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하게, 꾸준하게
마12:15-21
[그러나 예수께서 이 일을 아시고서, 거기에서 떠나셨다. 그런데 많은 무리가 예수를 따라왔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리고 자기를 세상에 드러내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셨다.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보아라, 내가 뽑은 나의 종, 내 마음에 드는 사랑하는 자,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것이니, 그는 이방 사람들에게 공의를 선포할 것이다. 그는 다투지도 않고, 외치지도 않을 것이다. 거리에서 그의 소리를 들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정의가 이길 때까지,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을 것이다. 이방 사람들이 그 이름에 희망을 걸 것이다."]
• 경계선을 넘는 용기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세계 도처에서 마치 외줄타기 하듯 희망과 절망 사이를 넘나들고 있는 이들, 특히 큰 지진으로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입은 네팔에도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희망을 품고 이탈리아의 람페두사 섬을 향해 항해하다가 물 속에 수장된 아프리카의 형제 자매들도 주님이 품어주시기를 빕니다.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인생이란 뜬구름 같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습니다. 언제 어떻게 스러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허망한 일에 몰두하기보다는 주어진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러나 예수께서 이 일을 아시고서, 거기에서 떠나셨다"는 구절로 시작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일'이란 예수를 없애려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모의를 말합니다. 자신의 경건함을 자랑하는 이들이 누군가를 제거하려고 모의한다는 사실 자체가 좀 아이러니합니다. 참된 경건이란 생명을 돌보고 북돋는 것인데, 그들은 어쩌다가 예수를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요? 예수가 자기들이 쓰고 있던 가면을 벗겨 실체를 드러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떤 사람이 그럴 상황이 아닌 데도 과도하게 성을 낸다면, 그것은 그가 애써 숨기고 싶었던 자기 실체가 노출되었다고 느끼기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부끄러움은 자기 평가적 감정입니다. 어느 분은 부끄러움을 둘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하나는 자괴성 부끄러움입니다. 자신의 행위가 스스로 내면에 설정해 놓은 가치 기준과 위배될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어떤 연유에서든지 자기 양심에 위배되는 일을 하고 그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이지요. 다른 하나는 창피성 부끄러움입니다. 자신의 행위가 공동체가 설정해 놓은 가치 기준과 위배될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자기 양심보다는 타자의 시선이 기준입니다. 그런데 이런 부끄러움을 참회의 기회로 삼기보다는 그런 부끄러움을 야기한 이에 대한 미움으로 전환시키는 이들이 꽤 많습니다.
복음서에 등장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전형적입니다. 앞선 대목은 안식일 준수 문제를 놓고 예수님과 바리새파 사람들 사이에 논쟁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동기는 단순합니다. 예수님 일행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셨는데 시장했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이 논쟁의 발단이어.씁니다. 배고픈 사람들이 시장기를 면하기 위해서 남의 밭에서 이삭을 잘라서 먹는 일은 관습적으로 허용되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거두어서 집으로 가져간다면 그건 절도입니다. 정도의 문제입니다.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목회하고 있는 김재완 목사님의 페북에서 본 글이 생각납니다. 쾰른 시의 슈탄데스암트(Standesamt, 혼인을 담당하는 관청) 맞은 편에 동상이 하나 서 있다고 합니다. 1942년부터 1969년까지 쾰른 교구를 담당하고 있던 요세프 프링스(Josef Frings) 추기경의 동상입니다. 쾰른 시민들이 프링스의 사후에 감사의 마음을 담아 그곳에 세운 것입니다. 2차 세계 대전 후 패전국인 독일 시민들의 삶은 곤궁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식량도 땔감도 늘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겨울이면 난방도 되지 않은 집에서 음습한 추위과 싸워야 했습니다. 석탄 광산이 즐비한 루르 지역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역마다 어딘가로 운송해가기 위해 석탄을 가득 싣고 대기 중인 화물열차가 서 있었습니다. 화차에는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이 적힌 팻말이 부착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프링스는 1946년 12월 31일 송년 예배 때 사람들이 예기치 못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지금처럼 가족의 생명이 위협 받는 어려운 상황에서 스스로 아무리 노력해도 그 상황을 개선할 수 없을 때, 나쁜 의도가 아니라, 오로지 가족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남의 소유에 손을 대는 것은 십계명을 어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교회의 이름으로 석탄을 훔치는 일을 용납한 것입니다. 김재완 목사는 이 이야기 끝에 "진정한 신앙의 능력은 사랑 때문에 그리고 생명을 위해 때로는 경계선도 넘을 수 있는 용기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 얼음 세포
비슷한 상황입니다. 제자들은 시장기를 면하려고 밀 이삭을 조금 잘랐습니다. 그런데 바리새파 사람들이 문제 삼는 것은 그들의 사소한 일탈이 아니었습니다. 마침 그 날이 안식일이었고, 그들은 왜 안식일 규정을 어기도록 허용했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은 참된 안식일 준수는 특정한 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듣기에 매우 불쾌한 말을 덧붙이셨습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았더라면, 너희가 죄 없는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12:7-8)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 말씀을 신성모독처럼 받아들였습니다. 마태는 이후에도 안식일 논쟁이 지속되었음을 보여줍니다. 회당에서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준 것을 빌미 삼아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를 없앨 모의를 했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도 분개하게 했던 것일까요?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 하신 말씀을 깨달으라는 그 말이 아니었을까요? 참으로 아픈 부분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헛된 자부심의 가면이 그 말씀으로 일순간에 벗겨진 것입니다. 가장 경건한 체 하지만 자비심이 없다면 그처럼 허망한 노릇이 없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사람들은 애써 가리고 있던 자기의 실체가 드러나면 참회하기보다는 가면을 벗긴 사람에 대한 적의를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불필요한 갈등을 피하기 위해 그곳을 떠나셨습니다. 아직 주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압니다. 누가 진실에 더 가까운지를. 많은 무리가 예수를 따라갔습니다. 주님은 병든 이들을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남들과 구분되는 자신들의 경건행위에 붙들려 살았지만, 예수님은 고통받는 이들의 벗이 되는 것이 참된 경건임을 삶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눈밝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인류라는 나무의 가지 끝에 핀 꽃이라고 말합니다. 지구라는 행성이 빚어낸 가장 아름다운 열매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자기를 세상에 드러내지 말라고 사람들에게 단단히 당부하셨습니다.
한 달여 전에 신문을 보다가 '얼음 세포'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얼음세포는 떨켜와 더불어 나무들의 겨울 나기 전략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늦가을이 되면 나무는 잎으로 가는 수분과 양분을 차단하기 위해 가지와 나뭇잎 사이에 떨켜를 만들어냅니다. 얼마 후 잎은 시들고, 바람이 불면 미련없이 땅으로 떨어집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방하착放下着이라고 합니다. 내려놓는 것이지요. 그 홀연함에 마음이 이끌렸던지 정현종 선생은 '마른 나뭇잎'이라는 짧은 시를 썼습니다. "마른 나뭇잎을 본다//살아서, 사람이 어떻게/마른 나뭇잎처럼 깨끗할 수 있으랴." 나무의 구조 조정으로서의 떨켜도 내 마음에 크게 와 닿았지만 '아!' 하고 충격에 가까운 감동을 느낀 것은 '얼음 세포' 이야기였습니다. 나무는 세포와 세포 사이의 간극에 다른 세포보다 수천배 큰 얼음 주머니를 만든다고 합니다. 그곳에 얼음물을 품어서 겨울에 다른 세포들이 얼어 죽지 않게 단열과 보온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봄이 되면 얼음세포를 녹여서 가지 끝, 뿌리 끝, 잎사귀 곳곳에 수분을 공급한다네요. 우리가 연둣빛 새순을 보며 '참 좋다'고 말하는 동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얼음 세포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절로 예수님이 떠올랐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을 고쳐주고, 온전한 삶으로 회복시켜 주시고, 소외된 이들의 벗이 되어 주면서도 사람들의 시선이 당신에게 머무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현시 욕구에 사로잡힌 우리와 여러 모로 비교가 되지 않습니까?
• 정의가 이길 때까지
마태는 복음서를 기술하다가 그런 예수님의 삶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많은 고민을 했을 겁니다. 그러다가 떠올린 것이 바로 이사야서에 나오는 '고난받는 종의 노래'였던 것 같습니다. "보아라, 내가 뽑은 나의 종, 내 마음에 드는 사랑하는 자"라는 표현이 참 곡진합니다. 애정에 가득 찬 표현입니다. 이사야서에 나오는 이 대목보다 예수라는 존재를 잘 드러내는 말이 또 있을까요?
"그는 다투지도 않고, 외치지도 않을 것이다. 거리에서 그의 소리를 들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12:19)
다투지 않는다고 하여, 외치지 않는다고 하여 예수가 불의를 모른 척 외면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물과 같은 분입니다. 노자는 물을 통해 최고의 덕을 설명했습니다. 물은 아래로 아래로 흘러 내리면서 세상 만물을 두루 유익하게 합니다. 하지만 다투지 않습니다. 장애물이 있으면 돌아가고, 움푹 파인 곳이 있으면 그곳을 가득 채울 뿐입니다. 그리고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 곧 낮은 자리를 찾아갑니다. 하지만 물처럼 자연스럽게 사셨던 예수님도 위선적이고 불의한 자들을 보면 그들을 꾸짖는 일을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회칠한 무덤처럼 겉만 치장하는 위선의 무리들을 준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를 염원하던 제자들이 감격에 겨워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수를 향해 환호성을 지르자 바리새파 사람들은 제자들을 꾸짖으라고 요구합니다. 그 때 주님이 뭐라 하셨습니까?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눅19:40). 예수님은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하는 무골호인이 아니었습니다. 불의를 불의로 어둠을 어둠으로 드러내시는 분이었습니다.
"정의가 이길 때까지,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을 것이다. 이방 사람들이 그 이름에 희망을 걸 것이다."(12:20-21)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고난받는 종은 사람을 아끼는 분입니다. 물건도 아껴야 하지만 우리가 정말 꼭 붙들어야 할 가치는 사람을 아끼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에서 인간은 수단으로 변하고 맙니다. 작년에 일어났던 소위 땅콩 회항 사건은 돈의 전능함에 사로잡힌 이의 단순한 일탈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최근에는 중앙대학교의 이사장인 동시에 두산그룹의 총수인 박용성 회장의 언행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그는 보직 교수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입에 담기도 어려운 폭언을 쏟아냈습니다. 대학 구조 조정에 반대하는 비대위 교수들이 목을 쳐 달라고 하니 인사권자인 자신이 그 목을 쳐주는 게 예의라면서, 그들이 가장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피를 많이 흘리도록 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말입니다. 그의 말에서 우리는 사회 지도층 인사의 어떤 품격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어느 신학대학교 이사장의 막말도 이에 못지 않습니다. 그는 여성 목사들을 가리켜 불만이 꽉 차서 불독 같이 생겼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인간에 대한 예의도 품격도 없는 거칠고 상스러운 말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한 마디로 생명을 아낀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세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강자들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 특권을 누리고 약자들은 무시 당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강자들과 자기를 합일화하면서 약자들의 눈물을 외면합니다. 그들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밀어내려 합니다. 이것은 예수 정신이 아닙니다. 사람을 아끼지 않는다면 무슨 말을 하든 그는 예수와 무관한 사람입니다.
고난받는 종은, 그리고 기독교인은 '정의가 이길 때까지' 싸우는 사람입니다. 남을 제거하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귀히 여기는 세상을 열기 위한 싸움 말입니다. 정의와 공의가 무너진 세상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경건을 가장한 채 이루어지는 종교 행사들을 하나님은 역겨워하신다면서 정의를 요구하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암5:24) '돈'이 모든 가치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면서 세상이 전쟁터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시인 프리드리히 횔덜린의 시가 자꾸 떠오릅니다.
"아! 군중은 시장의 가치를 좋아한다.
그리고 하인은 더 강한 자를 존중할 뿐이다.'
신에게 양심을 거는 자,
오직 그들만 스스로 진실하게 존재한다."
오직 하나님께만 우리 마음을 들어 올려야 합니다. 느슨해진 우리 마음을 조여 주시고, 팽팽해진 마음은 늦추어 주시는 주님께 자꾸만 마음을 바치십시오. 은밀하게, 그러나 꾸준하게 주님의 뜻을 삶으로 번역하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얼음세포'가 그러한 것처럼 우리는 이 냉랭한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고, 죽음이 일상이 된 세상에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기 위해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거룩한 소명에 삶으로 응답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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