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생명은 죽지 않는다
행3:11-16
[그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 곁에 머물러 있는데, 사람들이 모두 크게 놀라서, 솔로몬 행각이라고 하는 곳으로 달려와서, 그들에게로 모여들었다. 베드로가 그 사람들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어찌하여 이 일을 이상하게 여깁니까? 또 어찌하여 여러분은, 우리가 우리의 능력이나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하기나 한 것처럼, 우리를 바라봅니까?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이삭의 하나님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종 예수를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일찍이 그를 넘겨주었고,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작정하였을 때에도, 여러분은 빌라도 앞에서 그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그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거절하고, 살인자를 놓아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예수의 이름이, 여러분이 지금 보고 있고 잘 알고 있는 이 사람을 낫게 하였으니, 이것은 그의 이름을 믿는 믿음을 힘입어서 된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은 그 믿음이 이 사람을 여러분 앞에서 이렇게 완전히 성하게 한 것입니다.]
• 괴로웠던 사나이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가물었던 대지에 단비가 내렸습니다.
팍팍한 우리 마음에도 은혜의 단비가 내리기를 소망합니다.
사순절의 막바지인 고난주간 내내 마치 이명증처럼 나를 사로잡은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일 때문에 이때에 왔다"(요12:27).
이것은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겟세마네 동산 기도를 요한 공동체에 맞게 변형한 것입니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아버지의 뜻이면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달라'는 기원과
'그러나 내 뜻대로 되게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하여 주십시오' 하는 기원이 중첩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것이 기원이 아니라 독백의 형태로 변형되어 나타납니다.
말할 수 없는 내적 고통에 사로잡힌 예수님은 먼저 아버지께 그 시간이 주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할까 하고 생각합니다.
고통을 회피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예수님 역시 살고 싶어하는 생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마치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기라도 할 듯이 단호하게 말합니다.
"아니다, 나는 바로 이 일 때문에 왔다." 본능의 이끌림을 떨치고 자기 운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입니다.
니체는 '아모르 파티'(amor fati), 즉 자기 운명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아름다운 생의 비결로 제시한 바 있습니다.
인간의 인간다움은 여기서 발생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을 떨치고 자기 생명을 기꺼이 하나님 앞에 혹은 역사의 제단 앞에 올려놓습니다.
윤동주는 <십자가>에서
"괴로웠던 사나이,/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십자가가 허락된다면//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하고 노래합니다.
윤동주에게 예수는 괴로웠지만 행복한 사람입니다.
자기의 피를 기꺼이 바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주간 내내 내 마음을 사로잡은 영상은 밀라노의 스포르체스코성(城) 박물관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작품 <론다니니의 피에타>였습니다.
하얀색 대리석으로 된 이 작품은 미완성입니다. 그래서 투박해 보입니다.
조화와 균형으로 빚어진 형체의 아름다움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젊은 시절 미학적 이상에 따라 작품을 만들던 미켈란젤로가 말년에 그렇게 투박한 작품을 만든 것은
인생의 쓴맛과 단맛을 다 겪고 난 후였기 때문일 겁니다.
미학적 형식과 법도를 다 내려놓고 그는 인간의 실상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시신으로 변한 아들 예수를 뒤에서 부둥켜안고 있습니다. 저절로 굽은 등은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 그런데 그 작품을 가만히 보면 마치 죽은 예수가 슬픔에 잠긴 어머니를 업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미켈란젤로가 의도한 것이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부둥켜안아 일으키려 하고, 아들은 어머니의 슬픔을 무게를 오히려 짊어지고 있습니다. 나는 이것이 십자가의 신비라고 생각합니다.
• 해님 달님
4월 들어 우리는 또 다른 피에타를 보고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 1주기를 앞둔 유가족들의 모습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피에타가 아닙니까?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에 닥쳐온 재난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 주가 말한다. 라마에서 슬픈 소리가 들린다. 라헬이 자식을 잃고 울고 있다. 자식들이 없어졌으니, 위로를 받기조차 거절하는구나"(렘31:15). 우리 시대의 라헬들은 위로 받기조차 거절한 채 광화문에서 삭발을 한 채 울고 있습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일부 언론이 보도하는 것처럼 많은 보상이 아닙니다. 왜 자기 자식들이 혹은 가족들이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 진상을 규명해 달라는 것입니다. 금요일에 돌아오겠다고 집을 떠난 자식들이 왜 영원히 돌아올 수 없게 되었는지 밝혀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무고한 죽음이 일어나지 않는 안전한 세상을 만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리한 요구가 아닙니다. 당연한 요구입니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은 국민들이 안심하며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광화문에 있는 세월호 유족들의 한이 풀리지 않는 한 우리는 부활의 기쁨을 마음껏 노래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 주일 저녁에 제 친구인 김민웅 박사의 인문학 공연인 <동화독법 토크 콘서트>를 보러 갔습니다.
그는 우리가 아이들에게 읽어주는 혹은 읽게 하는 동화 속에 담긴 심오한 속뜻을 풀어주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한국인들이 가장 잘 아는 전래 동화 '해님 달님 이야기'입니다. 어느 산골에 사이좋은 오누이와 엄마가 살고 있었습니다. 가난했던 엄마는 날마다 일하러 갔다고 저녁이 되어서야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엄마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사실 엄마는 오누이에게 줄 떡을 가지고 돌아오다가 호랑이를 만나 떡을 다 빼앗기고 또 잡아먹히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호랑이의 그 거짓말을 잘 압니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호랑이는 엄마의 옷까지 입고 오누이가 사는 집으로 가서 목소리를 그럴싸하게 꾸민 채 문을 열어 달라고 합니다. 이상하다는 낌새를 알아챈 오누이는 뒷마당 우물가에 있는 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호랑이가 도끼로 나무를 찍으며 올라오자 오누이는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립니다. 그러자 동아줄이 내려와서 그 줄을 잡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호랑이도 다른 동아줄을 잡고 오누이를 추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썩은 동아줄이어서 줄이 끊어졌고 호랑이는 죽고 맙니다. 하늘에 올라간 오누이 가운데 오빠는 달님이 되고 동생은 해님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 동화에서 호랑이는 사람들을 가혹하게 착취하고 억압하는 관리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거짓과 폭력으로 백성들을 괴롭히지요. 하지만 하늘은 그 억울함을 알기에 그 상황을 역전시키십니다. 박해받던 이들이 오히려 세상을 밝히는 해와 달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다가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세월호에 갇힌 아이들에게는 하늘에서 밧줄이 내려오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겪었을 공포와 절망을 생각하니 지금도 제 가슴이 미어지는데 그 가족들이야 새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어쩌면 죽어간 이들을 해님과 달님으로 바꾸는 것이 우리의 과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쉽게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을 기억 속으로 자꾸 호명해야합니다.
• 오늘 여기에서 경험하는 부활
죽임을 당했던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매해 반복하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신앙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 앞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 걸인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운 그 이후의 사건을 보여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자들이 있는 솔로몬 행각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무지한 백성들이 공모하여 예수를 죽음으로 내몰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병이 나은 사람은 자기 자리를 털고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는 '일어선 사람'이 되었습니다. 일어서는 것이야말로 부활의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정신이 들어가면 사람은 무기력의 자리를 털고 일어나게 됩니다. 직립의 사람이 됩니다. 자기만 알고 살던 사람이 이웃들을 돕기 위해 안일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믿는 이들의 몸과 마음속에서 지금도 일어나고 계십니다.
부활은 관념이나 추상적 신학 이론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슴 떨리는 삶의 진실입니다.
예수를 통해 드러난 참 생명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에 사로잡힌 이들의 삶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속이는 사람 같으나 진실하고, 이름 없는 사람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사람 같으니,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징벌을 받는 사람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고후6:8b-10).
부활은 믿는 이들에게 주어질 미래완료형 보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살아내야 할 현실이요 과제입니다.
우리가 예수 정신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영원에 접속된 행복한 사람입니다.
해와 달로 변한 그 오누이처럼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을 불멸의 존재로 되살리는 것은 우리들의 책임입니다.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사람들을 조롱하거나 모독하는 일은 악마적입니다.
고통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죽임 당한 어린양이 우주의 중심에 있다는 고백에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이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과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모든 교회에,
그리고 여전히 신음하고 있는 이들 위에 늘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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