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기쁨과 관용

천국생활 2015. 10. 8. 13:39

 기쁨과 관용


바울은 기독교인의 실존을 드러내는 두 가지 특징을 사람들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기쁨과 관용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늘 오뉴월 먹장구름 낀 하늘처럼 찌푸린 얼굴로 지내는 이들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우울한 표정이냐"고 물어보면 "도무지 기뻐할 일이 있어야지요?" 하고 대답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사실 세상 돌아가는 일을 보면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는 장소가 어디입니까? 감옥입니다. 그

는 지금 열악하기 그지없는 환경 속에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전망도 불투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자신이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다가 고난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에서 그는 이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겪는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을 우리에게 이루어 줍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고후4:17-18)

보이지 않는 것, 즉 영원한 것을 바라보는 이들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김흥호 목사님은 믿음을 일러 '안에 핀 꽃'이라 했습니다.

사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비밀을 오롯이 드러내줍니다.

예수님은 자주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안에 있는 아버지가 바로 '안에 핀 꽃'입니다.

그 꽃은 시들지 않습니다. 향기가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바울은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라고 말한 것도 같은 지점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 있을 때 참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진리가 주는 자유로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또 다른 특색은 관용입니다.

 "여러분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4:5).

관용寬容의 사전적 의미는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입니다.

관용을 한자어 그대로 풀면 '너그러운 얼굴'입니다.

너그러운 얼굴은 누군가를 배척하지 않고 수용하는 얼굴이겠지요.

기독교인의 얼굴은 그러해야 합니다.

지나칠 정도로 자기 확신에 사로잡힌 사람은 관용적이지 못합니다.

레마르크의 소설 <개선문>은 나치 시대에 독일을 탈출하여 파리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라비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는 최고의 외과의사이지만 프랑스에서 의사 면허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다른 의사들의 수술을 대행하며 살아갑니다.

환자가 마취상태에 들어가면 그가 나타나 수술을 진행하곤 했습니다.

다른 의사들은 그를 통해 돈도 벌고 명망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수술실에서 늘 만나곤 하는 간호사 외제니는 라비크를 싫어합니다.

그가 아무 것도 신성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게슈타포에게 붙잡혀 갖은 고초를 다 겪고, 자기 애인이 고문을 당하고 죽는 모습까지 지켜본 그에게

신성한 것이 남아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외제니가 자기를 비난하자

라비크는 신앙이 때로는 광신으로 변한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관용은 회의의 딸이지요. 외제니. 당신은 그런 신앙심이 있으면서도

나에 대해, 패배한 무신론자인 내가 당신을 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공격적이지 않소?"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개선문 1>, 민음사, 2015년 2월 16일, p.72)



잘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냉혹하고 계산적이고, 불안정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공격적인 외제니의 믿음이 진실한 것일까요?

기독교인들은 품이 넓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소한 차이조차 견디지 못하는 신앙이란 얼마나 불안정한 것입니까?

오늘의 개신교인들이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 편협함 때문입니다.

바울은 여러분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라고 말하면서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다고 말합니다.

기쁨과 관용은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입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진리를 '비은폐성'(Unverborgenheit)이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진리는 숨어 있던 것이 드러나는 사건을 통해서 발현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드러나는 징표로 기쁨과 관용을 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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