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공의가 움돋는 땅

천국생활 2016. 1. 26. 22:06

공의가 움돋는 땅
사45:4-8
(2016/1/24)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부른 것은,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이스라엘을 도우려고 함이었다. 네가 비록 나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너에게 영예로운 이름을 준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주다.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다. 나 밖에 다른 신은 없다. 네가 비록 나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는 너에게 필요한 능력을 주겠다. 그렇게 해서, 해가 뜨는 곳에서나, 해가 지는 곳에서나, 나 밖에 다른 신이 없음을 사람들이 알게 하겠다. 나는 주다. 나 밖에는 다른 이가 없다. 나는 빛도 만들고 어둠도 창조하며, 평안도 주고 재앙도 일으킨다. 나 주가 이 모든 일을 한다." 너 하늘아, 위에서부터 의를 내리되, 비처럼 쏟아지게 하여라. 너 창공아, 의를 부어 내려라. 땅아, 너는 열려서, 구원이 싹나게 하고, 공의가 움돋게 하여라. "나 주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다."]

• 겨울의 꽃
며칠 추위가 혹독합니다. 다들 무탈하시니 다행입니다. 며칠 전 우리 사회는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었던 한 사람을 떠나보냈습니다. 성공회대학교의 석좌교수였던 신영복 선생님 말입니다. 아주 오래 전 그분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을 읽으며 감옥이 정신을 키우는 대학일 수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더랬습니다. 희귀 피부암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음식을 끊고 죽음을 맞이했다고 들었습니다. 추모하는 마음으로 그분의 책을 들척거리다가 계수씨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에 눈길이 머물렀습니다.

"소한, 대한 다 지났는데도 여전히 추운 겨울입니다. 서화반 작업장에 19공탄 난로 하나 피웠습니다. 나한테 묻는다면 겨울의 가장 아름다운 색깔은 불빛이라고 하겠습니다. 새까만 연탄구멍 저쪽의 아득한 곳에서부터 초롱초롱 눈을 뜨고 세차게 살아오르는 주홍의 불빛은 가히 겨울의 꽃이고 심동(深冬)의 평화입니다. 천 년도 더 묵은, 검은 침묵을 깨뜨리고 서슬 푸른 불꽃을 펄럭이며 뜨겁게 불타오르는 한겨울의 연탄불은, 추위에 곱은 손을 불러모으고, 주전자의 물을 끓이고, 젖은 양말을 말리고……, 그리고 이따금 겨울 창문을 열게 합니다."(신영복 옥중서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돌베개, 1998년 8월 15일, p.172)

겨울의 가장 아름다운 색깔이 불빛이라는 말 앞에서 한없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일본대사관 앞에 세워진 소녀상 철거를 막기 위해 거리에서 노숙을 하고 있는 젊은이들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천막이나 침낭 반입이 허락되지 않아 혹독한 추위 속에서 긴긴 겨울밤을 나는 이들, 사서 고생을 하고 있는 이들, 어쩌면 그들이 우리 시대의 불꽃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차게 살아오르는 주홍의 불빛을 겨울의 꽃이라 한 신영복 선생의 말이 참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점점 인정의 황무지로 변해가고 있지만, 이 땅에 자기 몸을 바쳐 온기를 심는 이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런 이들을 일러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하실 것입니다.

지난 주중에도 세상 도처에서 테러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자기들의 존재를 드러내거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생명을 훼손하는 이들은 그들이 내세우는 명분이 무엇이든 악마의 하수인들입니다. 제 자식을 죽이고 시신을 훼손한 비정한 부모가 있는가 하면 불면증에 시달리던 가장이 일가족을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도 일어났습니다. 마치 영혼이 없는 인간의 도래를 보고 있는 것 같아 소름이 돋습니다. 러시아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중인물인 이반은 무의미하고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합니다. 휴머니스트인 그는 고통받는 어린아이를 도울 수 있다면 천국 입장권을 기꺼이 반납하겠다고 말합니다. 이반은 무신론자를 자처하지만 그가 부정하는 신은 세상의 고통에 대해 모른 척 하는 무정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는 하나님은 무정한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사람 지으신 것을 후회하시기도 하고,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하시는 분이지만,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출34:6) 분이십니다. 우리가 늘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길이 우리의 길과 다르다는 것과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 생각보다 높다는 사실입니다(사55:8-9).

• 구원사의 도구
이스라엘 사람들이 포로생활을 통해 깨달은 것은 약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지가 확고하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구원행위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방 민족을 죄지은 백성에 대한 심판과 징계의 도구로 사용하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구원사의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십니다. 우리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들이 주전 538년 경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칙령에 의해 예루살렘으로 귀환했던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 느닷없이 찾아온 해방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고레스를 메시야적 인물로 칭송했습니다. 가끔은 그를 '주'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때 '주'는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대행한 주권자라는 뜻일 겁니다. 이사야 45장 1절에서 주님은 고레스를 기름 부어 세웠다고 말씀하십니다. 고레스는 이방 통치자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도구입니다. 열방과 열왕이 그의 발 앞에 굴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일어난 일이고, 하나님께서 그보다 앞서 가며 장애물들을 제거하시고, 또한 은밀한 곳에 숨겨진 보물들을 찾게 하신 까닭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곧 온 우주의 주권자임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부른 것은,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이스라엘을 도우려고 함이었다. 네가 비록 나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너에게 영예로운 이름을 준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사45:4)

이사야는 온 우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고레스를 지명하여 부른 것은 결국 하나님의 백성들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고레스가 그런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고레스의 입장에서는 이사야의 말이 얼토당토 않은 말로 들렸을 겁니다. 그러나 역사의 이면에서 전개되는 구원사에 눈을 뜬 사람인 예언자는 그 사건을 그렇게 보았습니다.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자기가 하는 일의 의미를 다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가 무심코 뱉은 말 한 마디가 누군가를 일으켜 세우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하지 않던가요? 우리의 의도와 상관없이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영향을 받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우리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조심스럽게 살아야 하고, 항상 다른 이들을 세심하게 배려하며 살아야 합니다. '내가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은 자신이 한갓 인간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이들입니다.

역사의 과정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예기치 않았던 사건이 세계의 역사를 뒤바꿔놓곤 합니다. 야심만만한 경세가였던 페르시아 왕 고레스는 식민통치를 원활히 하기 위해 포로민들의 귀환을 허용했습니다. 하지만 예언자는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벌어진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동일한 사건을 두고 해석이 엇갈리는 것입니다. 역사는 결국 해석의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 역사의 주관자
여기서 잠깐 우리가 돌아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고레스를 통한 해방 이야기를 통해 이사야가 하려는 말은 무엇일까요? 고레스의 위대함을 칭송하기 위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야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5절은 그 사실을 여실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나는 주다.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다. 나 밖에 다른 신은 없다. 네가 비록 나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는 너에게 필요한 능력을 주겠다."(45:5)

'나'라는 단어의 반복적 사용을 통해 이사야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력하게 천명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야심가, 경세가, 정복자인 고레스가 아니라, 억압과 착취와 천대에 시달리는 이들을 귀히 여기시고 그들을 위해 구원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이유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왜 무고한 이들이 고통을 당하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때로는 세상의 불의 앞에 침묵하시는 하나님께 불퉁거리기도 하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의심하기도 합니다. '왜?'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는 어렵지만,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압니다. 고통 받는 이들 곁에 다가서고,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그들이 손을 녹여주고, 터전이 흔들리는 세상에서 비틀거리는 이들의 설 땅이 되어주는 것이야말로 주님을 믿는 이들이 지향해야 할 바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참 다양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허점투성이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주관하고 계십니다. 노자의 '도덕경 73장'에는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疎而不失'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하늘 그물은 성기어서 다 빠져나갈 것 같지만 실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실失'이 '샌다'는 뜻의 '루漏'로 나오는 곳도 있습니다. 사람이 교묘하게 법망을 피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눈조차 속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 현실에 대해 무심한 듯 보이고, 그래서 악인들이 판을 치며 사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은 그 모든 일들을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필요한 능력을 주십니다. 눈 밝은 이들은 그러한 일들 속에서 세상의 주관자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나는 빛도 만들고 어둠도 창조하며, 평안도 주고 재앙도 일으킨다. 나 주가 이 모든 일을 한다."(45:7)

빛과 어둠, 평안과 고통이 갈마드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일들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일이 잘 되어 간다고 지나치게 의기양양할 것도 없고, 일이 잘 안 된다고 낙심할 것도 없습니다. 다만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의 때를 잘 분별하여 그 때에 맞는 삶을 선택할 일입니다. 인생길에서 만나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마음에 접속하기 위한 도구로 삼을 때 우리 삶은 풍요로워집니다. 삶이 답답할 때마다 저는 13세기의 아랍 시인인 잘랄루딘 루미의 시 <여인숙>을 떠올리곤 합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여인숙과 같아서
아침마다 새로운 손님이 도착한다.

기쁨, 우울, 야비함,
그리고 어떤 찰나의 깨달음이
예기치 않는 손님처럼 찾아온다.

그 모두를 환영하고 잘 대접하라.
설령 그들이 그대의 집 안을
가구 하나 남김없이 난폭하게 휩쓸어가 버리는
한 무리의 아픔일지라도.

그럴지라도 손님 한 분 한 분을 정성껏 모셔라.
그는 어떤 새로운 기쁨을 위해
그대의 내면을 깨끗이 비우는 중일지도 모르니.

어두운 생각, 부끄러움, 미움,
그 모두를 문 앞에서 웃음으로 맞아
안으로 모셔 들여라.

어떤 손님이 찾아오든 늘 감사하라.
그 모두는 그대를 인도하러
저 너머에서 보낸 분들이니."

날마다 우리를 찾아오는 다양한 인생의 계기들을 손님으로 맞아들이면 그들은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길 안내자가 될 것입니다. 이 마음으로 살면 인생에서 허비할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패나 쓰라림의 경험조차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안내자가 될 수 있으니 말입니다.

• 구원과 의의 새 세상
하지만 하나님의 역사 섭리를 믿는다는 것은 '모든 것이 다 잘 될 거야'라고 말하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 땅 위에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세상의 모습을 이사야는 '의'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궁창에게 의를 비처럼 쏟아지게 하라 명령하십니다. 땅에게는 구원과 공의를 움돋게 하라고 이르십니다. '구원'과 '공의'가 나란히 등장합니다. 이 둘은 둘인 동시에 하나입니다. '의' 혹은 '공의'야말로 하나님의 통치의 결과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는 나쁜 사람에게는 벌을 주고, 선한 사람에게는 보상해 주는 법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접속한 사람들이 따르는 마음의 원리입니다. 불쌍히 여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일으켜 세우려는 따뜻한 마음이야말로 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이러한 의는 가리워져 있습니다. 물론 그런 '의'의 세상을 열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겨울 공화국으로 만들려는 이들 또한 많습니다. 희망의 조짐보다 절망의 조짐이 더 많아 보입니다. 그 속에서 바장이다가 영혼을 야금야금 잠식당해 인간다운 삶의 길에서 멀어지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렇기에 지금이야말로 성도들의 믿음과 헌신이 요구되는 때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우리와 함께 공의가 움돋는 세상을 열어가길 원하십니다. 자꾸만 약자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주는 제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때 우리는 겨울에 가장 아름다운 색인 불빛이 될 수 있습니다. 손과 발이 시린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주전자의 물을 끓이고, 젖은 양말을 말려주는 난로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물론 좁은 길입니다. 하지만 그 길을 걷지 않고는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우리를 그 길로 인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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