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악마의 셈법

천국생활 2017. 3. 24. 20:11

악마의 셈법
요11:45-54


[마리아에게 왔다가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대 사람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몇몇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가서, 예수가 하신 일을 그들에게 알렸다.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공의회를 소집하여 말하였다. "이 사람이 표징을 많이 행하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 사람을 그대로 두면 모두 그를 믿게 될 것이요, 그렇게 되면 로마 사람들이 와서 우리의 땅과 민족을 약탈할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르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민족 전체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당신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소." 이 말은, 가야바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 해의 대제사장으로서, 예수가 민족을 위하여 죽으실 것을 예언한 것이니, 민족을 위할 뿐만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자녀를 한데 모아서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예언한 것이다. 그들은 그 날로부터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유대 사람들 가운데로 더 이상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거기에서 떠나, 광야에서 가까운 지방 에브라임이라는 마을로 가서, 제자들과 함께 지내셨다.]

• 무엇을 보는가?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벌써 사순절 세 번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내일은 절기상으로 춘분입니다. 농가월령가의 2월령은 이 절기를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반갑다 봄바람이 의구依舊히(옛날과 같이) 문을 여니, 말랐던 풀뿌리는 속잎이 맹동萌動(움트기 시작)한다. 개구리 우는 곳에 논물이 흐르도다. 멧비둘기 소리 나니 버들빛 새로와라." 참 좋지요? 이 시절의 서정이 절로 떠오릅니다. 며칠 전 집에 가는 길에 효창공원을 걸었습니다. 물웅덩이 옆에 한 노인이 서서 하염없이 물속을 들여다보고 계셨습니다. 그분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 두꺼비 떼가 느릿느릿 오물거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꽃소식이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참 좋은 계절입니다. '봄'은 볼 게 많아 '봄'이라지요? 지금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너는 무엇을 보고 있느냐?"고 물으시자 예레미야는 "저는 살구나무 가지를 보고 있습니다"(렘1:11) 하고 대답했습니다. 살구나무라고 번역된 '샤케드'는 '지켜보다는 뜻의 '쇼케드'와 발음이 비슷합니다. 예언자는 보는 사람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무심코 스쳐지나가는 것을 유심히 바라봅니다. 그에게 세상은 하나님이 숨겨놓으신 암호로 가득 찬 곳입니다.

인생은 어쩌면 보는 법을 배우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교우이신 사진작가 권산 씨는 몇 년 째 세상 도처에 숨어 있는 십자가를 찾아 찍고 있습니다. 그도 보는 사람입니다. 그는 동사 어미 '-어', '-아' 등의 아래에서 시험삼아 하는 뜻을 나타내는 보조동사 '보다'라는 말에 주목합니다. 바라 보다, 품어 보다, 읽어 보다, 참아 보다. 펼쳐 보다, 안아 보다, 만나 보다, 웃어 보다, 그려 보다…이 목록은 한 없이 확장될 수 있습니다. 말장난처럼 생각될 수도 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람은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보고, 손과 발 그리고 가슴으로도 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직 눈으로만 세상을 보는 사람들은 세상을 아는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들에 핀 꽃과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하신 것도 이런 뜻일 겁니다. 제대로 보는 순간 우리는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사람이나 사물을 대할 수 없습니다.

• 명분 세우기
오늘 본문은 마리아에게 왔다가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대 사람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바울 사도는 "믿음은 들음에서 생기고, 들음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에서 비롯"(롬10:17)된다고 말합니다. 들음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百聞不如一見이라는 말처럼 보는 것이 듣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예수를 믿게 된 이들은 죽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사건의 목격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라는 존재와 더불어 시작되는 새로운 세상을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옛 삶의 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있게 마련입니다. 목격자 가운데 몇 사람이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가서 예수가 하신 일을 알렸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즉시 공의회를 소집했습니다. 공의회의 안건은 아주 간단합니다. "이 사람이 표징을 많이 행하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47) 기존 질서의 토대를 흔들고 있는 예수라는 사나이를 어떻게 처리할까가 그들의 관심사입니다. 예수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질서는 그들의 안중에 없습니다. 어떻게 하든 자기들의 기득권이 침해받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일은 자기들의 안위입니다. "이 사람을 그대로 두면 모두 그를 믿게 될 것이요, 그렇게 되면 로마 사람들이 와서 우리의 땅과 민족을 약탈할 것입니다."(48) 그들은 예수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민족 전체의 안위가 걸려 있는 것처럼 포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압니다. 그들은 전체를 위한다는 명분 속에 자기들의 사적 이익을 숨기고 있습니다. 그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입을 열었습니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르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민족 전체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당신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소."(50)

한 사람의 희생으로 민족 전체가 위기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면 당연히 그쪽을 선택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의 셈법은 간단합니다. 개인은 전체를 위해 희생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동감하시는지요? 국가주의 혹은 전체주의적 사고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살아온 사람일수록 소수자의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무딘 경우가 많습니다. 9.11 이후 미국이 벌였던 테러와의 전쟁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어린이들과 여성들의 피해가 컸습니다. 그런데 그 전쟁을 지시한 이들은 그들의 희생을 '부수적 손실'(collateral loss)이라고 말합니다. 더 큰 피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그들의 희생을 정당화하는 것이 정말 합당한 일일까요? '손실'이라는 표현 속에는 통계학적 수치만 있지,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인간, 따뜻한 피가 흐르는 인간은 없습니다. 이게 폭력적인 세상의 실상입니다. 우리가 분노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런 결정을 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피해도 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자기 가족의 희생이나 재산의 손해가 예상된다면 그들이 그런 결정을 할 수 있을까요?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전체주의적 발상이 얼마나 비성경적인 것인지를 인상깊게 설명해줍니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희생당해서는 안 된다면서 그는 한 가지 예를 듭니다.

"만일 적들이 모여 있는 여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모두 욕보지 않으려면 너희 가운데 하나를 우리에게 보내라'고 한다면 그들이 와서 모두를 욕보이게 할지언정 어느 한 여자를 뽑아서 욕보게 해서는 안 된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선집3, <누가 사람이냐>, 이현주 옮김, 종로서적, 1996년 4월 20일, p.137)

누구도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을 강요받아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상황이 위급할 때면 우리도 누군가를 희생시킴으로 나의 안위를 보장받고 싶어 합니다.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됩니다. 두렵고 떨리지만 한 사람을 희생시키지 않기 위해 위험을 무릅쓸 때 우리는 인간적 존엄을 유지하게 됩니다. 민족 전체를 위해 한 사람을 희생시킬 수 밖에 없다는 가야바의 말은 세속적으로는 지혜로운 말인지 모르겠지만, 신앙적으로 보면 불신앙 그 자체입니다. 최고 종교 지도자가 한 말이라고 믿기 어려운 말입니다.

• 피 흘림이 없이는
민족을 위해 예수를 희생시키는 게 옳다는 가야바의 말은 성경의 정신과 무관합니다. 그런데도 요한은 51절에서 그 말에 숨겨진 의미가 있다고 말합니다. 가야바는 그 해의 대제사장으로서 일종의 예언을 했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의 죽음 속에 담긴 의미를 두 가지로 해석합니다. 첫째는 예수의 죽음이 민족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그 죽음을 통해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서 하나가 되게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과론적인 설명인 셈입니다. 실제로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의 좌절처럼 보였지만, 오히려 십자가는 그 꿈이 확산되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프랑스 떼제의 저녁 금요 기도회 시간에는 십자가 곁으로 다가가 기도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모여온 젊은이들, 나라와 인종이 다른 이들이 화해와 평화와 생명의 상징인 십자가 주위에서 기도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감동입니다. 죽음의 징표인 십자가가 죽음조차 무력화시킬 수 없는 희망의 징표로 바뀌었음을 우리는 압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 세상의 모든 죄와 모순을 기꺼이 짊어지심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살과 피를 가지신 예수님이 친히 죽음의 공포를 견뎌야 했던 것은 "일생 동안 죽음의 공포 때문에 종노릇 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함"(히2:15)이었습니다. 성경은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이루어지지 않는다(히9:22)고 말합니다. 이건 역사의 발전 과정을 조금만 살펴봐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물론 우리가 죄 사함의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전보다 조금 나아졌다면 그것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좀 더 나은 세상을 열기 위해 피와 땀을 바친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비교적 자유로운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버밍햄 시립교도소에서 동료 목사들에게 보낸 편지(1963년 4월 16일)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우리는 뼈저린 경험을 통해서 자유란 압제자가 자발적으로 베풀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피압제자들은 투쟁을 통해서만 자유를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오랜 세월 동안 나는 '기다려라!'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그 말은 흑인들이라면 누구나 귀가 닳도록 들어온 말입니다. '기다려라!'라는 말은 대부분 '안 돼!'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저명한 법학자의 말처럼 '정의의 실현을 지나치게 지연하는 것은 정의의 실현을 거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마틴 루터 킹 자서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클레이본 카슨 엮음, 이순희 옮김, 바다출판사, 2000년 3월 27일, p.245)

누릴 것을 다 누리는 이들이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기다리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기만적인 말인지 모릅니다. 그 기만적 속임수에 도전하면서 자유의 지평을 조금씩 확장해가는 것이 인간의 역사입니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사랑의 빚을 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이들이 뿌린 것을 우리는 거저 수확하며 삽니다. 고마움을 아는 이들은 후손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 지금 생명과 평화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사람은 지금 이 자리에서 그 나라를 살기 시작해야 합니다. 삶으로 번역되지 않는 신앙 고백은 공허합니다.

진정한 지도자는 자기를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이가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빌2:6-8).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앞서 걸으신 그 길을 따라 걷는 것입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끊임없이 이기적인 선택을 하도록 우리 옷자락을 잡아당깁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그 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힘으로도 되지 않고, 권력으로도 되지 않으며, 오직 나의 영으로만 될 것이다."(슥4:6) 주님께서 스룹바벨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만 감당할 수 있습니다.

•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가 착착 진행되고 있음을 예수님이 모를 리 없었을 겁니다. 주님은 잠시 유대 사람들에게서 몸을 피하셨습니다. 광야에 가까운 에브라임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비겁한 도피가 아닙니다. 위험을 향해 맹목적으로 돌진하는 것만이 용기가 아닙니다. 때를 분별하면서 때에 맞는 처신을 하는 것이 지혜요 용기입니다. 아직 그의 때가 이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는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 한다는 소문이 들려오자 예수님이 보이신 반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서, 그 여우에게 전하기를 '보아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칠 것이요,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끝낸다'고 하여라.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 예언자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눅13:32-33)

예수님은 죽음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은 분이 아닙니다.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게 더 중요했습니다.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고, 절망의 늪에 빠진 사람들을 건져 올려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하는 것이야말로 주님의 일입니다. 어떠한 위협 속에서도 그 일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일을 하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린다면 회피할 생각도 없습니다. 주님은 육신을 죽일 수 있지만 영혼을 죽일 수 없는 이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주님은 보내신 분의 뜻을 다 행한 후에 보내신 분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영광'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 때를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사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언제 부르시든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는지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한 기회이고, 우리가 머물고 있는 장소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해야 할 일터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악마의 셈법을 가르치며 편의주의를 권고합니다. 나를 위해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모두 악마에게서 나온 간지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하루하루 생명을 풍성하게 하고, 평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더디더라도 우리가 뿌린 씨앗은 반드시 결실로 나타날 것입니다. 씨 뿌리는 자의 행복을 누리며 사십시오. 버들잎에 물이 오르는 것처럼, 메말랐던 우리 이웃들의 가슴에 움터오는 생명의 봄을 보며 기뻐하십시오. 우리의 아름다운 실천 위에 주님의 은총이 더해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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