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앞에 놓인 두 갈래 길
잠12:10-19
[의인은 집짐승의 생명도 돌보아 주지만, 악인은 자비를 베푼다고 하여도 잔인하다. 밭을 가는 사람은 먹을 것이 넉넉하지만, 헛된 것을 꿈꾸는 사람은 지각이 없다. 악인은 불의한 이익을 탐하지만, 의인은 그 뿌리로 말미암아 열매를 맺는다. 악인은 입술을 잘못 놀려 덫에 걸리지만, 의인은 재난에서 벗어난다. 사람은 열매 맺는 말을 하여 좋은 것을 넉넉하게 얻으며, 자기가 손수 일한 만큼 되돌려 받는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행실만이 옳다고 여기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충고에 귀를 기울인다. 미련한 사람은 쉽게 화를 내지만, 슬기로운 사람은 모욕을 참는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정직한 증거를 보이지만, 거짓 증인은 속임수만 쓴다. 함부로 말하는 사람의 말은 비수 같아도, 지혜로운 사람의 말은 아픈 곳을 낫게 하는 약이다. 진실한 말은 영원히 남지만, 거짓말은 한순간만 통할 뿐이다.]
• 삶의 시금석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늦가을 숲이 참 아름다운 때입니다. 낙엽이 곱게 쌓인 한적한 숲길 혹은 오솔길을 가만히 걷노라면 저절로 시인이 될 것 같습니다. 그 길 위에 서면 마치 습관처럼 "단풍 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 떠오르고, 단테의 <신곡> 첫 대목이 떠오릅니다. "우리네 인생길 반 고비에/나 올바른 길을 잃고,/어두운 숲 속에 있었노라". 조락凋落의 계절은 자꾸만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사람들이 황량하다고 말하는 겨울산을 제가 좋아하는 것은 어쩌면 겨울산이 종교적 사유 속으로 이끌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는 잘 살고 있는가?' 가끔은 멈추어 서서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입니다. 문제는 '잘'이라는 부사에 대한 의미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입니다. 소유 중심적으로 사고하는 이와 존재 중심으로 사고하는 이의 경우가 다를 것입니다. 잘 산다는 것을 즉시 물질적 풍요나 사회적 성취로 이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삶을 순례로 이해하는 이들은 좀 다릅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삶은 자기 닦음의 과정입니다.
성경의 성문서들은 사람을 '악인'과 '의인', '어리석은 사람'와 '지혜로운 사람'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에 전적으로 악한 사람이나 전적으로 의로운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악인들에게도 선한 구석이 있고, 의인들 속에도 악한 구석이 있게 마련입니다. 문제는 지향입니다. 악인들 혹은 어리석은 사람들은 늘 자기를 중심에 놓고 사고합니다. 자기 이익과 편안함을 얻기 위해서 다른 이들을 수단으로 삼는 일에 주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의인들 혹은 지혜로운 사람들은 늘 다른 이들을 배려합니다. 더 나아가서 자기 삶을 더 큰 질서 속에 세우려 노력합니다. 처리해야 할 많은 일들에 쫓겨 살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중심적 사고 속에 갇히기 쉽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자꾸 멈춰서야 합니다. 자기 삶을 비춰볼 시금석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거룩할 '성'과 날실을 뜻하는 '경'이 합쳐진 단어입니다. 날실은 피륙을 짤 때 세로로 놓인 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날실이 가지런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옷감을 짤 수가 없는 것처럼 우리 삶이 가지런해지려면 수직의 중심이 바로 서야 합니다. 성경을 서양에서는 '캐논'이라고도 하는 데 그 뜻은 '표준, 척도'입니다. 우리 삶을 자꾸만 그 캐논에 따라 조율하지 않으면 방향을 잃기 쉽습니다.
• 생명을 대하는 태도
잠언에는 일정한 서사 구조가 없습니다. 잡다한 이야기가 그저 나열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쩌면 잠언箴言은 본래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잠箴'은 기본적으로 '바늘 혹은 침'을 뜻하는 말입니다. 잠언은 그러니까 콕콕 찌르는 말입니다. 무감각을 깨뜨리는 말, 느슨해진 우리 마음을 경계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잠언에는 분명한 중심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가르침이 그것입니다. 여호와 경외는 자기보다 큰 세계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제주도의 어디에서 바라보아도 한라산이 보이듯이 잠언의 모든 구절들은 바로 이 대목과 연결됩니다. 오늘의 본문은 의인의 삶과 악인의 삶을 비교하는 긴 단락의 일부분입니다. 어디부터 읽어도 되지만 10절부터 읽은 것은 이 대목이 마음에 깊이 와 닿았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집짐승의 생명도 돌보아 주지만, 악인은 자비를 베푼다고 하여도 잔인하다."(10)
의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생명 중심적 사고를 하는 사람입니다. '생명 경외 사상' 하면 앨버트 슈바이처가 떠오릅니다. 이 사상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세상에 있는 모든 생명은 살기를 원한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어린 시절에 동화를 읽다가 '아이들은 장난으로 개구리에게 돌을 던지지만 개구리에게는 죽고 사는 문제가 달린 일'이라는 대목과 만났을 때 느꼈던 존재의 충격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올해 노벨 문학상을 받은 벨라루스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체르노빌의 목소리>는 1986년 4월 26일 밤에 벌어진 체르노빌 핵발전소 폭발 사고로 인해 삶이 황폐해진 사람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그 사고가 얼마나 재앙적인지를 잘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소비에트 정부는 언론을 통해 별일 아닌 것처럼 호도했고, 사람들은 정부의 말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방사능에 노출된 사람들이 비극적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비로소 공포에 사로잡히기 시작합니다. 체르노빌 반경 수십 킬로미터에 거주하던 이들은 아름다운 고향 마을을 떠나야 했습니다. 땅에서 자라는 작물들을 수확할 수도 없었고,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의 향기를 맡을 수도 없었습니다. 아주 간단한 짐만 챙겨 떠나야 했던 사람들은 집에서 기르던 짐승들을 데려 갈 수가 없었습니다. 버림받은 개와 고양이는 텅 빈 거리를 배회했습니다. 그런데 그 짐승들은 방사능 오염 덩어리였습니다. 정부는 군인과 사냥꾼들을 보내 짐승들을 쏴 죽이도록 했습니다. 모처럼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리자 개와 고양이 그리고 말들이 반가워하며 다가왔습니다. 사냥꾼들은 그 짐승을 쏘아야 했습니다. 그건 정말 묵시록적인 광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의인은 모든 생명이 그 자체로 목적을 지닌 존재로 여깁니다. 그렇기에 아끼고 존중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 만물을 지으셨다고 고백합니다. 그 고백이 진실하다면 우리는 세상의 어떤 것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살기 위해서 부득이 다른 생명을 먹을 수밖에 없는 게 동물의 운명이지만, 늘 고마움과 조심스러움으로 그리 해야 합니다. 악인은 다른 사람이나 다른 존재의 고통에 무관심합니다. 서슴없이 폭력을 자행합니다. 그들은 타자를 늘 자기 만족이나 이익을 위해 수단으로 삼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폭력의 뿌리에는 이러한 자기 중심성이 놓여 있습니다. 인간의 인간됨은 자기 욕망을 거슬러 타자 중심적 사고를 할 수 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요? 12절은 이것을 아주 함축적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악인은 불의한 이익을 탐하지만, 의인은 그 뿌리로 말미암아 열매를 맺는다."(12)
• 살리는 말, 죽이는 말
의인과 악인의 차이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언어생활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은 더 나아가서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1:1)고 선언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말이 있고 단절시키는 말이 있습니다. 생명을 북돋고 살리는 말이 있는가 하면 생명을 위축시키고 죽이는 말이 있습니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아담은 자기 앞에 있는 하와를 보고 사랑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고 부를 것이다"(창2:23). 아담의 말은 북돋고 살리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죄가 들어오자 그 말이 바뀝니다. 왜 선악과를 따먹었느냐는 책망을 들은 아담은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짝지어 주신 여자, 그 여자가 그 나무의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그것을 먹었습니다"(창3:12)라고 핑계를 댑니다. 이것은 너와 나를 가르는 단절의 언어입니다.
나는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문제를 언어의 타락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위스 작가인 페터 벡셀의 소설 <책상은 책상이다>에는 외로운 한 남자가 등장합니다. 아무런 가정적, 사회적 책임도 지지 않는 그는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자기 스스로 한 가지 게임을 하기로 합니다. 그것은 사물들의 이름을 바꿔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침대를 사진으로, 책상을 양탄자로, 의자를 시계로, 시계를 사진첩으로 부르는 것이지요. 예컨대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의자를 끌어당겨 책상 앞에 앉았다"는 문장을 "그는 사진에서 일어나 시계를 끌어당겨 양탄자 앞에 앉았다"라는 문장으로 바꾸는 식이었습니다. 그는 그 일에 열중했고 자기 나름의 세계에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살았습니다. 문제는 그가 더 이상 다른 이들과 소통할 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말들이 제값을 잃고 떠돌 때 우리는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말의 내용보다 중요한 것은 '누가 한 말인가'가 됩니다. 그가 내 편이면 그가 한 말은 다 옳고, 그가 내 편이 아니면 그가 한 말은 다 그른 말입니다. 바로 이게 타락한 언어가 빚어내는 디스토피아입니다. 잠언은 "악인은 입술을 잘못 놀려 덫에 걸리지만, 의인은 재난에서 벗어난다"(13)고 말합니다. 악인의 말은 결국 그 자신을 사로잡는 덫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진실한 말과 거짓된 말을 분별하기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욕망이 첨예하게 충돌하는 상황에서는 누구의 말이 옳은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그의 말이 어디에서 출발하는지 잘 살펴야 합니다.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발설된 말인지, 공익을 위해 발설된 말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그런 분별력을 발휘하지 못할 때 우리는 언어를 지배하는 이들의 먹잇감이 되고 맙니다. 잠언은 진실한 말과 거짓된 말의 분별법을 간략하게 가르칩니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정직한 증거를 보이지만, 거짓 증인은 속임수만 쓴다. 함부로 말하는 사람의 말은 비수 같아도, 지혜로운 사람의 말은 아픈 곳을 낫게 하는 약이다. 진실한 말은 영원히 남지만, 거짓말은 한순간만 통할 뿐이다."(17-19)
아무리 좋은 말이라 해도 누군가의 감정을 상하게 한다든지 모욕감을 느끼게 한다면 그 말의 효용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빈정거리는 말, 모욕하는 말, 특정한 이미지 속에 가두려는 말, 상처를 입히려는 비수와 같은 말이 빚어내는 혼돈 속에서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런 혼돈을 만들어내는 이들은 대개 그 혼돈 뒤에 숨어 자기 이익을 도모하는 악인들입니다. 그러나 악인들의 거짓말은 한순간만 통할 뿐입니다.
• 들을 줄 아는 사람
이제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인가를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못 배운 사람이 아닙니다. 남에게 배울 생각이 없는 사람입니다. 마루야마 겐지라는 일본 소설가의 인터뷰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교양을 갖춰야 한다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데 취직하기 위해 머리에 지식을 쑤셔 넣는 일은 교양이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그러면서 1923년에 일본의 관동대지진 때 벌어진 일을 예로 듭니다. 일본 정부는 대중의 분노가 국가로 향하지 않도록 조선인들을 제물로 던져줬습니다. 조선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켜 쳐들어 올 거라는 소문을 냈던 것입니다.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약을 탔다는 소문도 냈습니다. 그러자 일본인들은 '조선인이 오면 다 죽여 버리겠다'고 했고, 대학 교수들도 그런 맹목적인 폭력에 동조했습니다. 그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고 외쳤던 이는 생선가게 주인이었습니다. 마루야마 겐지는 묻습니다. "대학교수와 생선장수, 둘 중 누가 더 교양인일까요?"(경향신문, 2015년 8월 22일자 대담) 오늘 본문도 같은 사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행실만이 옳다고 여기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충고에 귀를 기울인다. 미련한 사람은 쉽게 화를 내지만, 슬기로운 사람은 모욕을 참는다."(15-16)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의 차이는 '타인의 말을 경청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자기 견해만 옳다 하는 이들은 지혜로운 듯 보여도 실은 어리석은 자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자기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화를 내지만 슬기로운 사람은 모욕적인 상황 속에서도 자기를 돌아봅니다.
지금 우리 앞에는 두 갈래 길이 놓여 있습니다. 악인의 길과 의인의 길이 그것입니다. 지혜로운 자의 길과 어리석은 자의 길이 그것입니다. 시편 1편도 같은 상황을 보여줍니다. 시인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이를 가리켜 복 있는 사람이라 말합니다. 복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늘 자기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에 잇댄 채 살아야 합니다. 나의 뜻, 내 편의 이익이 아니라 세상을 지으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시인은 그런 이들을 가리켜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늘 다른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배우기 위해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래야 악인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조락의 계절, 나무가 잎을 떨궈 겨울을 준비하듯이 우리 삶에 드리운 허장성세들을 하나 둘 내려놓고 겸허하게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우리의 말과 행실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모두 어둠이 아니라 빛을 향해 나아가는 이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김기석목사(청파교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같은 사랑으로 (0) | 2015.11.12 |
---|---|
내 발을 지키시는 하나님 (0) | 2015.11.12 |
기쁨과 관용 (0) | 2015.10.08 |
사귐과 연대로의 초대 (0) | 2015.10.05 |
하나님의 사람이여 (0) | 2015.1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