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국 교회를 증오합니다
문득 '교회'라는 단어가 발설될 때 우리 속에 어떤 울림이 일어날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매스컴을 통해 사뭇 뭇매를 맞고 있는 형편이니 그 대답이 긍정적이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벌써 30여 년 전의 일입니다만, 제 은사이신 변선환 목사님께서 젊은이들의 연합 모임에서 설교를 하시던 광경이 떠오릅니다. 시국이 시국인만큼 그 자리에는 사복형사들도 여러 명 들어와 있었습니다. 원고를 죽 읽어나가시던 선생님은 감정이 격앙되었던지 문득 고개를 들고는 회중들을 가만히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사자후를 토해내셨습니다. "나는 한국 교회를 증오합니다." 저는 좀 당황했습니다. 신학적 논쟁의 중심에 계시던 선생님의 그 발언은 마치 자폭 테러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선생님의 쓸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간결하고도 명증한 그 두 마디는 지금도 제 가슴에 큰 울림이 되어 남아 있습니다.
시대의 아픔에 공감하기보다는 교세 확장에 여념이 없는 교회, 역사를 바루는 일보다 개인의 영달과 평안에만 치중하는 교회는 선생님의 눈에 맛 잃은 소금과 같은 교회였던 것입니다. 그가 사랑하는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그것은 오롯이 예수의 정신이 선포되고, 어렵더라도 그 말씀에 따라 살려는 이들이 있는 곳일 겁니다. 장공 김재준 목사님은 교회를 '전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라 했습니다. 교회는 품지 못할 사람이 없는 곳이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했습니다. 교회의 교회됨은 예수의 손과 발이 되는 데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사역을 '경계선 가로지르기'(crossing the border), 혹은 '빗금 지우기'(erasing the oblique)라는 말로 요약하곤 합니다. 평화 없는 세상의 특색은 사정없이 가르는 데 있습니다. 나/남, 남자/여자, 흑/백, 부자/빈자, 배운 이/배우지 못한 이, 여/야, 동/서, 거룩함/속됨, 유대인/이방인…. 경계선은 대개 지킬 것이 많은 사람들이 만드는 법입니다. 그들은 경계선 저편에서 특권을 누리고 안락함을 누리고 싶어합니다. 그들에게 경계선 너머에 있는 이들은 불쾌하거나 위험한 이들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자기 속에 있는 불편한 감정을 넘어 그 경계선 너머에 있는 이들과 소통하기 위해 자꾸만 다가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은 명사보다는 동사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관념보다는 실천이 주가 되는 삶이었다는 말입니다. 마치 물이 낮은 곳을 향해 흐르듯 주님은 언제나 아픔이 있는 곳을 찾아가셨습니다. 제가 이렇게 주님의 삶을 명토 박아 말하는 까닭은 예수에 대한 논의는 잘 하지만 예수의 삶은 철저히 따르지 못하는 나 자신의 모습을 자책하기 위함입니다. 조선 시대의 선비인 허목(許穆, 1595-1682)은 자신의 평생을 돌아보며 스스로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렸습니다.
"나는 늘 말이 행동보다 앞섰다. 자꾸 떠벌리기만 했지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했다. 경전을 손에서 놓은 적은 없지만, 그 말씀이 내 삶 속에 녹아들진 않았다. 말씀 따로 나 따로 각자 놀았다. 나는 이것이 부끄럽다. 지금에 와서 깊이 반성한다. 나 죽으면 이 글을 돌에다 새겨 내 무덤 앞에 묻으라. 뒷 사람이 이 글을 보고 자신을 비춰볼 수 있도록."(정민, <죽비소리>, 마음산책, p. 199)
참으로 엄정한 자기반성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답게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우리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경배의 대상으로 상정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주님이 사람들을 부를 때 하신 말씀은 '나를 믿어라'가 아니라 '나를 따르라'였습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주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도 한다는 뜻일 겁니다. 35절은 예수님의 사역을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유대 사람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며,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온갖 질병과 온갖 아픔을 고쳐 주셨다."(35)
'가르치셨다'(teaching), '선포하셨다'(preaching), '고쳐 주셨다'(healing)라는 세 단어가 눈에 띕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아주 일상적인 언어로 잘 풀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좋은 이웃이 되는 것’,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의 불꽃을 꺼뜨리지 않는 것’이 그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셨습니다. 선포의 언어는 우리의 일상적 의식이나 삶을 뒤흔듭니다. 예언자들의 언어를 떠올려 보십시오. 선포의 언어는 듣는 이들에게 결단을 요구합니다.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로마 제국이 득세하고 있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꿈꾼다는 것은 그야말로 불온한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천당 혹은 천국으로 바꾸어서 장소적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1세기의 팔레스타인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를 뜻하는 개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는 일종의 저항 담론이었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억압과 착취와 폭력을 통해 유지되는 제국이 아니라, 섬김과 나눔과 평화를 통해 열릴 새 세상의 꿈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셨습니다.
오늘의 문화는 타자를 경쟁상대로 인식하고, 내 삶의 영역에서 밀어내야 할 위험인물로 대상화하도록 만듭니다. 하지만 교회는 낯선 이들을 향해 마음을 열고 다가설 때 비로소 세워집니다. 크고 화려하고 안락한 건물이 교회가 아닙니다. '너'를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빚어낸 공간이 바로 교회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떤 경계선 앞에서 서성이고 계십니까?
한번 용기를 내보십시오. 그 경계선 너머의 사람들과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보십시오. 바로 그곳에서 새로운 교회가 탄생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소중한 것들을 소외된 이웃들 속에 숨겨두십니다. 그들에게 다가서지 않는 한 우리 삶의 비애는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일터에 기꺼이 동참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 김기석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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