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문제는 한 사람이다
롬5:12-15
(2017/04/09, 종려주일)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또 그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온 것과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되었습니다.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가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가 죄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담 시대로부터 모세 시대에 이르기까지는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죽음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아담은 장차 오실 분의 모형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때에 생긴 일은, 아담 한 사람이 범죄 했을 때에 생긴 일과 같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으나,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더욱 더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 지금은 울 때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억하는 종려주일입니다. 사람들은 개선행렬을 연상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예루살렘 입성은 사자굴 속에 들어가는 일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었기에 거룩한 성이라 불리웠지만, 종교가 인간의 탐욕과 결합하여 악취를 풍기던 그 땅에서 주님을 기다린 것은 영광이 아니라 죽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억하는 오늘, 우리는 지난 5일 남대서양에서 침몰한 광석 운반선 스텔라데이지 호의 실종자들과 그 가족들의 애타는 마음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진해운에서 쫓겨나 암담한 시간을 보내다가, 취직이 되어 기쁨의 첫 항해에 나섰던 분을 포함해 많은 이들이 불귀의 객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육상으로 올라온 세월호를 보며 우는 유가족들의 아픔 또한 외면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대통령 선거에 쏠려 있는 이때에 눈물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들을 위해 잠시라도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저 아픔의 땅 시리아에서 사린 가스로 보이는 화학무기가 살포돼 죽어간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이들 20명을 포함해 70여명의 고귀한 생명이 코와 입으로 피를 토하며 죽었습니다. 볼이 불그레한 예쁜 소년이 숨을 헐떡이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사람이라는 사실이 부끄럽게 여겨졌습니다. 어떤 증오가 이처럼 고귀한 생명을 죽음의 벼랑으로 내몰았을까요?
며칠 전에 열렸던 제 책 <끙끙 앓는 하나님> 북토크 시간에 방청객 한 분이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끙끙 앓지 않으시고 기뻐하신 시대가 역사 가운데 있었을까요?" 저는 그 질문 속에 담긴 통곡소리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지 않는 사람은 그런 질문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에덴 이후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역사는 죄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있는 곳마다 분쟁이 있었고, 형제간의 갈등과 죽임이 있었습니다. 창세기는 가인의 후예인 라멕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그는 두 아내 아다와 씰라에게 의기양양하게 말합니다.
"아다와 씰라는 내 말을 들어라. 라멕의 아내들은, 내가 말할 때에 귀를 기울여라. 나에게 상처를 입힌 남자를 내가 죽였다. 나를 상하게 한 젊은 남자를 내가 죽였다. 가인을 해친 벌이 일곱 갑절이면, 라멕을 해치는 벌은 일흔일곱 갑절이다."(창4:23-24)
폭력을 자랑스레 떠벌리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것처럼 암담한 일이 또 있을까요? 사람들마다 권력을 잡으려는 욕망에 취해 있고, 질투와 탐욕에서 헤어나지 못한 세상,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 대한 존중이 점점 무뎌지는 세상입니다. 아브라함 조수아 헤셸의 탄식이 깊은 울림이 되어 다가옵니다.
"지금은 울 때다.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부끄럽다. 사람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살아 있도록 지키지 못한 종교 앞에서, 종교인이라고 불리우는 것이 난처한 일이 되고 말았다…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성전과 구호들 속에 가두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입술에서 죽어가고 있다. 우리는 마침내 표상이 되기를 그만두었다. 동(東)에는 어둠이 서(西)에는 가소로운 우쭐거림이 가득 차 있다. 이 밤을 어찌할 것인가? 이 밤을 어찌할 것인가?"(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선집3, <누가 사람이냐>, 이현주 옮김, 종로서적, 1996년 4월 20일, p.147)
우리도 하나님을 성전과 구호 속에 가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벚꽃이 난분분 바람에 흩어지는 모습이 아름답고, 인공의 불빛도 휘황하지만 지금은 인간의 밤이 분명합니다.
• 절망 직시하기
왜 이 지경이 된 것일까요? 많이 이들이 제게 희망이 있냐고 묻습니다. 그런 질문을 던진다는 사실 자체가 이 시대의 암담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그 마음을 잘 압니다. 저는 희망은 있다고 말합니다. 목사이기 때문에 그저 해보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여전히 희망의 씨앗을 심는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울면서라도 씨를 뿌리는 사람들 말입니다.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땅을 일구며 평화의 씨앗, 생명의 씨앗, 사랑의 씨앗을 심는 이들이 있습니다. 뿌린 씨가 싹이 트지 않을 때 농부들은 그 위에 씨를 덧뿌립니다. 그것을 일러 움씨라 합니다. 움씨를 뿌리는 사람들이 바로 이 시대의 희망입니다. 그들은 세상을 보며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팔을 붙들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이 다 사라질 때까지 희망은 죽지 않습니다.
물론 세상은 여전히 우울하고 암담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세상이 어떻게 도래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인류의 첫 사람을 소환하고 있습니다. 깊은 과거의 우물로 거슬러 오르고 또 오르면 만나게 되는 사람, 바로 그가 아담입니다. 바울은 아담을 역사적인 인물로 생각한 것이 분명하지만, 오늘의 우리는 조금 달리 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담이라는 이름이 '흙'을 뜻하는 '아다마'에서 유래된 것을 생각해보면 그는 모든 인류를 뜻하는 인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담은 저와 여러분 모두를 상징합니다. 바울은 아담을 통해 죄와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또 그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온 것과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되었습니다."(12)
아담의 죄가 무엇입니까?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되고, 선과 악을 알게 되고 싶어 한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선과 악을 분별할 줄 아는 것이 정신의 성숙이라며 인간의 타락을 긍정적으로 설명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문제는 각자가 자기 기준에 따라 선과 악을 주장할 때 세상은 전쟁터로 변한다는 데 있습니다. 지금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소음은 각자의 옳음이 충돌하는 데서 빚어진 것입니다. 자기 뜻 앞에 다른 이들을 굴복시키려는 욕망이 큰 사람일수록 불화의 도화선이 되곤 합니다. 그러면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말아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되 나도 잘못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무능함도 아니고, 무른 것도 아닙니다. 참을 추구하는 사람은 단호할 땐 단호해야 하지만, 유연할 땐 또 유연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부드러운 것은 생명에 가깝고 딱딱한 것은 죽음에 가깝다는 말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아담의 시대로부터 모세 시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죽음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율법을 통해 죄가 죄로 명명되기 이전에도 이미 죽음이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이야기를 하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율법을 통해서는 죄와 죽음을 극복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닐까요?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줄 수 있지만, 우리 속에 뿌리 깊이 자리한 죄를 없애주지는 못합니다. 바울이나 마르틴 루터가 고민했던 지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 한 사람이 건너면
죽음의 지배에서 벗어날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해 세상에 생명이 유입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열어 그리스도의 넘치는 은혜와 의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사람들, 그리스도와의 깊은 일치를 갈망하고, 늘 그분과의 접속을 유지하며 살기를 소원하는 이들은 영원한 생명 안에 있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인간에게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징표입니다. 조르주 루오의 석판화 작품집 <미제레레>에 나오는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교수대에 처형당한 사람의 모습을 형상화한 그는 그 옆에 'Homo homini lupus'라는 글귀를 새겨놓았습니다. '사람은 사람에 대해 늑대'라는 뜻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증오가 집중된 곳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그 증오의 고리를 끊으셨습니다. 당신을 조롱하는 무리들을 바라보며 주님은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눅23:34)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사랑으로 미움을 넘어선 것입니다. 주님은 폭력과 증오의 십자가를 궁극적인 사랑의 표징으로 바꾸셨습니다.
'동물의 왕국'에서 인상 깊게 보았던 장면이 있습니다. 아프리카 사바나 지역에 사는 누 떼는 건기가 되면 새로운 풀을 찾아 무려 1,600km를 이동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여정이 순탄치만은 않습니다. 제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광경은 누 떼가 커다란 강 앞에 당도했을 때입니다. 강에는 포식자인 악어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누 떼는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선뜻 뛰어들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건너편으로 가지 않으면 생존을 이어갈 수 없습니다. 그때 어느 한 마리가 힘차게 강에 뛰어듭니다. 뒤를 이어 수많은 누 떼가 강을 건넙니다. 희생당하는 개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 대다수는 결국 건너편에 당도했고,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역사의 발전도 이와 같습니다. 새로운 세상의 꿈에 사로잡힌 한 사람이 앞서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혼돈의 강물 속에 뛰어들 때 새로운 세상의 문이 열립니다. 탈출공동체가 가나안에 진입할 때 주님의 궤를 멘 제사장들은 마른 땅으로 변한 요단강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발바닥이 제방까지 가득 찬 요단 강 물에 닿는 순간 그 물줄기가 끊어졌습니다. 예수님도 죽음과 공포의 도도한 물결 속에 몸을 던져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여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우리를 구원한다고 고백합니다. 옳습니다. 하지만 이 말을 곡해하면 안 됩니다. 나는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아도 그저 믿는다고 고백만 하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주님은 우리를 십자가의 길로 부르십니다.
지난 주중에 함석헌 선생님의 장편시 '흰손'을 몇 차례 반복해 읽었습니다. 시의 화자는 꿈속에서 무리 지어 보좌 앞으로 나오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멀리서부터 머리 조아려 조아려
걸음마다 떨며 부르는 합창소리,
'감사와 찬송을 드리옵니다
영광과 존귀를 세세에 드리옵니다.'
'죽을 죄인들 아무 공로 없사오나
우리 주 예수 흘린 피 믿습니다.
모든 죄 대속해 주심 힘 입어
의롭다 해주심 얻을 줄 알고 옵니다.'"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우리도 자주 부르는 노래이자 고백입니다. 그런데 보좌에 앉으신 분이 말씀하십니다. "'내 사랑의 피 네 과연 믿고 왔느냐?/어디 보자 내 앞에 서라, 하나씩 서라./아들답게 똑바로 마주서라./내 아들 본 듯 너를 보마, 네 속을 보아주마.'//'얼굴을 들어라./내 아들에 입 맞춘 네 눈동자를 보자./손을 내밀어라./그 피를 움켜 마셨을 그 네 손을.'//'황공 황송하옵니다./어찌 감히 드오리까?/한 것 하나 없고 오직 이름 믿습니다./값없이 그저 주시는 아버지라 해서 왔습니다.'"
'한 것 하나 없고 오직 이름 믿습니다', 우리는 자주 이게 믿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구원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고 오직 주님의 은총으로만 구원받는다고 믿어왔습니다. 신실하게 들리긴 합니다만 보좌에 앉으신 분의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다고 말하는 우리의 손이 희기만 하다고 책망하십니다. 그 피를 믿는다면, 그 피가 우리 살과 뼈, 혼과 얼에 배어 있다면 그분이 하신 일을 하는 게 마땅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믿음의 고백은 있지만 믿음의 능력은 없다는 것입니다.
• 서로 함께
이제 정말 달라져야 합니다. 홀로는 십자가의 길을 걷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함께 가는 동료들이 있으면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꿈에 사로잡힌 이들이 도처에서 작은 등불 하나 밝히는 마음으로 살아낼 때, 우리는 현실의 어둠에 지배당하지 않게 됩니다. 저만치에 예수의 마음에 공명한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절망에 떠밀려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만날 때마다 반가운 사람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사람들이 있을 때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습니다.
교회는 무엇보다 환대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귀히 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교우들이 서로를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으로 알아야 합니다. 정현종 선생은 '방문객'이라는 시에서 "사람이 온다는 건/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그는/그의 과거와/현재와/그리고/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부서지기 쉬운/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마음이 오는 것"이라고 노래했습니다. 부서지기 쉬운,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을 품어 안을 때, 우리 속에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중증 장애인들의 공동체인 라르슈 공동체를 만든 장 바니에는 우리가 이상적인 공동체를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오늘 우리 곁에 데려다 놓으신 이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더불어 일치를 이루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실천하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장 바니에, <공동체와 성장>, 성찬성 옮김, 성바오로출판사, 1992년 6월 15일 p.31 참조).
복음에 의해 한 사람이 변하면, 공동체도 따라 변합니다. 옆을 기웃거릴 것 없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앞서 가신 그 길을 주저하지 말고 따라 걸어야 합니다. 섣부른 희망의 노래를 부를 것도 없고, 지레 절망에 사로잡힐 것도 없습니다. 묵묵히 그 길, 십자가의 길을 향해 나아갈 때, 우리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네가 바로 세상의 희망'이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 꼭 붙들고 전장과 같은 세상에서 사랑과 평화의 파종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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