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날마다 새롭게

천국생활 2017. 2. 26. 13:12

날마다 새롭게
롬12:1-2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 믿음은 삶의 문제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오늘 우리는 산상변화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주님은 수난의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기 전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제자들은 해처럼 빛나는 주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의 옷도 빛처럼 희어졌습니다. 어떤 초자연적인 기적이 일어난 것일까요? 인간 예수라는 겉모습 속에 감춰져 있던 신적 속성이 드러난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 사건을 하나의 은유로 해석한 것이지요? 우리는 시내산에 올라 주님과 말씀을 나누고 내려오던 모세의 얼굴에서 빛이 났다는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출34:29). 사람들은 그의 살결이 빛나는 것을 보고 신적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자기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빛은 창조의 첫날 창조된 그 빛일 겁니다. 변화산에서 주님의 얼굴에 떠올랐던 빛도 마찬가지입니다. 올해 우리 교회의 표어인 '어둠을 뚫고 솟아오르는 빛으로'는 바로 이 빛과 만난 이답게 세상을 밝히자는 의미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전히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욕망의 거리를 비틀거리며 걷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라는 푯대를 향한 우리의 순례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습니까? 날마다 더 나은 존재가 되려는 꿈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닙니까? 로마서는 죄 가운데 사는 이들이 어떻게 빛을 지향하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책입니다. 바울은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다같이 죄 아래에" 있다(롬3:9)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다 곁길로 빠져서, 쓸모 없는 존재가 되었고, 선한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이 자못 비장합니다.

"나는 내 속에 곧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여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는 않으니 말입니다."(롬7:18)

자기를 깊이 성찰하는 이가 아니면 이런 인식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사람답게 살아보고 싶어 몸부림치지만 번번이 그 길에서 미끄러지곤 하는 자기 자신에게 절망한 사람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고백입니다. 몸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참 힘겹습니다. 몸의 욕망이 우리 마음의 소원을 굴복시킬 때가 많으니 말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육신에 속한 생각은 하나님께 품는 적대감"(롬8:7)이라면서 그 결과는 영혼의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령에 속한 생각은 생명과 평화입니다. 성령은 빈들에 있는 마른 풀 같이 시들은 우리 영혼에 단비처럼 임하셔서 우리를 소생시키고, 또 새로운 존재로 빚어주십니다. 새로운 삶을 갈망하는 이들에게 성령은 때로는 불길처럼, 때로는 빛처럼, 때로는 바람처럼, 때로는 생수처럼 임하셔서 '애통하고 회개하는 마음'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가슴에 품고 살게 해주십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입니까? 생명과 평화의 길을 옹골차게 걸어가고 있습니까?

• 거룩한 산 제물
주님이 값없이 베푸신 은혜로 새롭게 빚어진 이들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과 이웃을 바라봅니다. 그렇게 바라보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직 여린 믿음의 단계에 있는 이들은 늘 자기 자신의 문제 주위를 맴돌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립니다. 하지만 성숙한 믿음의 자리에 선 사람들은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선물로 내놓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롬12:1b)

우리 몸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산 제물로 바치는 것, 바로 그게 진정한 예배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를 가리켜 죄에 대해서 죽은 사람이라 말합니다. 그들은 몸의 정욕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지체를 의의 종으로 하나님께 바칩니다. 예수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그것은 내가 목숨을 다시 얻으려고 내 목숨을 기꺼이 버리기 때문이다"(요10:17). 믿음생활의 과정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옛 사람에 속한 것들을 아프게 도려내는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김옥진이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놀다가 축대에서 떨어져 전신마비 환자가 되었습니다. 바깥 출입을 할 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늘 엎드려서 지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서러운 삶을 견딜 수 있게 해준 것은 시심이었습니다. 영성 일기를 쓰듯이 써내려간 시들이 어느 눈 밝은 이의 손을 거쳐 시집이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나오는 한 편의 시를 들어보십시오.

"하루에도 수십번씩/나를 죽이며 살아간다//교만을 죽이고/위선을 죽이고/욕심을 죽이고/분노를 죽이고//일년 삼백 예순 날/잡풀같은 티끌들이/마음에 쌓일 적마다//도려낼 듯한/뼈 마디마디의 아픔으로/나를 죽이고/발가벗은 알몸의 쓰라림으로/나의 더러움을 씻기우고//깊은 밤이면/이렇게 깊은 밤이 오면//눈물같은 일상의 일들이/한가닥 기도가 되어//모래알만한 나를 싣고/내일로 잠들어 간다"('나를 죽이며' 전문)

이 시를 읽으며 깊은 자책감에 사로잡혔던 적이 있습니다. 집 밖 출입을 하지 못하는 한 여성이 뭐 그리 잘못한 게 많다고 이렇게 하루에도 수십번씩 자기를 죽이며 산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시시때때로 떠오르는 교만, 위선, 욕심, 분노를 죽이고, 마음을 어수선하게 하는 티끌들이 마음에 쌓을 때마다 도려낼 듯한 아픔으로 자기를 죽이는 이 도저한 자기 응시가 지나친 것 같기도 하지만, 맑은 영혼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고백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철저하게 자기를 돌아보며 살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꾸만 자신의 부족함을 아파하며 우리 삶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믿음은 삶의 문제이지 마음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마르틴 루터는 세례의 의미를 '옛 아담이 죽고 새 사람으로 부활하는 것'으로 설명하면서, 믿는 이들의 삶이란 '매일 세례'와 다를 바 없다고 말합니다(마르틴 루터, <대교리문답>, 최주훈 옮김, 복있는사람, 2017년 2월 3일, p.315). 기독교인은 매일 옛 존재와 작별하고 새로운 존재로 옷 입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 때 우리의 일상은 그 자체가 예배입니다. 그 예배는 이중적 과정으로 구성됩니다. 먼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놓으신 은혜를 몸과 마음에 깊이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 다음은 거듭난 사람의 감격과 기쁨을 가지고 우리가 살고 있는 욕망의 거리를 정화하는 것입니다.

•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왠지 우리의 일상과는 너무 동떨어진 요구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하지만 믿는 이들은 다른 삶을 상상하는 이들입니다. 주류 질서가 우리를 길들인 대로 살아가는 이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비전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대를 꿰뚫어보는 혜안입니다. 바울 사도는 믿는 이들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끊임없이 길들이려 합니다. 어떤 틀 속에서 사고하도록 만듭니다. 그 틀을 벗어나려는 이들에게는 '비정상' 혹은 '불온'의 찌지를 붙여 어딘가에 격리시키거나 추방합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말 잘 듣는 사람들을 모범생이라고 추켜세움으로 그들의 일탈 가능성을 은근하게 차단했습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이나 '너무 앞서지도 말고 뒤쳐지지도 말고 중간만 하라'는 군대식 교훈이 마치 지혜자의 말인양 유통되고 있습니다. 세상에 길들여진 존재처럼 슬픈 게 또 있을까요? 그들은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힘 있는 이들이 약한 이들을 지배하고 착취하고 억압하는 것이 당연시되던 세상의 질서를 전복시켰습니다. 세상의 지배자들이 지배의 편의를 위해 세웠던 분리의 장벽들, 즉 여자와 남자, 유대인과 이방인,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의인과 죄인 등을 가르던 장벽을 넘나들면서 사람들이 서로 만나고 소통하도록 만드셨습니다. 미움이 아니라 사랑이 영원한 가치임을 삶으로 입증하셨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시대의 가치관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내면화하고 살아갑니다. 우리 시대는 어떠합니까? 많은 이들이 행복이라는 신기루를 좇아가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할 때 했던 말을 기억하십니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 세상의 모든 유혹은 이 말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뜻과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강제하고 싶어합니다. 하고 싶은 일을 제한없이 하고 싶어합니다. 우리가 속하여 있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전능하다는 느낌을 주는 게 하나 있습니다. 돈입니다. 돈이 있으면 못할 일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을 좇느라 숨을 헐떡이며 질주합니다.

자본주의가 작동되는 원리는 간단합니다. 남들과 구별되는 존재가 되라고 말합니다. 그 말의 주술에 걸린 사람들은 남들이 갖지 못한 것, 여간해서는 갖기 어려운 것을 갖고 싶어합니다. '희소성'이야말로 자기의 가치를 보장해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많은 돈을 벌어야 합니다. 돈을 향해 질주하는 동안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다 잊어버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을 잊고, 함께 사랑하며 오순도순 살아가라고 하나님이 주신 이웃들을 잊고 삽니다. 이게 바로 존재 망각이고 인간 상실입니다. 욕망의 벌판을 질주하는 이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이웃들에 대한 두려움과 의심입니다. 남들과 구별되고 싶어하는 욕망으로 인해 우리는 '함께 함'의 기쁨을 잊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바라보면서도 경탄할 줄을 모르는 사람으로 변하고 맙니다. 믿는 이들은 이런 세상의 실상을 꿰뚫어볼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인력에 속절없이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평화의 부름에 응답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 하나님의 뜻을 분별함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이 새로워져야 하고, 삶의 지향이 바뀌어야 합니다. 언젠가 김교신 선생님의 글을 읽다가 크게 공감한 적이 있습니다. 죄와 맞서 싸워서는 죄를 이길 수 없다면서 한 이야기로 기억합니다. 사람들은 상처에 생긴 딱지가 아물어 떨어질 때까지 진득이 버려두지 못하고 자꾸만 뜯으려 하기에 오히려 상처가 낫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딱지가 떨어지기 위해서는 속에서 새살이 차올라야 합니다. 성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신나고 의미 있다고 느끼면, 그동안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다른 재미들은 저절로 물러가게 마련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바치려는 이들은 늘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한다 하면서도 여전히 옛 삶의 인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높임을 받기 원하고, 늘 분쟁을 일으킵니다. 문제는 그런 이들이 자기들의 행위를 신앙적 행위로 치장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려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영적 분별력입니다. 참과 거짓, 빛과 어둠이 뒤섞인 세상에서 분별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늘 악의 노리갯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주중에 장로님 두 분과 일산 지역에 있는 교회 두 곳을 방문했습니다. 두 교회 모두 작지만 아주 소중한 일들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한 교회는 17년 동안 초록 가게를 운영하면서 지역 사회에 친환경적인 삶의 방식을 일깨우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 내외는 자기 아들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큰 어려움 속에 빠져 있던 아이를 위탁받아 세번째 아들로 양육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 교회 목사님은 오래 전부터 교회에 카페를 열어 외로운 지역 사람들의 말벗이 되어 주었고, 세월호 사건을 비롯한 아픔의 현장에 달려가 커피를 끓여 대접하기도 하고, 매주 월요일마다 안산에 가서 여전히 그날의 고통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유가족들에게 커피를 가르쳐주며 외로운 인생의 길벗이 되어 주고 있습니다. 또 교회 젊은이들이 자립생활을 할 수 있도록 공방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제 저녁이면 혼자 밥을 먹는 지역의 많은 젊은이들을 위해 밥을 지어주는 일도 시작할 생각이라고 합니다. 그 두 분의 목회자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을 따라 묵묵히 그 일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분들에게서 교회의 희망과 빛을 보았습니다. 소박하지만 끈질기게 타오르는 그 불이 우리 가슴에도 옮겨 붙기를 빕니다. 교회의 건강함은 교인수나 경상비의 크기로 가늠할 수 없습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뜻이 생동감있게 작동하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하시려는 일을 제대로 수행할 때 교회는 점점 든든하게 서 갈 것입니다. 찬 바람 속에서도 꽃눈을 뜨고 있는 나무들처럼 우리도 이 거친 세상에서 하늘나라를 가슴에 품은 사람으로 성장해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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