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살피시는 주님
렘17:5-11
["나 주가 말한다. 나 주에게서 마음을 멀리하고, 오히려 사람을 의지하며, 사람이 힘이 되어 주려니 하고 믿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는 황야에서 자라는 가시덤불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소금기가 많아서 사람이 살 수도 없는 땅, 메마른 사막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다. 그는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서 뿌리를 개울가로 뻗으니, 잎이 언제나 푸르므로, 무더위가 닥쳐와도 걱정이 없고, 가뭄이 심해도, 걱정이 없다. 그 나무는 언제나 열매를 맺는다.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누가 그 속을 알 수 있습니까?" "각 사람의 마음을 살피고, 심장을 감찰하며, 각 사람의 행실과 행동에 따라 보상하는 이는 바로 나 주다." 불의로 재산을 모은 사람은 자기가 낳지 않은 알을 품는 자고새와 같아서, 인생의 한창때에 그 재산을 잃을 것이며, 말년에는 어리석은 사람의 신세가 될 것이다.]
• 살아 있음의 놀라움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며칠 전에 내린 비가 대기를 청명하게 만들었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정원에 조금씩 초록이 번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봄은 그렇게 오고 있습니다. 몇몇 분들로부터 요즘은 사는 게 좀 우울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늘 피곤하고, 별다른 기대도 없이 하루 하루를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생명의 기쁨에 겨워 아침 햇살처럼 환한 얼굴 보기가 참 어렵습니다. 축 늘어진 어깨, 핏기 없는 얼굴, 지친 발걸음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감옥 마당'이라는 그림이 떠올랐습니다.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의 사람들이 감옥 마당에 나와 운동을 합니다. 운동이래야 그저 높다란 붉은 담장 안에서 빙빙 도는 것뿐입니다. 어떤 이는 뒷짐을 지고 있고, 어떤 이는 주머니를 손을 찔러넣고 있습니다. 담장에 난 조그마한 창문이 그들의 희망 없는 상황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도 지금 그렇게 권태로운 일상 주위를 맴돌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신나는 일이 없다고 하여 생을 허비할 수도 없습니다. 묵묵히 자기에게 주어진 생을 살아내야 합니다. 살다 보면 하고 싶은 일을 할 때보다 해야 할 일을 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 가슴 한켠에 비애감이 자리 잡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애상에 잠길 필요는 없습니다. 팔레스타인의 시인 키파 판니의 글을 읽다가 가슴 한켠이 무지근해졌습니다. 그는 가끔 빗속을 우산도 없이 걷는다고 합니다. 우울함을 쫓기 위한 자연적 처방입니다. 팔레스타인 땅에서 늘 죽음의 공포와 대면하며 살고 있기에 그런 것일까요? 그의 말은 참 절실합니다.
"허다하고 정기적인 죽음 속에서는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각별히 축하할 일이요, 비에 젖는 것쯤이야 도리어 살아있음의 징표가 된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음날에도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에 감사드려야 한다."(<팔레스타인과 한국의 대화>,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 기획 번역, 열린길, 2007년 12월 20일, p.20-21).
키파 판니가 들려주는 팔레스타인의 현실은 좀 암담합니다. 누군가와 "그래, 또 봐!" 하고 헤어져 놓고도 과연 그럴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는 현실, 잘 지냈느냐는 인사 대신 "아직 살아있었구나!"라고 말하는 이들을 보며 그는 아파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있다는 사실은 참 놀라운 일입니다. 히브리의 시인의 노래가 떠오릅니다. "내가 이렇게 빚어진 것이 오묘하고 주님께서 하신 일이 놀라워, 이 모든 일로 내가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내 영혼은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압니다."(시139:14) 이런 놀람이 우리 속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내가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에 감격할 때 삶은 신선해집니다. 또 다른 시인은 "주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시116:12) 하고 묻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질문이 될 때 삶은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 어리석은 인생
누구나 잘 살고 싶어합니다.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남들보다 높은 자리에서 거들먹거리며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생명의 소명은 자기를 넘어서는데 있습니다. 자기를 넘어 더 큰 가치와 끊임없이 접속하며 사는 것이 참 삶의 길입니다. 좋은 세상 혹은 좋은 사회는 그런 삶을 선택하는 것이 어렵거나 낯설지 않은 곳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주전 6세기의 예언자 예레미야는 백성들을 바른 길로 이끌어야 할 정치 지도자들, 종교 지도자들의 죄를 준엄하게 꾸짖었습니다. 그들은 진리와 공평과 정의를 저버리고, 자기들에게 위임된 권한을 제 욕심 차리는데 사용했습니다. 섬기고 돌보라고 주어진 권력을 자기들이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활용했습니다. 백성들 또한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생수의 근원'인 주님을 버리고 '물이 새는 웅덩이'를 파서, 그것을 샘으로 삼았습니다(렘2:13). 풍요의 환상을 좇느라 하나님께 등을 돌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사람의 마음에는 늘 헛헛함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결핍감입니다. 사람들은 그 헛헛함을 채워줄 것을 찾느라 분주합니다. 이런 저런 물건을 사기도 하고, 명예를 구하기도 하고, 권력을 탐하기도 합니다. 그런 숨가쁜 열정은 잠시 우리를 달뜨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것이 삶의 궁극적인 해답일 수는 없습니다. 욕망이 채워지는 순간, 사람들은 그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질까 두려워합니다. 욕망과 그것을 채우기 위한 숨가쁜 질주와 두려움의 악순환이 끝날 줄 모릅니다. 평안도 안식도 없습니다. 삶은 마치 바람을 잡는 것처럼 공허해집니다.
때로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보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 기대를 걸 때도 있습니다. 유력자들 곁에 머물면서 그들과 자기를 합일화해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좀 잔인할 정도로 냉정하게 그런 시도의 허망함을 지적합니다. "나 주가 말한다. 나 주에게서 마음을 멀리하고, 오히려 사람을 의지하며, 사람이 힘이 되어 주려니 하고 믿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17:5) 유력자를 따르거나 유력한 집단에 속함으로 자기의 불안감을 달래려는 이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자기들 편에 서지 않는 사람들을 악마화하거나 색깔을 칠해서 배제하려 합니다. 자기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다른 이들을 파렴치한 사람이나 위험한 사람으로 매도하는 이들을 보면 가슴이 좀 답답해집니다. 정현종 선생은 '우상화는 죽음이니'라는 시를 통해 그런 현실을 통탄하고 있습니다.
"우상화는 죽음이니/우상화하지 말라/위대하신 누구이든/우상화 법석 속에서는/우상도 시체요/우상화하는 사람들도 시체이니/제발 우상화하지 말라//그저 좋아하고 그저/사랑하고 사뭇/찬탄은 할이로되/섬기지는 말아야지,/우상은 癌이요/우상화는 에이즈요/하여간 전면적이니 죽음이니,/사람이든 사상이든 그 무엇이든/하나밖에 없으면 말할나위 없이/전면적인 죽음이니―(하략)"
좋아하고 사랑하고 찬탄하는 것이야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하지만 누군가를 우상화하는 것은 그를 죽이는 일인 동시에 자기를 죽이는 일입니다. '우상은 암'이고 '우상화는 에이즈'이고 죽음입니다. 우상화에 몰두하는 이들이 거둘 것은 환멸입니다. 그들은 황야에서 자라는 가시덤불 같이 될 것이고, 메마른 사막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 마음을 믿지 말라
우리가 의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돈과 명예와 권세, 이데올로기 혹은 유력자만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도 믿을 것이 못됩니다.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누가 그 속을 알 수 있습니까?"(17:9) 예레미야는 대체 어떤 씁쓸한 경험을 했길래 이런 인식에 도달한 것일까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에 대해 너무 비관적인 평가가 아닌가요? 하지만 이것은 교리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현상학적으로 관찰한 진실입니다. 죄의 영향력 아래 살아가는 우리 마음은 늘 자기를 우주의 중심에 놓곤 합니다. 자기의 작은 고통에는 크게 비명을 지르면서도 다른 이들이 겪는 큰 고통은 외면해버리고 맙니다. 이것을 잠언은 '마음의 비뚤어짐'(잠11:20) 혹은 '어리석음'이라 가르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타락이란 도덕적인 파탄 지경에 이른 것을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본래의 마음을 품고 살지 못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 만물은 영고성쇠는 있지만 타락하지는 않습니다. 영적인 존재인 인간만이 타락합니다.
사사기에 나오는 한 에피소드가 생각납니다. 위대한 사사 드보라의 노래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가나안 임금 야빈의 군사령관인 시스라는 전쟁 중에 드보라가 세운 장군 바락에게 쫓기다가 야엘이라는 여인의 장막에 몸을 숨깁니다. 야엘은 그에게 우유를 대접하고, 이불을 덮어주면서 눈을 붙이라 권합니다. 시스라가 잠에 빠지자 야엘은 그의 관자놀이에 말뚝을 박아 그를 살해합니다. 여기서 이야기꾼은 다른 장면을 보여줍니다.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시스라의 어머니는 아들의 늦은 귀가를 걱정합니다. 그러다가 아들이 전리품을 챙기고, 성적 노리개로 삼을 처녀들을 차지하느라 늦는 모양이라고 편리하게 생각합니다(삿5:28-30). 나중에 아들의 비참한 죽음을 알았을 때 시스라의 어머니는 땅을 치고 통곡했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시스라의 어머니는 아들이 사람들을 죽이고, 빼앗고, 여인들을 성적 노리개로 삼는 것에 대해 아무런 죄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는 아들을 사랑하는 성실한 어머니이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행복을 위해 다른 이들을 수단으로 삼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타자들의 고통에 대해 연민을 품지 않는 것, 바로 그것이 타락이요 죄입니다. 이 덧거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동안 우리 마음은 그렇게 자기 속으로 구부러져 있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교양으로 치장하고, 믿음의 망토를 걸친다 해도 소용없습니다. 주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각 사람의 마음을 살피고, 심장을 감찰하며, 각 사람의 행실과 행동에 따라 보상하는 이는 바로 나 주다."(7:10) 여기서 '마음'으로 번역된 단어는 사실 '콩팥'을 가리킵니다. 옛 사람들은 콩팥에 인간의 의지, 양심, 감정이 머문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장은 생각과 지성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여드리고 싶어하는 것만 보시는 분이 아니라, 애써 숨기고 싶어하는 것까지도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성 어거스틴은 절친한 벗의 증언을 들을 때 자기 마음에 일어난 동요를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 주님, 그가 이렇게 말하는 동안 당신은 나를 나 자신으로 돌이켜 자기 성찰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내 자신을 살피기 싫어서 이때까지 내 등 뒤에 놓아 두었던 나를 당신은 잡아떼어 내 얼굴 앞에 갖다 세워 놓으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나로 하여금 내가 얼마나 보기 흉하고, 비뚤어지고, 더럽고, 얽었고, 종기투성이인지 보게 하셨습니다. 나는 나 자신이 보기 싫어서 나를 피해 어디로 가고 싶었으나 갈 곳은 없었습니다."(어거스틴,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 제8권 7장 , 성한용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08년 8월 30일, p.260-1)
자기의 깊은 속마음을 본다는 것, 그것은 회피하고 싶은 일일 겁니다. 보기 흉하고, 비뚤어지고, 더럽고, 얽었고, 종기투성이인 자기 마음을 본다는 것처럼 참담한 일이 또 있을까요? 하지만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치유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을 한사코 보지 않으려 하기에 우리는 은총에 이르지 못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우리 앞에 있는 두 길
우리 앞에는 두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를 믿고 의지하며 사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삶입니다. 예레미야가 가리켜 보이는 생명의 길은 물론 주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접속하고, 그 마음을 기준음 삼아 자기 마음을 조율하는 사람, 그는 당당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한 사도들은 어떠한 위협과 고통 앞에서도 비굴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몸을 의의 연장으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롬6:13). 바울 사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롬8:31). 이런 든든함이 있었기에 그들은 자유인의 초상으로 우뚝 서 있습니다. 사나 죽으나 그들은 주님께 속한 생명입니다. 그들은 이미 부활을 이 땅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이들의 삶을 예레미야는 우리가 잘 아는 이미지에 담아 설명합니다.
"그는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서 뿌리를 개울가로 뻗으니, 잎이 언제나 푸르므로, 무더위가 닥쳐와도 걱정이 없고, 가뭄이 심해도, 걱정이 없다. 그 나무는 언제나 열매를 맺는다."(17:8)
그들의 삶이 늘 유쾌하고 풍족하다는 말이 아닐 것입니다. 절망의 상황 속에서도 그들은 희망을 접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자신을 선물로 내주는 일을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힘든 일을 만나면 '아, 좀 쓰군!' 하고 말하지만, 자기 속에 깃든 어둠으로 다른 이들까지 어둡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최승호 시인의 '오징어3'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 오징어 부부는/사랑한다고 말하면서/부둥켜안고 서로 목을 조르는 버릇이 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목을 조르는 것, 희망을 말하면서도 절망에 깊이 침잠하는 것, 이것이 믿음 없는 자의 삶입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주님은 우리들의 말에 속지 않으십니다. 우리 마음과 심장을 살피시고, 우리의 행실과 행동에 따라 보상하십니다. 불의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으거나, 높은 자리에 올라간 이들은, 마치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자의 운명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기왕 이 세상에 왔다면 그저 욕심에 따라 살다가 입안 가득 허무함만을 머금고 가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존재가 되는 기쁨을 누리다 주님께로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 나은 존재가 되는 길은 우리 이웃들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 마음 쓸 때 열립니다. 대동강 얼음도 녹는다는 우수 절기에 우리 마음에 깃든 이기주의의 얼음이 녹아, 생명을 북돋고 풍성하게 하는 기쁨이 가득 차오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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