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귐으로의 초대
요일 1:5-7
(2018/10/14, 창조절 7주, 전 교우 가을 나들이)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들어서 여러분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요, 하나님 안에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귀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대로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요,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과 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사귐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이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 하나님은 빛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기를 빕니다. 한로에서 상강을 향해 가는 계절인지라, 나뭇잎들이 초록색 옷을 벗고 다양한 색채의 옷으로 갈아입고 있습니다. 평화롭고 찬란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어지럽고, 여기저기 풍문처럼 떠도는 이야기들은 사납기만 합니다. 시집을 뒤적이다가 다니카와 슌타로의 시 ‘지구가 너무도 사나운 날에는’이라는 시를 만났습니다.
“지구가 너무도 사나운 날에는
나는 화성에게 말 걸고 싶어진다
이쪽은 흐려서
기압도 낮고
바람도 강해질 뿐
이봐!
그쪽은 어때
달이 보고 있다
완전히 냉정한 제3자로서
많은 별이 주시해서 아프다
아직도 어린 지구의 자식들이여
지구가 너무도 사나운 날에는
화성의 붉은색이 따뜻한 것이다”
(다니카와 슌타로, [이십억 광년의 고독] 중에서, 김응교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11년 2월 25일, p.32)
시인의 감성을 따라 말하자면 노랗고 붉게 물드는 나뭇잎들은 사나운 세상에 사느라 거칠어진 우리 마음을 어루만지는 화성의 손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현존 앞에 있습니다. 주님은 상처 입은 우리 마음을 쓰다듬고 계십니다. 숨 가쁜 질주를 잠시 멈추고 선물로 주어진 삶을 한껏 누려보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깊이를 드러내기 위해 다양한 은유를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요4:24).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4:8). “하나님은 빛이시다“(요일1:5). 하나하나의 은유 속에 담긴 경험의 깊이를 우리가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깊이 경험한 자의 마음이 그 단어들 속에 오롯이 담겨 있다고 봐야 할 겁니다. 요한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빛이시기에 하나님 안에는 어둠이 전혀 없다고 말합니다. 요한의 신학에서 ‘빛’은 햇빛, 달빛, 별빛, 불빛과 같은 빛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우리 삶의 불안을 없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바로 서도록 하는 밝음을 뜻합니다(루돌프 불트만, [요한福音書 硏究(상)], 허혁 역, 도서출판 성광문화사, 1979년 12월 31일, p.33). 하나님 안에는 어둠이 전혀 없습니다. 어둠 속에서는 갈피를 잡기 어렵습니다. 두려움이 지배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산다 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방황하고 있습니다. 빛 안에 살지 못합니다. 칼 라너(Karl Rahner)의 기도가 제겐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주님, 어둠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당신은 여전히 숨어 계시고 당신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당신을 알려고 하거나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당신은 늙어 버린 세상에 여전히 숨어 있는 어린이입니다. ……당신은 세계 역사의 장막에 가려져 여전히 눈에 띄지 않으며, 여전히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사건 속에서 알려지지 않도록 예정되어 있습니다. ……오, 모든 존재의 숨겨진 주님, 그러나 저는 당신을 향한 신앙을 과감히 단언합니다. 저는 당신을 고백하는 가운데, 당신과 함께 서 있을 것입니다.”(캐틀린 노리스, [수도원 산책], 강창헌 옮김, 생활성서, 2004년 3월 24일, p.117에서 인용)
∙하나님과의 사귐
아직 어둠 가운데 있지만 빛을 향해 끈질기게 고개를 들겠다는 다짐입니다. 요한은 믿음을 ‘하나님과의 사귐’이라고 표현합니다. ‘사귀다’의 사전적 정의는 ‘서로 가까이하여 얼굴을 익히고 사이 좋게 지내다’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하나님을 대상화하여 경배하는 것만이 아니라, 마주보면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상을 주거나 벌을 내리는 절대적 타자로 생각합니다. 혹은 우리 생의 문제 해결을 위해 언제든 호출하기만 하면 등장하는 분(Deus ex Machina)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벌을 두려워하여 행하거나 상을 바라서가 아닙니다. 주님과 깊이 사귀기 위해서입니다. 주님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맑아지고, 넓어지기에 사귀는 것입니다.
사귐을 뜻하는 헬라어 ‘코이노니아’는 우리말 성경에서 친교, 나눔, 참여, 기여 등으로 번역됩니다. 진정한 사귐은 생각과 비전을 함께 나누고, 또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함께 손을 맞잡는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빌3:10)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고난에 동참한다고 번역된 단어가 바로 코이노니아입니다. 코이노니아는 그냥 좋을 때만 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순간에도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 생각을 거스를 때도 있고, 희생을 요구할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등을 돌리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과연 이런 하나님과 깊이 사귀며 살고 있습니까? 요한은 사귐의 표식을 ‘어둠의 행실을 벗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사귀고 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행하는 것이고,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바울의 언어로 하자면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는 것”(롬13:14) 혹은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는 삶”(골3:2)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을 방해하는 것은 ‘음행과 더러움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입니다.
∙공동체의 소명
교회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통해 어둠에서 빠져나와 빛을 지향하려는 이들의 모임입니다. 성도들의 사귐은 세상 사람들의 사귐과는 달라야 합니다. 인간적 친밀함은 물론 중요합니다. 취미생활을 함께 할 수도 있습니다. 서로 정보를 주고받으며 유익을 도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사귐의 핵심은 빛 가운데서 살아가도록 서로 격려하는 데 있습니다. 서로 무거운 짐을 나눠지고, 서로 존경하고, 서로 지체가 되고, 서로 화평을 도모하고, 서로 덕을 세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귐의 목표입니다. 사귐은 차이의 소멸을 지향하지 않습니다. 차이를 존중하고, 서로를 용납하는 것입니다. 장 바니에는 신앙 공동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공동체란 모든 사람이─아니 좀 더 현실적으로 보아 대다수가─자기중심이라는 그늘에서 빠져나와 참된 사랑의 빛 속으로 들어가는 장소이다....사랑은 점차 투신으로 화하는 타인과의 친화력이요 계약, 즉 서로가 서로에게 귀속되어 있음을 승인하는 인준이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며 그들의 감정을 함께 느낀다. 사랑은 그들의 요구와 가장 절실한 필요에 응답하는 것이다. 사랑은 그들과 함께 느끼고 괴로와하는 것이다.“(J. 바니에, [공동체와 성장], 성찬성 옮김, 성바오로출판사, 1992년 6월 15일, p.17)
교회는 사람들이 자기중심의 그늘에서 빠져나와 참된 사랑의 빛 속으로 들어가는 장소라는 말이 가슴 찡하게 다가옵니다. 교회는 또한 서로가 서로에게 귀속되어 있음을 승인하는 곳이고, 다른 이들의 필요에 응답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사귐일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교회에 다니면서 상처를 받습니다. 목회자의 정제되지 않은 말, 오염된 말, 편견에 찬 말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자기의 편견을 신앙으로 포장하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 곳에 굳이 머물러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성도들 간의 갈등 때문이라면 너무 급하게 결정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다른 이들과 함께 지내다보면 마음이 상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늘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장 바니에의 말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하느님이 오늘 우리 곁에 데려다 놓으신 이들을 사랑하는 데 있다. 그들은 하느님의 표징이다. 우리라면 다른 사람을, 더욱 사랑스럽고 총명한 사람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이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선택해주신 이들은 바로 곁에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들과 더불어 일치를 이루고 계약을 실천하도록 부르심받고 있는 것이다.”(J. 바니에, 같은 책, p.31)
우리 곁에 있는 이들 때문에 마음이 힘들 때도 있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 곁에 데려오신 사람들입니다. 그들과 더불어 일치를 이루는 것, 또 부르신 소명을 이루며 사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책무입니다. 그 깊은 사귐의 근거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주”셨다는 사실에 대한 감격입니다.
∙가나다라
오늘 우리는 가을 기차여행을 함께 합니다. 아름다운 사귐이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여정을 통해 우리 공동체의 하나 됨과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을 재확인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얼마 전에 한글날 저는 다석 류영모 선생님의 한글 해설에 관한 글을 읽었습니다. 그분은 한글 자음에 모음 ‘ㅏ‘를 붙인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를 영적인 여정으로의 초대로 읽었습니다.
“가 나드리 머 바소오 조차
커터피 하이“
무슨 암호문 같습니다. 김흥호 목사님은 이 대목을 이렇게 풉니다. “나들이 여행을 가서 무엇을 보았느냐. 하느님을 보아야 하지 않느냐.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을 좇아 커지고 터지고 피어야 되지 않느냐.”(김흥호, [다석일지 공부1], 솔, 2001년 3월 15일, p.361) 다석 류영모 선생에게 인생이란 나들이 여행입니다. 그 여행의 목적은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보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좇아 우리 존재가 커져야 합니다. 커지려면 작은 내가 터져야 합니다. 그래야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영적인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류영모, [다석 류영모 명상록. 제1권], 김흥호 풀이, 성천문화재단 1998, 1권 p.140)
오늘 우리가 함께 하는 시간이 하나님을 보는 시간, 하나님을 좇는 시간, 그래서 우리의 존재가 확장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구가 사나운 날 화성의 붉은 색을 그리워했던 시인의 마음처럼 스산하기만 한 우리 마음에도 그런 따뜻함이 차오르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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