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의 유산
본문: 요 14:12
I. 들어가는 말
오는 10월 31일은 종교개혁일입니다. 34세의 젊은 독일 사제 마틴 루터가 1517년 독일의 비텐베르크 대학 게시판에 로마 가톨릭교회의 개혁을 위한 95개 조항을 게시하여 개혁을 시작한 바로 그 날입니다. 저는 오늘 이러한 루터의 종교개혁일을 앞두고, 종교개혁이 우리이게 남긴 중요한 유산을 잠시 같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II. 루터 종교개혁의 근원적인 문제제기: 구원의 문제
원래 루터의 종교개혁은 다방면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물론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화근이 되었던 것은, 죄를 면해준다는 증서를 돈 주고 사면, 그 즉시 죄가 면해진다던 면죄부 판매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이 이외에도 7개의 성례전을 세례와 성만찬의 두 가지로 간소화하는 문제, 사제의 결혼문제, 교회 안에 세운 각종 성상들을 제거하는 문제, 독일의 헌금이 이탈리아의 바티칸 교황청으로 흘러들어가는 문제 등 다양한 문제들을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아마도 구원의 문제일 것입니다. 오늘 제가 루터의 종교개혁과 관련하여 관심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마지막 문제, 즉 기독교인은 무엇을 통해 구원을 얻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III. 왜 새삼스럽게 구원의 문제를?
기독교인은 무엇을 통해 구원을 얻는가? 루터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기독교인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우리도 잘 압니다. 그런데 이처럼 이미 대답이 나와 있는 질문을 왜 또다시 물으려고 하는가? 그것은 루터의 대답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루터와 똑같은 대답을 하고 있는 우리들, 즉 오늘날 한국 개신교인들의 신앙행태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러한 우리들 신앙행태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을 “신앙의 율법화”라고 규정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제가 이렇게 규정하는 이유와 그 해결을 모색하기 위해 루터의 구원관을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IV. 율법에 의한 구원이란?
루터가/ 기독교인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바울의 가르침을 재천명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당시의 가톨릭이 행함에 근거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양 행동했던 그들의 신앙행태 때문이었습니다. 행함에 의한 구원이란, 여러분들이 이미 알고 계시는 대로, 우리들의 도덕적인 올바른 행위가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여기시는 근거가 되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일컫습니다. 당시 가톨릭은 교회법을 통해 기독교인이 마땅히 행해야 할 도덕적인 규율들을 세밀하게 규정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규율들을 잘 지키는 사람은 구원받은 가톨릭 교인, 그렇지 못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가톨릭 교인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톨릭이 정해놓은 도덕적인 규율들을 잘 지키는 사람이 정말로 그 마음 속에 예수를 믿는,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가톨릭이 정해놓은 도덕적 조항을 잘 지키는 사람은 좋은 가톨릭 교인이긴 했지만, 좋은 가톨릭 교인이 반드시 좋은 신앙인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교황의 관점에서는 전혀 흠잡을 데 없는 가톨릭 교인이, 하나님 앞에서는 흠 있는 사람일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좀 더 충분한 이해를 위해 우리 주변으로 잠시 눈을 돌려 보겠습니다. 아내에 대한 도덕적인 의무를 잘 이행하는 사람은 좋은 남편입니다. 그러한 남편을 둔 아내는 그렇지 못한 아내보다 확실히 행복합니다. 그러나 아내에 대한 도덕적인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과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별개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내에 대한 도덕적인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그러한 남편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한다고 남편을 의심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아내의 경우에도 똑같이 해당하는 문제입니다.
부모 자식간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에 대한 도덕적인 의무를 잘 이행하는 부모는 역시 좋은 부모입니다. 그러한 부모를 둔 자식은 그렇지 못한 다른 자식들에 비해 보다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부간의 관계가 그러하듯, 자식에 대한 도덕적인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과 자식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별개일 수 있습니다. 자식에 대한 도덕적인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자식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그러한 부모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가 다소 껄끄러운 감은 있지만, 실제로 우리는 가끔 이러한 반문을 하게 됩니다. 아내나 남편이 내게 잘 대해 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우리에겐 종종 있다는 말입니다. 또 어렸을 때의 기억으로 되돌아가 보면, 우리의 부모가 우리에게 아주 잘 해 줌에도 불구하고, 부모에게서 어떤 애틋한 사랑을 느끼지 못했던 때도 종종 있었습니다. 우리 주변엔 이런 경우가 없기를 바라지만, 이러한 현실이 존재하는 것을 우리는 숨길 수가 없습니다.
루터가 직시한 것은 바로 이 문제였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인들은 기독교인이 마땅히 해야 할 도덕적인 의무는 아주 훌륭히 잘 이행했지만, 루터가 보았을 때 이들의 마음 속에는 진심으로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루터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주장을 폈던 것입니다.
V. 구원은 믿음으로만: Sola fidei
그러면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루터의 주장에 함축된 진의는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는 이 문제도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루터 주장의 첫번째 함의는, 구원을 위해서는 믿음 이외의 다른 어떤 무엇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믿음”이라는 단어 뒤에 “만”이라는 한 자를 추가 했습니다. 라틴어로는 “sola fidei"라고 합니다. ”Sola“라는 말은 “오직”이라는 뜻이고, “fidei"라는 말은 “믿음”이라는 뜻이니, 합하면 “오직 믿음으로만”이라는 뜻입니다. 뜻은 그러한 데, 문제는 루터가 말하는 “믿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믿음”에 대한 루터의 설명 중에 제 마음에 가장 깊이 와 닿았던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한 단순한 신뢰 하나로 칠흙같은 어둠 속으로 발을 내어딛는 것이다.” 이 설명 중에 나왔듯이, 루터의 믿음은 신뢰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가 갔던 길, 즉 하나님만을 믿고 그 분의 뜻을 따라 올곧게 살아갔던 예수의 길이 참 인생의 길이라는 것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아무 계산하지 않고 예수와 같은 길 가는 것을 의미했던 것입니다. 우리 담임목사님이신 김기석 목사님이 번역하신 『예수 새로 보기』라는 책에서 미국의 신약성서학자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는 예수의 제자됨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한 교사의 생도가 된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뒤를 따른다’는 뜻이다. 예수는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나를 따르라’고 했다. 예수를 따르는 자가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예수가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자신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그처럼 된다는 말이다.”
마커스 보그에 따르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고,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예수가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자신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을 말합니다. 무슨 말이겠습니까? 예수께서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그 뜻을 따라서 사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께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 하나에 의지하여, 마치 어둠 속에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미래에로 한 발을 내어놓듯,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루터가 말했듯이, 우리도 “또 하나의 그리스도” a Christ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루터는 바로 이러한 철저하고도 전적인 믿음과 신뢰만이 하나님이 우리를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역설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루터가 이러한 믿음과 신뢰를 강조한다고 하여, 도덕적인 행동을 무시하거나 불필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님을 우리는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루터가 “오직 믿음으로만”이라고 했을 때, 이 말은, 다른 한편, 행함은 믿음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었습니다. 흔히는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루터의 주장이, 한 개인의 삶에 있어 도덕의 부재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구실을 한다고 비판합니다. 문법적으로 보면 그럴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만”이라고 했으니, 논리상 도덕적 행동은 기독교인에게 불필요한 것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비도덕적인 행동을 루터나 바울의 말씀에 근거하여 정당화하거나 합리화하려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루터는 그러한 생각에 동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루터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 믿음으로부터 그에 걸맞는 행동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고 했습니다. 공자의 말씀에 “不期然而然者”라 하는 말이 있습니다. “꼭 그렇게 행동하기를 기대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행동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루터의 생각과 아주 흡사합니다. 그래서 루터는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맺는다”(마 7:18)는 성서의 말씀을 즐겨 인용합니다.
흔히는 행함을 강조하는 가톨릭에 비해, 믿음을 강조하는 개신교인들이 보다 비도덕적이라고 말합니다. 적어도 현상적으로는 그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문민정부 초기에 사정대상에 오른 기독교인의 통계를 보면 그러합니다. 전체 사정대상 중 60%가 거의 개신교인이라고 하니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여기에는 개신교인의 책임이 큽니다. 그러나 그것은 개신교의 본래 가르침이 그러한 것도 아니고, 바울이나 예수의 가르침이 그러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문자화된 규율을 따르는 사람은 그 도덕적 행동이 규율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그 규율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을 믿고 그 뜻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규율을 따르는 사람의 도덕적 행동보다 훨씬 더 깊고 넓고 높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유교의 효경을 읽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은 그 효도가 효경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부모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부터 효도하는 사람은 효경이 지시하는 효도보다 훨씬 더 큰 효도를 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안 그렇겠습니까?
VI. 한국 기독교인의 신앙행태: 신앙의 율법화
저는 초두에 오늘날 한국 개신교인의 신앙행태의 문제는 “신앙의 율법화”에 있다는 지적을 했습니다. 신앙이면 신앙이고 율법이면 율법이지, 신앙의 율법화는 또 무슨 말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오늘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개신교인들의 신앙행태가 과거에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가톨릭의 신앙행태와 크게 다를 바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과거 가톨릭은 도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했다면, 오늘날 개신교인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행위 하나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손쉬운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를 믿는다고 입으로 고백하기만 하면, 그것으로써 구원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다 갖춰지기나 한 듯이 생각하는 그러한 개신교인들이 의외로 많아졌다는 말입니다.
1930년대에 독일에서 활동했던 본회퍼라는 신학자는 이러한 신앙행태를 가리켜 “값싼 은혜”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나는 이제부터 예수를 믿습니다”라는 말 한마디로써 구원이 가능하다면, 이 세상에 그것처럼 싸구려 구원이 어디 있겠습니까? 만약 이러한 식으로 전도를 한다면, 그것은 은혜의 덤핑 판매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본회퍼는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 반드시 함축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예수의 삶을 우리도 본받아서, 우리도 지금 여기에서 예수처럼 그렇게 산다는 것을 함축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의 구체적인 현장 속에서 예수께서 사신 것처럼 그렇게 살다가, 불행히도 이 세상에서 예수처럼 어려움을 겪게 된다 하더라도, 그 불이익까지도 기꺼이 감수하는 것을 함축합니다. 예수께서는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다가 죽임을 당하는 고난까지 받으셨는데, 기독교인들은 두 치도 안 되는 입을 가지고 예수를 믿는다는 말 한마디로써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러한 사람은 예수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이고,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 지도 모르는 사람이고, 따라서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이라 불릴 자격이 없을 것입니다.
VII. 나가는 말
지금 우리는 매우 힘든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소위 세상적인 삶의 방식대로 충실히 살아간다 해도, 살아남기가 힘든 때에 처해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예수를 믿는다는 것,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주민등록 신고하듯, 나 예수 믿는다고 신고만 하면 저절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라면 모르겠거니와, 기독교인이 된다고 하는 것이 예수의 삶을 오늘의 우리 현실 속에서 재현하는 것이라고 할 때, 우리들의 부담은 여간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과연 이 어려운 시대에 예수처럼 하나님만을 믿고, 그 분의 뜻을 따라 이 시대를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차라리 예수를 모르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데는 훨씬 더 속 편한 것은 아닐까? 정직하게 말하자면, 이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기독교인들의 고민입니다.
저는 오늘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어/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 분이 앞서 간 그 길을 함께 가자고 권면하고자 합니다. 예수의 길, 그것은--마틴 루터의 말에 따르면--십자가의 길입니다. 이 세상의 허다한 소리를 뒤로 하고, 오직 하나님의 음성에만 귀 기울이며, 오직 그 분이 뜻하시는 삶을 사는 길이기에 그것은 힘든 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미 그 길을 가셨고, 루터가 그 길을 갔고, 또한 우리들도 기왕에 그 길에 들어섰습니다. 모쪼록 지금까지 지켜온 이 길을 우리의 삶이 다하는 그날까지 끝까지 지켜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같은 길 가고자 하는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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