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사나운 영의 숨소리

천국생활 2015. 12. 9. 12:23

사나운 영의 숨소리
요1:19-28
 

[유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 지파 사람들을 요한에게 보내어서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어 보게 하였다. 그 때에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였다. 그는 거절하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 하고 그는 고백하였다. 그들이 다시 요한에게 물었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요한은 "아니오" 하고 대답하였다. "당신은 그 예언자요?" 하고 그들이 물으니, 요한은 "아니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말하였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란 말이오? 우리를 보낸 사람들에게 대답할 말을 좀 해주시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시오?" 요한이 대답하였다.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대로,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요.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하여라' 하고 말이오." 그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또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면, 어찌하여 세례를 주시오?" 요한이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오.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이가 한 분 서 계시오. 그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만한 자격도 없소." 이것은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다.]

• 우마야드 모스크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대림절 둘째 주일인 오늘, 주님이 오실 길을 예비했던 세례자 요한을 통해 주님을 기다리는 이들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여러 해 전 시리아에 며칠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IS의 근거지로 알려지고 있어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나라입니다. 구 다마스커스 거리에 있는 숙소에 머물면서 바울이 걸었던 '곧은 길'이며, 하늘의 빛과 만나 앞을 보지 못하던 그를 찾아와 안수함으로 눈을 뜨게 했던 아니니아의 집을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던 그를 죽이려고 유대인들이 밤낮으로 성문을 지키고 있음을 알고 광주리를 타고 성밖으로 탈출했던 장소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다마스커스에서 제일 인상적이었던 것은 우마야드 모스크(Umayyad Mosque)였습니다. 그 건축물의 규모나 화려함도 대단했지만 모스크 안에 있는 돔형의 작은 예배당은 우리 의식의 허를 찔렀습니다. 고린도식 기둥 사이에 있는 그 작은 건물은 '세례자 요한 머리 무덤 교회'였습니다. 요르단의 마케루스 산성에 갇혀 있다가 참수된 요한의 머리는 시리아 총독이 주재하고 있던 다마스커스로 보내져 그곳의 지하 납골당에 묻혔던 것입니다.

애초에 그곳은 고대 시리아인들이 비를 주관하고 또 땅을 비옥하게 한다 하여 최고산으로 모셨던 '하다드'의 신전이 있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시리아가 로마제국의 지배 하에 있을 때 로마는 그 신전터에 쥬피터 신전을 세웠고, 비잔틴 시대에는 그곳에 '세례자 요한 머리 무덤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던 중 시리아가 이슬람세계에 편입되자 사람들은 그곳에 거대한 모스크를 세웠습니다. 그들이 '세례자 요한 머리 무덤 교회'를 헐지 않은 것은 무슬림들도 세례자 요한을 위대한 선지자로 여기기 때문이었습니다. 인간 세계의 변전에 따라 한 장소의 의미가 그렇게 변한다는 사실이 참 묘한 느낌을 줍니다. '세례자 요한 머리 무덤 교회'를 둘러보는 동안 마음이 참 착잡했습니다. 죽음조차도 뒤흔들 수 없는 그의 자유혼이 처절하게 되새겨졌기 때문입니다. 초록색 조명이 은은하게 비치고 있는 그곳에서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외쳤던 그의 목소리가 우렁우렁 들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 요한의 길, 예수의 길
세례자 요한은 요단강 인근의 광야에 머물면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가진 것이 없었기에 그는 거침없는 언사로 성전체제와 권력자들의 불의와 위선을 폭로했습니다. 그는 다정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에게 들큰한 위로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가 세례를 받으러 나온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을 보고 뭐라 했는지 아시지요?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마3:7a-8). 사회 지도층에 속한 그들의 비위를 맞추려는 생각이 아예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섣부른 선민 의식에 안주하고 있는 이들을 향해 "너희는 속으로 주제넘게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 하고 말할 생각을 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마3:9)고 말했습니다. 내로라 하는 자부심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그는 에두르는 법 없이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하냐?'고 묻는 이들에게 그는 "속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세리들에게는 "너희에게 정해 준 것보다 더 받지 말아라" 했고, 군인들에게는 "아무에게도 협박하여 억지로 빼앗거나, 거짓 고소를 하여 빼앗거나, 속여서 빼앗지 말고, 너희의 봉급으로 만족하게 여겨라" 하고 말했습니다. 정말 단순합니다. 참 삶은 복잡한 신학 이론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아픔에 공감하고, 할 수 있는 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려 하고, 다른 이들의 살 권리를 침해하지 않으려고 늘 마음 쓰며 살면 됩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은 조금 다릅니다. 세례자 요한의 활동무대가 광야였다면 예수님의 활동무대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이었습니다. 요한은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찾아오는 사람은 물론이고 사람들 속에 파고 들어 하나님 나라를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비유는 일상에 근거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밭에 씨를 뿌리는 농부, 바다에서 건져올린 물고기를 고르는 어부들, 밀가루 반죽 속에 누룩을 넣는 여인, 진주를 사러 다니는 상인, 양을 치는 목자 등이 그러합니다. 일상의 삶을 떠난 하나님 나라 이야기는 공허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일상 속에서 미시적으로 작동하는 권력관계를 예수님은 꿰뚫어보고 계셨습니다. 의인과 죄인, 거룩함과 속됨,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누고, 여자를 차별하는 세상이 지양되지 않는 한 새로운 세상은 열릴 수 없음을 아셨기에 주님은 그 두 세계 사이를 오가면서 불통하던 이들이 만나도록 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선포는 옛 세계를 해체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는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놓였다고 말함으로써 폭력과 힘의 세계가 끝나가고 있음을 증언했습니다. 그에 비해 예수님은 선포는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집중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들이야말로 내 어머니요 내 형제요 자매라고 말씀하심으로 핏줄을 넘어선 사랑의 공동체의 가능성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심으로써 그가 얼마나 위대한 영혼인지를 공적으로 인정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저는 그 말을 세례자 요한이 옛 세계와 새로운 세계의 경계선에 서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활동은 회개로의 부름과 세례에 집중되었다면 예수님의 활동은 하나님 나라 선포와 아울러 병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의 회복에 집중되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사람들과 거리를 둔 채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가리켜 보이는 사람이었다면 예수님은 직접 사람들 속에 들어가서 길을 만드신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러움에도 손을 대야 했고, 귀신과 맞서기도 했고, 사람들의 노골적인 적대감에 직면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일을 피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 하늘 땅 사이를 달리는 바람 소리
유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 지파 사람들을 요한에게 보내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요한은 그 질문의 뜻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대가 메시아냐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 파견된 이들은 다시 "그러면, 당신은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아니오." "당신은 그 예언자요?" "아니오." 여기서 '그 예언자냐'는 질문은 신명기 18장 15절과 연관된 것입니다. 모세는 탈출 공동체를 향해 하나님께서 "나와 같은 예언자 한 사람을 일으켜 세워 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예언자'는 모세와 같은 위대한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다급해진 사람들이 자기들을 파견한 이들에게 답할 말을 좀 해달라고 하자 요한은 이사야의 말을 인용하여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말합니다. '소리'라는 게 대체 뭘까요? 나는 그것을 함석헌 선생의 시를 통해 깨달았습니다.

나는 빈 들에 외치는 소리
아니 건드리는 것이 없고
못 들어가는 틈사리가 없고
간 데마다 부닥쳐 싸워
이겨 울고 져서 우는
하늘 땅 사이를 달리는 바람 소리.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감 몰라
우두컨 서는 인생들이 늘 맘에 차지 않아
참과 거짓 가르기 싫어,
뒤범벅을 해 굴리는 세상이 언제나 미워,
흔들고 또 흔들고 부르고 또 부르며
가는 소리 하나 들으려다
종시 큰 소리를 내고야 마는
허공을 뒤흔드는 사나운 영의 숨소리.
-<나는 빈 들에 외치는 소리> 부분

소리는 느른한 우리의 일상을 뒤흔듭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늘과 땅 사이를 달리는 바람 소리와 같습니다. 참과 거짓 사이에서 선택하지 못한 채 사는 우리들을 찾아와 흔들고 또 흔들고 부르고 또 부르면서 허공을 뒤흔드는 사나운 영의 숨소리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숨소리입니다. 그 소리는 영원을 일깨우는 소리입니다. 이웃들의 아픔에 반응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부름입니다. 이런 소리가 잦아들 때 세상은 어두워집니다. 지금도 광야와 같은 세상 도처에서 하늘의 소리를 내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세상의 희망입니다.

• 길을 곧게 한다는 것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리스도도, 엘리야도, 그 예언자도 아닌 사람이 왜 세례를 주냐고 묻습니다. 자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오.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이가 한 분 서 계시오. 그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만한 자격도 없소."(요1:26-27) 물론 이것은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닙니다. 들을 생각이 없는 이들에게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증언을 계속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이가 한 분 서 계시오'라는 말이 참 강력합니다. 우리도 혹시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요한은 자기 역할을 '주님의 길을 곧게 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이 역할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주어진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며칠 전 우리는 페이스북의 창업자인 마크 저커버그와 그의 아내 프리실라 챈이 딸 맥스의 탄생을 기뻐하며 자기들이 보유하고 있는 페이스북의 지분 99%를 기부한다는 소식에 접했습니다. 돈으로 환산하면 약 52조원이 된다고 하더군요. 그는 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에서 자기 부부가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맥스야, 우리는 너를 사랑하며, 너와 모든 어린이들에게 보다 나은 세상을 남겨주기 위한 엄청난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 네가 우리에게 줬던 것과 같은 사랑과 희망, 기쁨으로 가득한 삶을 살기 바라며 네가 이 세상에 무엇을 가져다줄지 어서 보고 싶구나". 그는 어른들은 다음 세대들이 살아갈 세상을 좀 더 좋게 만들어야 할 도덕적 책임이 있다면서, 그런데도 어른들은 자기들이 가진 자원을 가장 큰 기회와 다음 세대가 직면할 문제에 집중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전쟁, 기아, 질병, 불평등의 심화, 기후 변화, 식량 위기 문제야말로 우리 시대가 풀어가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일 겁니다. 주님 오시기를 기다리는 이들은 바로 이런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저는 마크 저커버그와 프리실라 챈이 보여준 사회적 실천이야말로 주님이 오실 길을 닦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들 살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제 앞가림 하기에 바빠서 공적인 일에 무관심한 이들이 많습니다. 엔에이치(NH)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가 우리나라의 중위소득에 해당되는 이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고는 그 연구 결과를 '2016 대한민국 중산층 보고서'를 통해 발표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중산층의 모습은 이러합니다.

"월 374만원을 번다. 102제곱미터(31평)짜리 집 한 채와 중형차 한 대가 있다. 집 장만하느라 생긴 빚 빼고 재산은 2억3천만원이다. 6천원짜리 점심을 먹고, 하루 8.2시간 일한다. 가족과 보내는 시간은 하루 1시간 40분이다. 취미 활동은 한달에 한번 정도다. 따로 모은 돈은 거의 없고, 노후는 쥐꼬리만한 국민연금에나 기댈까 한다. 이런 내가 중산층이냐고? 아닌 것 같은데…."(한겨레신문, 2015년 12월 3일 2면에서 재인용)

중간 정도의 소득에 해당하는 이들 가운데 79.1%가 자기는 중산층 아래라고 했습니다. 사회적 불안감이 점점 심화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인생의 목적으로 '가정의 안녕'(40%)을 꼽고 있지만 가족과 보내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아무리 애써 보아도 형편이 나아질 것 같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형편 가운데서 '주님이 오실 길을 예비하라'는 요구 앞에 서 있습니다. 저커버그처럼 할 수 없다고 하여 낙심할 이유는 없습니다. 얼마 전 버마(미얀마)의 아웅산 수치의 말 한 마디가 제 가슴을 쳤습니다. "희망이 없다면 누군가를 도우라 If you are hopeless, help someone". 희망은 그런 일을 통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다른 이들을 돕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을 때 하나님의 희망이 유입됩니다.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공적인 일에 관심을 갖고, 불의에 저항하고, 고통받는 이들 곁에 다가설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늘이 주는 자유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 가운데 촛불 두 개가 타오르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삶의 자리에서 촛불이 될 차례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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