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통독

81일 통독--고전8-16장

천국생활 2016. 8. 21. 18:16

구속사적 성경통독 제 81 일

 


(고린도전서 8-16장)



<내용 요약>
고린도전서는 전체를 3개의 단원으로 묶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통독 범위는 고린도전서 8장에서 16장까지입니다.

A. 문안과 감사 (1:1-9)

B. 고린도 교회의 상황에 관하여…(1:10-16:9)
(1-4장) 나눔과 분리의 문제
(5-6장) 고린도 교회의 좋지 않은 소문에 관하여…<부정함-5장>, <교인들간의 고소건-6장>
(7장) 결혼에 관하여…
(8:1-11:1) 크리스천의 자유에 관하여…
(11:2-16) 여성의 의복에 관하여
(11:17-34) 주님의 성찬에 관하여
(12-14장) 성령의 은사들에 관하여
(15장) 복음에 관하여
(16:1-9) 헌금에 관하여

C. 결론과 권고, 그리고 축도(16:10-24)

<주요 통독 자료>
1. 자유에 관하여…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크리스천들의 자유함에 관하여 이야기 하는 데는 그 도시의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고린도는 우상숭배의 메카였습니다. 자연 많은 우상숭배의 신전들에 매일 바쳐지는 송아지는 엄청난 양이었으므로 신전에 식당이 함께 운영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신전 식당에는 당연히 우상에게 제사로 바쳐졌던 소고기들이 팔리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의 소위 아고라, 즉 시장에서 판매되는 고기들은 대부분이 신전에서 나오는 고기들이었습니다. 고린도의 믿음이 연약한 신자들은 이 신전에서 나오는 우상숭배에 사용된 고기를 먹는 일이 우상숭배에 참여하는 행위와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에게 자유함이 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몸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고, 몸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가 바울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시장의 어떤 고기집에서 불고기를 먹고 있다고 가정할 때, 그 고기가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인지 아니면 순수한 도살로 나온 고기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니까 바울은 자신의 양심의 자유를 위하여 그 고기가 어떤 고기인지 묻지 말고 먹으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일에 자유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논조는 자신에게는 그 자유함이 있지만, 만약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 바울 자신이 고기 집에서 고기를 먹는 것을 보면서 그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다는 것 때문에 시험에 들 수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바울은 자신에게 자유함이 있지마는 믿음이 연약한 지체를 위하여 자신은 평생 고기를 먹지 않는 쪽을 택해도 상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유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의 진정한 자유는 자기가 하고 싶고 또한 할 능력도 있는 일이라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참아낼 수 있는 자유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라는 것이죠. 바울은 그 자유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또한 바울은 자신의 몸을 쳐 복종케 하는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10장에서의 세례와 성찬에 관한 가르침을 잠시 뛰어넘어서 11장에서 자유에 대한 바울의 설명을 좀더 보겠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고정관념 속에 남자가 긴 머리를 가지는 것은 수치스런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게 왜 수치가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유대인들에게는 그런 사고방식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여성들이 긴 머리를 가지는 것은 자기 위에 자기를 다스리는 남편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영광입니다. 그러나 당시 고린도 여성들은 머리를 빡빡 미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것을 본받지 말라고 말한 것입니다. 대신 남성들이 긴 머리를 갖는 것은 자기 위에 자기를 다스리는 누군가가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그것을 수치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실인의 규례에서 나실인은 머리를 깎지 말아야 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해 집니다. 그것은 나실인은 그 머리 위에 그를 다스리는 하나님이 항상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 주님을 위하여 기꺼이 수치를 겪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2. 광야 교회의 세례와 성찬
10장에 들어가면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의 두 가지 경험에 대하여 흥미로운 설명을 덧붙입니다. 우선 바울은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사건을 세례에 비유합니다. 그들은 갈라진 홍해를 건넜으므로 그들의 양 옆은 다 물로 된 벽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위에는 구름기둥이 있었습니다. 구름은 다 물 아닙니까? 그러니 그들은 위에도 물이고 양 옆에도 물입니다. 물로 된 터널을 지나간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을 바울은 세례 예식의 상징으로 본 것입니다. 홍해를 건넌 뒤에는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먹었습니다. 그리고 반석에서 솟아난 생수를 마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이 하늘에서 내린 만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를 의미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반석에서 솟아난 생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예한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성찬의 상징으로 본 것입니다. 홍해에서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 성찬을 나눈 것입니다. 세례와 성찬, 이 두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가 지키도록 재정하신 성례입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중요한 것 한가지를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생수를 마신 그 반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셨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7:37-39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예수님의 이 말씀이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주석을 달아주었습니다. 세례나 성찬의 형식적인 행사들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바로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바로 구원의 길인 것입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만 받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세례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장막절 명절에 매일 어거지로 생수를 퍼다 반석에 붓던 유대인들로서는 진정한 생명의 물을 마시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목마르거든 이런 종교적 예식이 아니라, 내게로 곧바로 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생수의 강물을 마음껏 마실 수 있고, 우리의 전 인격으로부터 흘러 넘쳐서 많은 영혼들을 향하여 흘려보낼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하늘에서 내린 신령한 떡을 먹고도 죽었거니와 나를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에 참예한 바 된 자녀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 사고에 입각해서 교회의 성찬 예식의 규례를 제공해 줍니다.

3. 성령의 은사들
고린도 교회는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이 나타났던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그 은사들이 덕스럽게 사용되지 못하여 교회에 혼돈을 초래하고 있었습니다. 은사는 문자 그대로 “선물(Gift)”입니다. 선물은 받는 사람의 인격의 변화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선물은 오히려 주는 분의 성품과 능력을 고스란히 반영합니다. 성령의 은사 역시 주시는 분, 곧 성령님의 능력과 성품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은사를 받은 사람이 우월감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사들을 활용하는 가장 중요한 원칙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활용해서 자신의 유익을 채운다든지, 혹은 자신의 인기나 명성을 높이려 한다든지 하는 것은 다 가짜입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성령께로부터 온 은사들은 오직 예수님만 높이게 하고, 사람을 더욱 겸손하고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12장의 지체에 대한 바울의 비유는 정말 절묘합니다. 첫째 누구도 남은 다 필요 없고 자신만 최고라고 해서는 안되고, 또한 둘째 누구도 나는 보잘것없으니 당신들이 다 하라고 해서도 안됩니다. 또한 몸의 연약한 지체일수록 더욱 귀한 것을 입혀주며, 연약한 지체의 연약함을 다른 지체가 함께 감당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탁월한 은사가 있다 하더라도 그 은사로 사람을 세우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랑 안에서 사용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 13장의 가르침입니다. 14장에서 바울은 특별히 방언과 예언, 두 가지의 은사들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룹니다. 그것이 고린도 교회의 논쟁의 쟁점이었기 때문입니다. 방언은 하는 자신도 무슨 뜻인지를 모릅니다. 그러니 공적인 장소에서 군중들을 상대로 방언을 어지럽게 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말합니다. 방언은 통역의 은사가 있는 사람을 세워서 통역을 하게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은밀한 공간에서 혼자 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언은 모든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하는 것이므로 예언은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활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은사 활용의 원칙 위에 사랑이 더해져야 하며, 모든 은사는 순서대로 질서 있게 활용되어야 합니다.

4.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15장에서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권능에 대해서 변호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직접 만나주신 사람들의 리스트가 이어지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를 믿는 모든 이들의 부활을 확신케 했다는 선언이 이어집니다. 우리는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부활의 주님으로 인하여 사망을 이겼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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