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하나님을 안다는 것

천국생활 2015. 12. 9. 12:42

하나님을 안다는 것
요일2:1-6
 

[나의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쓰는 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누가 죄를 짓더라도, 아버지 앞에서 변호해 주시는 분이 우리에게 계시는데,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시니, 우리 죄만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참으로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요, 그 사람 속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속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참으로 완성됩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압니다.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과 같이 마땅히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 하나님과의 사귐
오늘은 차마 평화의 인사를 건넬 수가 없습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벌어진 폭탄 테러는 전 세계를 경악시켰습니다. 127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고, 다수의 사람들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불특정 다수를 향한 증오 범죄는 테러리스트들이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 했든 악마적입니다. 극단적 이슬람주의자들의 소행으로 보인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만 종교적 신념이 생명을 파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거짓 종교라 해야 할 것입니다. 전쟁을 획책하고 사람들 속에 미움과 증오를 심어주는 종교는 참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도든 힌두교도든 불교도든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점점 위험한 곳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그들을 그런 극단적인 상황으로 이끌어간 현실도 면밀히 살펴야 합니다. 어제 오후의 서울 광장과 광화문 광장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분열되어 있는지를 확연하게 보여주는 현장이었습니다. 경찰은 차벽으로 시위대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막고 시위대는 차벽을 돌파하기 위해 싸우다가 참혹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경찰의 물대포에 맞은 한 노인이 바닥에 쓰러졌고, 그들을 구하러 다가간 이들에게까지 물대포가 사정없이 쏟아졌습니다. 그 노인은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공권력은 질서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광장에 나온 시민들을 마치 적을 대하듯 대했습니다. 그 슬픈 광경을 보면서 "너희는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리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거리에는 울부짖는 소리가 전혀 없을 것"(시144:14)이라던 히브리 시인의 노래도 떠올랐습니다. 이런 날이 오기는 올까요?

사랑하고 보듬고 기뻐하며 살기에도 부족한 시간인데 우리는 갈등과 분열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요? 네 편 내 편을 가르고 내 편이 아닌 사람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을 때 세상은 전장으로 바뀌고 맙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 파란 하늘에 먹구름이 끼듯 우리 마음이 어두워지고 하나님의 형상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혼돈의 시대일수록 자꾸만 자기를 돌아보고 삶의 중심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께서 앞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꾸준히 걸어갈 수 있습니다.

시인 이성복 선생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시 쓰는 건 자기 정화淨化예요./화장실에 볼일 보러 가듯이,/밥 먹은 다음 양치질하듯이/하루도 거르지 않고 할 일이에요./우리는 그러지 않으면/금세 지저분해지는 존재예요."(이성복, <불화하는 말들>,문학과지성사, 2015년 9월 9일, p.25) 시인들이 그러하다면 성도聖徒 또한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우리를 조율하고, 하나님의 형상에 때가 끼지 않도록 날마다 닦아내고, 죄의 유혹에 속절없이 끌려가지 않도록 경계하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죄의 습성에 물들게 됩니다.

요한1서 1장에서 요한은 성도의 삶을 하나님과의 사귐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사귀기 위해서는 자꾸 만나야 하고, 상대방의 말을 경청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사귀는 사람은 어둠 속에서 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둠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과 사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고 협잡挾雜입니다. 빛을 향해 걷다가도 자꾸 어둠에 이끌리기도 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버릇입니다. 문제는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잘못을 자꾸 반복하다 보면 처음에 그렇게도 예리하게 느껴졌던 아픔도 가책도 무뎌집니다. 잘못를 잘못으로 인식하지도 못합니다. '다 그렇게 사는 것 아냐?' 하면서 자기 합리화를 시도합니다. 이게 바로 타락의 전조입니다. 요한은 그것을 잘 알기에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자꾸 자백하라고 말합니다(1:9).

• 오만한 우리를 전복하라
'죄'라는 단어가 점점 불편하게 여겨지고 왠지 고리타분한 교리의 언어처럼 생각되는 순간 우리 영혼의 전락이 시작됩니다. 성경에서 죄는 '과녁에서 벗어난 삶'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궁수이고 우리는 화살입니다. 과녁을 향해 날아가던 화살이 혼자 생각합니다. '내가 꼭 이리로 날아갈 이유가 없잖아. 내게는 자유의지가 있는데.' 그리고는 다른 곳으로 내처 가버립니다. 이게 바로 죄입니다. 우리가 적중해야 하는 그 과녁의 이름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늘 하나님과의 접속을 유지한 채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은 자꾸만 만나고 싶어합니다. 사랑은 끌어당기는 힘이고 죄는 밀어내는 힘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과녁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어쩌면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줄 때 비로소 참 사람이 되는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이성복 시인은 인류 역사에서 귀한 분들은 모두 자신을 하인이라 생각하며 살았다면서, "하인下人이란/'아랫사람'이라는 뜻도 있지만,/'다른 사람보다 아래 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참 의미심장합니다. "'거룩하다'는 것은/다른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거예요./그러려면 스스로 낮은 자리에 서야 해요"(앞의 책, p.18-19) 시인은 이런 말을 한 후에 글쓰기를 한마디로 요약합니다. "글쓰기는 오만한 우리를 전복시키는 거예요." 글쓰기가 이러할진대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더 그러해야 하지 않을까요?

죄를 짓지 않으려고 늘 깨어 노력해야 하지만 시간 속을 바장이는 인간은 죄를 온전히 피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낙심할 건 없습니다. "죄를 짓더라도, 아버지 앞에서 변호해주시는 분이 우리에게 계시는데,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1b). 죄를 지을까 무서워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건 바보짓입니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죄를 반복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처벌이 두려워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태만죄에 해당한다 하겠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인생을 항해에 빗대어 말하곤 했습니다. 풍랑을 만날까 무서워 출항하지 않는다면 안전하기는 하겠지만 아무 데도 이를 수 없습니다. 인생은 실수의 연속입니다. 문제는 지향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북쪽을 가리키는 나침반처럼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면 됩니다. 가끔 길을 잃는다 해도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주실 것입니다.

요한은 주님이 우리 죄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화목 제물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온 세상의 아픔과 슬픔 그리고 죄를 당신과 무관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한사코 그런 것들로부터 멀어지려 하지만 주님은 그것을 당신의 온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여 정화시키려 하셨습니다. 주님과 무관한 아픔은 없습니다. 주님과 무관한 인간의 죄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합니다. 우리는 가르고 나누고 배제하는 일에 익숙하지만, 주님은 하나로 만들고 품어 안으심으로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이끄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낮은 곳으로 전락한다 해도 주님의 사랑 밖으로 추락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 해 전 세상을 떠난 헨리 나우웬 신부는 인생의 말년에 공중그네를 타는 곡예사 가족과 사귀면서 공중그네 타기를 시도했습니다. 여러 차례 훈련을 받으면서 그는 공중그네타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손을 잡아줄 사람에 대한 신뢰임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잡는 사람을 '캣쳐catcher'라고 하지요. 그는 그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위대한 캣쳐 great Catcher'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을 신뢰할 때 삶이 자유로워집니다.

•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
요한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진정한 앎은 머리에서 일어나는 지각 작용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존재 전체의 자각이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내가 길을 가거나 누워 있거나, 주님께서는 다 살피고 계시니, 내 모든 행실을 다 알고 계십니다"(시139:3)라고 노래했습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단어는 대개 '사랑하다'라는 단어로 바꿔놓아도 무방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다 아십니다. 아시기에 비틀거리는 우리를 격려하고 힘을 북돋고, 때로는 꾸짖기도 하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영성이 깊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알아차리는 것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파하실 때 우리도 아파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진심으로 기뻐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안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이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싶어합니다. 요한은 그것을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요약하고 있습니다. 요한공동체에게 하나님의 계명은 명확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김남조 시인의 <그대 있음에>라는 시를 들어보셨는지요? 김순애 선생님이 이 시에 곡을 붙이고 여러 가객들이 불러 유명해진 시입니다. 저는 바리톤 연광철 선생의 목소리로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거룩한 느낌을 받곤 합니다.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
나를 불러 손잡게 하라
큰 기쁨과 조용한 갈망이
그대 있음에
내 마음에 자라거늘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손잡게 해
그대의 사랑 문을 열 때
내가 있어 그 빛에 살게 해
사는 것의 외롭고 고단함
그대 있음에
삶의 뜻을 배우니
오, 그리움이여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
나를 불러 그 빛에 살게 해"(김남조, <그대 있음에> 전문)

내가 있어 네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시인은 그대가 있어 내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신비입니다. 철학자 김용규 선생은 '너' 혹은 '그대'라는 2인칭은 우리에게 응답할 수 있는 상대로 간주하는 것에만 사용되는 단어라고 말합니다. '그' 혹은 '그것'은 나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에게 '그것'으로 간주해도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대의 근심 있는 곳에/나를 불러 손잡게 하라". 이 마음이 있는 곳이 천국이고 이 마음이 사라진 곳이 지옥일 겁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을 '그' 혹은 '그것'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삶에 연루될 까닭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강도 만난 이에게 다가가 그의 몸에 손을 대고 그를 돕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강도 만난 사람은 '그대'가 되었습니다. 사랑은 이렇게 발생합니다. 사랑하는 이들이 만나면 포옹을 합니다. 김용규 선생은 "抱擁은 내가 타인을 안는 행위이자 내가 타인에게 안기는 행위"(김용규, <철학 카페에서 시 읽기>, 웅진지식하우스, 2011년 11월 14일, p.121)라고 말합니다. 능동성과 수동성이 함께 있습니다. 사랑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런 사랑에 무기력한 자가 되지 않으려 노력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게 되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됩니다.

•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한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추상적으로 말하지 않고 아주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 같이 사는 것이 그것입니다. 문제는 삶입니다. 예수님이 걸으셨던 길은 좁은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세상적 지혜를 구하는 이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은 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주님이라 고백하면서도 그분이 걸으셨던 길은 걸으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를 숭배할 뿐입니다. 숭배하는 것이 따르는 것보다 쉽습니다. 예배에 빠지지 않고, 아침마다 큐티를 하고, 말 끝마다 주님의 영광을 말하면서도 사는 것이 세속의 열정에 끌려 사는 이들과 다를 바 없는 이들이 많습니다.

얼마 전에 나온 뉴스를 보고 놀랐습니다. 장 데세티(Jean Decety) 박사 연구팀은 14개국 1,170명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해서 종교가 그들의 가치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연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비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자란 아이들이 타인에 대해 더 관대했고 이타적인 생각을 갖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조사가 얼마나 신빙성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연구결과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오늘의 종교가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더 관대하고 따뜻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지 못한다면, 남을 더욱 배려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지 못한다면 그 믿음은 작동하지 않는 믿음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이런 일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외적인 종교 행위에는 열심을 내면서도 정작 하나님이 관심하시는 바는 외면하는 이들의 위선을 신랄하게 꾸짖었습니다. 예수님도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신앙적 위선을 통렬하게 꾸짖으셨습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했지만, 이것들도 마땅히 행해야 했다."(마23:23)

본과 말을 뒤집은 신앙생활은 일쑤 사람들을 위선으로 이끕니다. 다시 한번 말합니다. 하나님 안에 머무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고통받는 이들에게 다가서셨고,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당신의 몸으로 짊어지셨고, 그들 속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으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했다." 병자들을 치유하면서 하신 이 말씀이 참 신비합니다. '내가 고쳐줬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너의 절실함이, 너의 큰 신뢰가, 너의 사랑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주님처럼 살기 어렵습니다. 하루하루 근근히 버티기도 벅찰 지경입니다. 현실은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려는 우리의 발목을 잡습니다. '내 코가 석 자'라는 말이 자꾸 튀어나옵니다. 그렇다고 하여 예수라는 푯대를 향한 여정을 지레 포기하지는 마십시오.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어렵다고 하여 불가능성 속에 닻을 내린 채 살면 안 됩니다. 돛을 올리고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중심에 당도하기 위해 노를 저어야 합니다.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해보려고 애쓰십시오. 다른 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또 답답한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십시오. 그리고 여력이 되거든 고통받는 이들을 찾아가십시오. 바로 그들 속에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가장 진기한 보물을 숨겨두셨습니다. 사랑의 능력이 회복될 때 우리 삶은 가벼워지고, 세상의 염려와 근심에 붙들렸던 마음에 자유가 깃들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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