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우리를 버리지 마소서

천국생활 2016. 2. 22. 10:42

우리를 버리지 마소서
렘 14:7-9


["주님, 비록 우리의 죄악이 우리를 고발하더라도, 주님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선처해 주십시오. 우리는 수없이 반역해서,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의 희망이십니다. 이스라엘이 환난을 당할 때에 구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땅에서 나그네처럼 행하시고, 하룻밤을 묵으러 들른 행인처럼 행하십니까? 어찌하여,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는 사람처럼 되시고, 구해줄 힘을 잃은 용사처럼 되셨습니까? 주님, 그래도 주님은 우리들 한가운데에 계시고,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백성이 아닙니까? 우리를 그냥 버려 두지 마십시오."]

• 위기 앞에서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우수 절기를 맞으면서 날이 거짓말처럼 풀렸습니다. 매화나무에는 이미 꽃봉우리가 예쁘게 맺혔습니다. 이제부터는 화단을 무심히 지나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대지를 뚫고 돋아나는 작은 싹들을 만나는 것은 마치 하늘의 소식을 듣는 것처럼 설레는 일입니다. 꽃샘추위가 남아있다고는 해도 오는 봄을 막을 장사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마음이 저절로 흥겨워집니다. 그러나 세상 일에 눈길을 돌리는 순간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이 민족의 봄은 여전히 멀기만 합니다. 오히려 냉랭한 겨울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남과 북 사이를 잇는 소통의 다리들이 하나 둘 끊어지더니, 개성공단의 폐쇄와 더불어 우리는 새로운 위기 속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면서 이 땅은 정말 위험한 곳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첨단 무기들이 한반도에 집결되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성경을 열어 하나님의 뜻을 여쭙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국들의 팽창정책으로 고대 근동세계가 전란에 휩쓸리고 있을 때 예언자들은 어처구니없는 꿈을 꾸었습니다. 주전 8세기의 예언자인 미가는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않을 것"(미4:3)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사람들마다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고 사는 세상의 꿈, 그것은 인류의 오랜 꿈인 동시에 하나님의 꿈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꿈은 호전적인 이들로 인해 산산조각나곤 합니다. 가끔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왜 악인들이 제멋대로 선한 사람들의 꿈을 짓밟도록 허용하시냐고 항변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늘 너무 굼뜨신 것 같습니다. 그 옛날 애굽의 병거와 기병들을 바다 속에 수장시켰던 것처럼 악한 일을 도모하는 이들을 모개로 다 없애주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의 방법과 다른 것 같습니다. "

예수님도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곡식 사이에서 자라고 있는 가라지를 뽑아낼까요?' 하고 묻는 종들에게 주인은 내버려두라고 말합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선과 악은 그렇게 선명하게 구별되지 않습니다. 뿌리가 얽혀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할리우드 영화는 마피아와 경찰의 불의한 커넥션을 다룰 때가 많습니다. 정말 그런가 싶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없을 수 없습니다. 선의 얼굴을 한 자가 악의 화신인 경우도 많고, 악마인 줄 알았던 사람이 자기 나름의 아픔을 가진 사람인 경우도 많습니다. 그렇기에 믿는 이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분별력과 어떤 경우에도 선을 택하려는 굳은 결의입니다.

• 어둠을 직시하다
세상이 왜 이 지경인가요? 빛의 자녀들보다 어둠의 자녀들이 지혜롭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더 부지런하고 끈질기고 교묘합니다. 욥기에서 주님은 사탄에게 "어디를 갔다가 오는 길이냐?" 하고 물으십니다. 사탄은 "땅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오는 길입니다"(욥1:7) 하고 대답합니다. 슬쩍 지나가는 말인 것 같지만 이 대목이 참 중요합니다. 사탄은 땅의 구석구석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선한 이들은 늘 그들의 밥이 되곤 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시면서 "보아라, 내가 너희를 내보내는 것이, 마치 양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해져라"(마10:16)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리가 사는 세상에서 양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슬기로워야 합니다. 악한 자들의 감언이설이나 위협에 속아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악에 물들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눈물의 예언자인 예레미야는 자기 시대의 어둠을 직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탄식을 듣습니다.

"나의 백성은 참으로 어리석구나. 그들은 나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모두 어리석은 자식들이요, 전혀 깨달을 줄 모르는 자식들이다. 악한 일을 하는 데에는 슬기로우면서도, 좋은 일을 할 줄 모른다."(렘4:22)

예레미야는 악한 일에는 비상한 재능을 보이지만 선을 행하는 일에는 미숙한 사람이 많은 세태를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는 흉악한 사람들이 득세하는 세상 풍경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조롱에 새를 가득히 잡아넣듯이, 그들은 남을 속여서 빼앗은 재물로 자기들의 집을 가득 채워 놓았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세도를 부리고, 벼락부자가 되었다. 그들은 피둥피둥 살이 찌고, 살에서 윤기가 돈다. 악한 짓은 어느 것 하나 못하는 것이 없고, 자기들의 잇속만 채운다. 고아의 억울한 사정을 올바르게 재판하지도 않고,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지켜 주는 공정한 판결도 하지 않는다."(렘5:27-28)

불의한 세상의 모습은 어느 시대에나 거의 유사합니다. 자기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들을 수단으로 삼거나, 그들의 고통스러운 처지를 철저히 외면합니다. 작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벨라루스의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구 소련이 무너진 후 자본주의에 편입된 러시아 사회를 가리켜 이렇게 말합니다. "예전에는 모두가 단순하게 살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요? 인간이 위로 변했어요, 동물들의 위장으로요. 이것도 원해! 저것도 원해!"(<세컨드핸드 타임>, 김하은 옮김, 이야기가 있는집, 2016년 1월 20일, p.362) 위장으로 변한 사람이라는 상징이 섬뜩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멸망하는 자의 특색으로 지적한 '배를 하나님으로 삼는다'(빌3:19)는 말의 변형인 셈입니다.

우리는 '고통' 혹은 '슬픔'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애굽의 전제정치 하에서 신음하는 노예들의 신음소리를 듣고 그 불의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역사에 개입하신 분이십니다.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스스로 일어서기 어려운 사람들의 버팀목이 되기로 작정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이 아닌 다른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많습니다. 신앙을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이들 말입니다. 종교인의 책무는 그런 불의한 현실을 불의로 드러내고, 위선을 위선으로 드러내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을 가르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종교인들은 권력의 편에 확고히 가담합니다.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배일 뿐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정의와 공평이 사라지고 인애와 자비가 스러질 때 하나님은 분노하십니다. 예언자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분노에 예민한 사람들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무서운 음성을 듣습니다.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나의 무서운 분노가 바로 이 땅으로 쏟아져서, 사람과 짐승과 들의 나무와 땅의 열매 위로 쏟아져서, 꺼지지 않고 탈 것이다."(렘7:20)
"내 백성의 혀는 독이 묻은 화살이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거짓말뿐이다. 입으로는 서로 평화를 이야기하지만, 마음 속에서는 서로 해칠 생각을 품고 있다. 이러한 자들을 내가 벌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나 주의 말이다. 이러한 백성에게 내가 보복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렘9:8-9)

• 우정의 세상을 열기 위해
하나님은 인간을 공동체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를 돕는 사람, 곧 그에게 알맞은 짝을 만들어 주겠다"(창2:18) 하시며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인간의 인간됨은 누군가의 벗이 되는 데 있습니다. 벗이 된다는 것은 상대방의 필요에 응답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벗은 기쁨의 순간 뿐 아니라 고통의 때에도 함께 있어 주는 사람입니다. 시인 정현종 선생은 <비스듬히>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생명은 그래요/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우리 또한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지요/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내가 누군가를 기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이들 또한 우리를 비스듬히 기댄 채 살아갑니다. 기대는 게 맑아야 우리 또한 맑아집니다. 우리가 맑아야 우리를 기대는 이들이 맑아집니다. 우리가 함부로 살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섬세한 마음 씀이야말로 우정의 전제조건입니다. 그러나 과도한 욕심은 모든 우정을 조각냅니다. 입으로는 평화를 말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서로 해칠 생각을 품습니다. 우리 혀는 독이 묻은 화살입니다. 이것은 벗에 대한 배신인 동시에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반역입니다. 우리가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를 버리실 것입니다. "나는 내 집을 버렸다. 내 소유로 택한 내 백성을 포기하였다. 내가 진정으로 사랑한 백성을 바로 그들의 원수에게 넘겨 주었다"(렘12:7).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두렵게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이게 우리를 영적인 위기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하나님을 등지고 우상들에게로 달려가기에 바빴던 이스라엘에 내린 재앙 이야기와 연결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경청하지 않고 제 고집대로 살던 백성들, 죄악에 익숙해져서 선을 행할 줄 모르는 백성들에게 경고의 의미로 극심한 가뭄을 내리셨습니다. 백성들은 기력을 잃은 채 땅바닥에 쓰러져 탄식하고, 땅은 거북이 등처럼 갈라지고, 땅에서는 풀조차 돋아나지 않았습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자기들이 한갖 유한한 인간임을 자각했습니다. 못할 일이 없는 것처럼 도도하게 살아왔지만, 하나님이 잠시 은총을 거두시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자들임을 절감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주님, 비록 우리의 죄악이 우리를 고발하더라도, 주님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선처해 주십시오. 우리는 수없이 반역해서,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렘14:7)

절실한 기도입니다. 하지만 이 기도가 진실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삶이 먼저 갱신되어야 합니다. 이웃에게 무정했던 죄를 참회해야 합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로 상징되는 사회적 약자들의 살 권리를 마구 짓밟았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채 함부로 말했던 죄를 눈물로 씻어야 합니다. 남의 골수를 마르게 했던 죄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기도에 다시 귀를 기울여 보겠습니다.

• 십자가를 든든히 붙잡고
"주님은 이스라엘의 희망이십니다. 이스라엘이 환난을 당할 때에 구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땅에서 나그네처럼 행하시고, 하룻밤을 묵으러 들른 행인처럼 행하십니까? 어찌하여,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는 사람처럼 되시고, 구해 줄 힘을 잃은 용사처럼 되셨습니까?“(렘14:8-9a)

고통은 사람을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습니다. 고통과 슬픔이 없다면 인간은 자만심에 빠져 익사하고 말 겁니다. 버티기 힘든 고통을 겪고 보니 백성들은 비로소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는 살 수 없는 자기의 한계를 직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민족사의 어려운 고비마다 지키시고 건져주신 은혜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마치 나그네처럼, 하룻밤 묵으러 들른 행인처럼 행하시는 것 같습니다. 구해 줄 힘을 잃은 용사처럼 보입니다. 절망입니다. 하나님은 이전처럼 강한 팔과 어깨로 그들을 구해주실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 그래도 주님은 우리들 한 가운데에 계시고,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백성이 아닙니까? 우리를 그냥 버려 두지 마십시오."(렘14:9b)

"우리를 그냥 버려 두지 마십시오." 절박한 탄원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절감한 이들의 기도입니다. 삶이 아무리 곤고하다 해도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들 가운데 계시다는 확신이야말로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힘입니다. 우리에게는 미쁨이 없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우리 사랑은 변덕스럽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한결같으십니다. 그 사랑을 덧입기 위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이 머무실 공간을 마련하는 일입니다. 우리들의 마음 속에, 우리들이 맺는 관계 속에, 우리들이 섞여 살고 있는 사회 속에 하나님의 자리를 마련해 드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소외시킨 죄를 참회하고, 하나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이웃을 보면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보입니다. 불화와 분쟁을 만드는 호전적인 말들을 그쳐야 합니다. 누군가를 없앰으로 평화를 만들 수 있다는 망상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고백합니다. 십자가는 너를 위해 나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용기를 내 십자가를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자연의 봄은 우리가 노력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다가오지만 역사의 봄은 노력하지 않는 한 오지 않습니다. 지난 2월 16일은 시인 윤동주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진 날입니다. 그의 시 <눈 감고 간다>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밤이 어두웠는데
눈 감고 가거라.

가진 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

발뿌리에 돌이 채이거든
감았던 눈을 와짝 떠라."(1941년 5월 31일)

사순절 순례 길을 걷는 동안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생명과 평화의 씨를 뿌리며 사십시오.

발뿌리에 돌이 채이거든 그때는 눈을 와짝 뜨고 걸어가십시오.

그 길 위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주님과 만나는 기쁨을 누리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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