끼 모두 온갖 위험 앞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새끼는 태어난 지 3일 안에 스스로 몸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래야 어미젖에 당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신에게만 바친다는 푸른 천 하닥을 새끼의 목에 감아주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염원입니다. '튼튼한 낙타로 자라줄 것', '늑대의 눈으로부터 새끼를 보호해 줄 것', '어서 네발로 일어서서 어미와 함께 집으로 돌아올 것'.
제가 감동했던 것은 낙타 주인이 난산을 한 어미 낙타를 찾아가 조용히 위로하는 노래를 불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주인의 노랫소리는 낙타의 불안을 잠재워주는 듯했습니다. 주인은 그 낙타의 몸에 마두금馬頭琴을 걸어줍니다. 바람이 불어오자 마두금의 현이 조용히 울립니다. 낙타는 그 고요한 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차분해집니다. 주인은 새끼와 어미를 사막에 남겨두고 떠납니다. 사막의 밤을 오롯이 이겨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짐승과 사람 사이의 이 깊은 교감, 바람과 악기가 만나 빚어내는 신비한 소리를 들으며,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가 뭔가 잃어버리고 사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시는 사람을 분주하게 만듭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는 시간을 타고 살지 못하고 시간에 쫓기며 삽니다. 느긋한 행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시야는 점점 좁아집니다. 눈앞의 것 이외에는 보지 못합니다. 넓은 세계와 접하지 못하니 눈앞의 것에만 집착하게 되고, 행여 누군가 그것을 빼앗아갈까봐 전전긍긍합니다. 인터넷을 검색하고 유튜브를 통해 새로운 정보를 얻지만, 그것을 통해 진실한 인식에는 이르지 못합니다. 떠도는 이야기들에 정신이 팔리면서 영혼은 점점 메말라갑니다. 뭔가를 아는 것 같지만 누군가가 조종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잠드는 영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시대든지 참된 소리는 경청되지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안일한 일상에 파고들어 균열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본능은 자기중심적입니다. 나 좋을 대로 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나의 자유는 타인이라는 한계 앞에서 자주 유보되곤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조건입니다. 좋은 것을 다 독차지하려는 본능을 누르고, 다른 이들을 위해 좋은 것을 남겨놓을 때 우리는 인간다워집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본능을 따라 살 뿐 다른 이들을 배려하지 않을 때마다, 그래서 세상이 폭력과 부패로 얼룩질 때마다 예언자들을 보내 경고하셨습니다. 이사야는 자기 시대 사람들을 “죄 지은 민족, 흉악한 종자, 타락한 자식들!“(사1:4)이라고 고발합니다. 거만한 눈을 뜨는 사람들, 거드름을 피우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의 얼굴을 마치 맷돌질하듯 짓뭉개는 사람들(사3:15)에게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임할 거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아끼지 않는 세상, 약자들을 더욱 벼랑으로 내모는 세상을 하나님은 차마 그냥 두고 보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뜻을 멀리한 채 살아가는 이들을 일러 깊은 잠에 빠진 사람들이라 말합니다. 그들은 잠드는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정의와 공의를 저버리고, 자기 힘에 도취되어 사는 사람들은 눈을 뜨고 있어도 정작 영혼의 잠을 자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의에 사로잡혀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 같은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요9:41) 그들은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취해 있고, 비틀걸음을 걷는 이들입니다. 욕망을 자기 삶의 토대로 삼는 사람들은 많이 배운 사람이나 덜 배운 사람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근사한 말을 늘어놓고, 교양 있는 태도로 사람들을 대하다가도 자기 이익이 침해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순간 아주 거칠게 자아를 드러내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하나님은 개선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타락한 사회에 ‘잠드는 영‘을 보내신다고 합니다. 모두가 잠에 빠져서 자기들 위에 임박한 위험을 보지 못하게 한다는 말일 겁니다. 주님은 이사야를 통해 깨닫지 못하는 지도자들의 우매함을 이렇게 꾸짖습니다. “너희가 듣기는 늘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못한다. 너희가 보기는 늘 보아라. 그러나 알지는 못한다“(사6:9).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이 구절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마음에 기름기가 가득한 사람들, 그러니까 ‘뇌물’과 ‘보수’에 정신이 팔린 지도자들은 귀가 둔하게 되어 고아와 과부들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하고, 눈에 뭔가가 덮여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예언자는 들을 생각이 없는 사람들에게라도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들의 숙명입니다.
모세는 가나안을 목전에 둔 백성들을 불러모아놓고 그들이 주님께서 애굽에서 하신 모든 일, 곧 큰 시험과 굉장한 표징과 기적을 그들의 눈으로 직접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적을 목격하는 것과 깨닫는 것, 영적인 눈이 밝아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가 봅니다. 모세는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바로 오늘까지, 주님께서는 당신들에게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지 않으셨습니다.“(신29:4) 문제는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 그리고 듣는 귀입니다. 예언자들조차 사람들의 눈 구실을 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리지도 해석하지도 못할 때 세상의 어둠은 점점 더 짙어집니다.
∙눈을 뜬다는 것
깨달음은 ‘눈 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의 눈을 뜨지 않으면 인생은 오리무중입니다. 견성見性이라는 말은 불교의 깨달음을 이르는 말입니다. 사전은 이 단어를 “헛된 생각과 정신을 홀려 생각을 흐리게 하는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자기 본래의 천성을 깨우쳐 앎”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합니다.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상태를 일어 ‘무명無明‘이라 합니다. 성경에서 무명에 대응하는 단어는 ‘어리석음’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 속으로 ‘하나님이 없다’ 하는구나. 그들은 한결같이 썩어서 더러우니, 바른 일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시14:1).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들의 마음의 눈은 굳게 닫혀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는 이들에게 공중에 나는 새와 들에 핀 꽃을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의 봄은 꿰뚫어 봄입니다. 그것들 속에 깃든 하나님의 숨결을 보고, 하나님의 광휘를 보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서는 믿음을 설명하면서 “믿음으로 우리는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나 있는 것에서 된 것이 아닙니다”(히11:3)라고 말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꿰뚫어보는 능력이 곧 믿음입니다.
∙신령한 所有
구상 선생님의 시를 읽다가 ‘신령한 소유’라는 시와 만났습니다. ‘만났다’는 단어를 굳이 쓰는 것은 그것이 제게 그만큼 깊은 인상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시의 첫 연은 이렇습니다. “이제사 나는 蕩兒가 아버지 품에/되돌아온 心懷로/세상만물을 바라본다.“ ‘이제사’라는 부사는 너무 늦은데 대한 회한을 은근하게 드러냅니다. 조금만 더 일찍 세상의 이치를 알았더라면 좋았으련만 그러지 못한 데 대한 회한입니다.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시인은 방탕한 세월 끝에 아버지의 집에 돌아온 탕아의 심정이 되어 세상만물을 바라봅니다. ‘心懷’는 ‘품은 생각‘이라는 뜻입니다. 허랑방탕했던 세월이 후회막급입니다. 철없이 굴었던 삶이 부끄럽습니다. 그렇지만 돌아보니 삶이 고맙습니다. 아버지가 그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주시니, 세상이 다 선물 같습니다. 신기하고 놀랍기만 합니다. 시인은 그래서 노래합니다.
“저 창밖으로 보이는
6월의 젖빛 하늘도
싱그러운 新綠 위에 튀는 햇발도
지절대며 날으는 참새 떼들도
베란다 화분에 흐드러진 페츄니아도
새롭고 놀랍고 신기하기 그지없다.
한편 아파트 居室을 휘저으며
나불대며 씩씩거리는 손주놈도
돋보기를 쓰고 베갯모 수를 놓는 아내도
앞 행길 제각기의 모습으로 오가는 이웃도
새삼 사랑스럽고 미쁘고 소중하다.“
이 마음 하나 얻을 수 있다면 우리는 소비 중독, 쾌락 중독, 물질 중독, 허위의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요? 가끔 우리는 탕자의 마음이 되어 세상을 바라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큰 아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감사가 없습니다. 왠지 손해보는 것 같아 속상합니다. 불퉁거릴 것 투성이입니다. 곁에 있는 사람들이 밉상으로 보입니다. 이게 우리의 병통입니다.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해 값없이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우리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아니 온몸으로 깨달을 때, 우리 앞에 놓인 세상은 선물로 변합니다. 구상 선생은 그 시를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오오, 곳간의 재물과는 비할 바 없는
신령하고 무한량한 所有!
정녕,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것이
모두 다 내것이로구나.“
입으로 주님을 가까이하고, 입술로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이들은 많지만, 마음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주님을 경외한다고 말하는 이들은 많지만 삶으로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로 인해 지혜는 사라지고 총명도 사라졌습니다. 이사야의 시대도 그러하고 우리 시대도 그러합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이 시대에 우리 영혼은 빈곤합니다. 눈이 열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의 세계에 눈을 떠야 합니다. 눈을 떠야 이웃이 보이고, 그 이웃 속에 함께 계신 하나님이 보입니다. 눈을 떠야 이웃의 눈물이 보이고, 그들의 신음소리가 들립니다.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는 사람은 사람과 자연을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불안에 떨고 있는 낙타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던 그 유목민처럼 우리도 이웃들을 위해 평화의 노래, 생명의 노래 부를 수 있기를 빕니다. 또한 주님의 은총으로 이 가을에 우리 마음의 눈이 활짝 열리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