뭇 민족의 빛
사49:1-7
[너희 섬들아,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너희 먼 곳에 사는 민족들아, 귀를 기울여라. 주님께서 이미 모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태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다.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셔서, 나를 주님의 손 그늘에 숨기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로 만드셔서, 주님의 화살통에 감추셨다.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아, 너는 내 종이다. 네가 내 영광을 나타낼 것이다." 그러나 나의 생각에는, 내가 한 것이 모두 헛수고 같았고, 쓸모 없고 허무한 일에 내 힘을 허비한 것 같았다. 그러나 참으로 주님께서 나를 올바로 심판하여 주셨으며, 내 하나님께서 나를 정당하게 보상하여 주셨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주님께서는 나를 그의 종으로 삼으셨다. 야곱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고 흩어진 이스라엘을 다시 불러모으시려고, 나를 택하셨다. 그래서 나는 주님의 귀한 종이 되었고, 주님은 내 힘이 되셨다.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내 종이 되어서,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고 이스라엘 가운데 살아 남은 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은, 네게 오히려 가벼운 일이다. 땅 끝까지 나의 구원이 미치게 하려고, 내가 너를 '뭇 민족의 빛'으로 삼았다." 이스라엘의 속량자, 거룩하신 주님께서, 남들에게 멸시를 받는 사람, 여러 민족들에게 미움을 받는 사람, 통치자들에게 종살이하는 사람에게 말씀하신다. "왕들이 너를 보고 일어나서 예를 갖출 것이며, 대신들이 또한 부복할 것이니, 이는 너를 택한 이스라엘의 거룩한 하나님, 신실한 나 주 하나님 때문이다."]
• 소명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꽃샘추위가 있었지만 산수유는 꽃망울을 터뜨렸고, 함박꽃나무도 싹을 밀어올렸습니다. 오는 봄을 막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고난받는 종의 노래 제2곡에 속합니다.
노래는 '섬들'과 '먼 곳에 사는 민족들'을 부르는 말로 시작됩니다.
섬들은 물론 지중해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여러 민족들을 일컫는 말일 것입니다. 고난받는 종은 그들에게 귀 기울여 들으라고 요구합니다.
그는 자신의 소명이 얼마나 압도적이고 근본적인지를 밝힙니다.
"주님께서 이미 모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태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다"(1b).
성경에는 이와 유사한 고백이 많이 나옵니다.
바울 사도는 "나를 모태로부터 따로 세우시고 은혜로 불러주신"(갈1:15)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박해자로 살았던 사람이기에 그의 고백은 더욱 절실합니다.
소명받은 이들이 말하는 '모태로부터'라는 말은 선택의 시기를 이르는 말이 아니라 선택과 부르심의 급진성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경우에는 부르심의 양태가 좀 다르게 나타납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선포하듯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서 짓기도 전에 너를 선택하고,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너를 거룩하게 구별해서,
뭇 민족에게 보낼 예언자로 세웠다."(렘1:5)
소명을 받은 이들은 한결같이 자기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택하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저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내가 그 길을 선택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은혜에 깊이 들어가면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됩니다.
사실 소명 받은 자로 산다는 것이 힘겨울 때가 많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친구와 가족들도 멀어지고,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었다고 탄식합니다.
주님의 구원 역사를 위해 부름받은 사람들은 세상의 유력자들이 보기에 무력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명은 은총입니다. 이렇게도 작은 우리가 크신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 말씀의 담지자
하나님은 부르신 자들을 훈련시키십니다.
훈련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노아 시대에 폭력과 부패로 얼룩진 세상을 보시며 사람 지으신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란 그런 하나님의 마음 아픔을 깊이 알아차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심정이 통하면 마땅히 해야 할 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하나님의 입이 되어 세상이 들어야 할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고난받는 종도 같은 사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셔서, 나를 주님의 손 그늘에 숨기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로 만드셔서, 주님의 화살통에 감추셨다."(49:2)
하나님의 말씀은 하루하루 먹고 사는 일에 몰두하느라 둔감해진 우리 마음을 베고 찌릅니다.
참 사람됨의 길을 알면서도 그 길을 걷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한사코 어긋난 길로 달려가곤 하는 우리를 꾸짖으십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당신의 언어의 특징을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내 말은 맹렬하게 타는 불이다. 바위를 부수는 망치다"(렘23:29)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허섭쓰레기를 태우는 불이고, 굳어진 우리 마음을 깨뜨는 망치입니다.
이 말씀과 만나야 우리가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결에 갑각류를 닮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단단한 껍질을 만들고 삽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달콤한 말, 부드러운 말, 듣기에 좋은 말, 재미있는 말에만 집착하면
우리는 여전히 옛 삶의 인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욕망 언저리를 바장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찔려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실상과 만나야 합니다.
교양으로 포장하고 있지만 우리가 얼마나 자기 중심적인 사람인지가 드러나야 합니다.
온갖 불의와 악행과 탐욕과 악의에 사로잡혀 있음을 아프게 절감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히4:12)
주님은 이런 말씀의 담지자들을 당신의 손 그늘에 숨기시고, 화살통에 감추십니다.
말씀을 받은 자들은 아무 때가 사람들을 찌르거나 베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시간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 때나 말씀의 칼을 휘두르고 활을 쏘아대면 안 됩니다.
옛날에 권투 경기를 중계하는 이들이 자주 하던 말이 생각납니다.
'마음이 급하다고 큰 주먹만 휘두르면 안 된다. 강약이 섞여야 한다.
큰 주먹만 맞으면 내성이 생긴다'. 꼭 들어맞는 말인 줄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이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상처입은 백성들을 한없이 따뜻한 말로 위로하셨지만,
위선적인 사람들은 매우 단호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잠언 기자는 "경우에 알맞은 말은 은쟁반에 담긴 금사과"(잠25:11)라고 말했습니다.
• 절망감 속에서도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들은 깊은 절망감을 맛보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씁쓸하지만 피하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사람들은 듣기 싫은 말에는 귀를 닫습니다.
이사야는 그래서 '우리가 전한/들은 것을 누가 믿었느냐?'(사53:1)고 탄식했습니다.
이것은 모든 예언자들의 공통적인 경험입니다.
선포된 말이 공중을 떠돌다 흩어지는 느낌을 받을 때마다 깊은 상실감이 찾아듭니다.
주님은 "너는 내 종이다. 네가 내 영광을 나타낼 것이다"(49:3) 말씀하셨지만,
영광 대신 찾아오는 것은 씁쓸한 자괴감입니다.
"그러나 나의 생각에는, 내가 한 것이 모두 헛수고 같았고, 쓸모 없고 허무한 일에 내 힘을 허비한 것 같았다."(4a)
지난 주중에 '목회 멘토링 컨퍼런스'에 다녀왔습니다. 누군가의 멘토가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사람인지라
이런 모임에 가는 것을 꺼렸지만 거듭되는 요구를 거절하는 것 또한 오만인 것 같아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동참했습니다.
개척교회를 하고 있거나 준비를 하는 목회자들, 중견 목회자 100여 명이 모여서 시종일관 진지하고 뜨거운 은혜의 시간을 나누었습니다.
강의를 하고 또 묻는 말에 답하기도 했지만, 저는 어렵게 목회하고 있는 동역자들의 이야기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3년 7개월 동안 남편과 둘이서 새벽 기도를 올리는 개척교회 목사 아내라고 자신을 소개한 한 사모님은 가난하고 조촐하지만
자신은 지금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증언을 이어가다가 울컥 눈물을 쏟기도 했습니다.
그분들이 겪었을 눈물과 아픔이 가슴 저릿하게 다가왔습니다.
그 사모님은 어려움을 겪는 동역자들과 만나면서 서로를 격려할 수 있어 참 좋았다면서,
이제는 그분의 처분에 맡길 뿐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큰 나무 아래에는 큰 그늘이 생기고 작은 나무 아래에는 작은 그늘이 생기는 것처럼,
남을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지금 주어져 있는 삶의 자리에서 누군가의 그늘이 되어 주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크기의 신화에 사로잡힌 이들이 보기에 그들은 실패자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얼마나 성실하게 주님의 소명을 받드느냐입니다.
'내가 한 것이 모두 헛수고 같았고, 쓸모 없고 허무한 일에 내 힘을 허비한 것 같았다'는 고백은
이 척박한 땅에서 희망을 일구려고 애쓰는 신실한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겪는 회의입니다.
예언자는 어쩌면 패배 혹은 실패를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전해진 말씀이 사람들 속에서 작동되지 않는다고 하여 낙심할 필요 없습니다.
말씀이 살아 있기만 하다면 때가 되면 그 말씀 스스로 일을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패배자처럼 보여도 하나님은 패배하지 않으십니다.
십자가는 예수적 삶을 향해 죄로 얼룩진 세상이 외친 '아니오'였습니다.
하지만 부활은 예수적 삶을 향해 던져진 하늘의 '예'입니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대지를 뚫고 새싹이 돋아나는 모습을 보면 장엄하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가장 작고 여린 것이 크고 단단한 것을 이깁니다.
연초록빛 혹은 노란빛, 보랏빛 새싹을 보노라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어떠한지를 조금은 깨닫게 됩니다.
• 새로운 소명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일까요?
고난받는 종은 자기 삶을 기쁘게 수용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주님께서 나를 올바로 심판하여 주셨으며, 내 하나님께서 나를 정당하게 보상하여 주셨다."(4b)
4절의 앞부분의 시제가 현재완료형인데 비해 뒷부분은 현재형입니다.
고난받는 종은 자기 연민에서 빠져나와 자기 삶을 직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편에 계시다는 확신이 그를 당당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이제 그를 새로운 소명의 자리로 부르십니다.
그래서 5절은 소명 이야기를 다시 한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절묘한 구성입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주님께서는 나를 그의 종으로 삼으셨다.
야곱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고 흩어진 이스라엘을 다시 불러모으시려고, 나를 택하셨다.
그래서 나는 주님의 귀한 종이 되었고, 주님은 내 힘이 되셨다."(5)
소명의 재확인입니다.
그는 이제 자기 스스로를 하찮게 여기지 않습니다.
"나는 주님의 귀한 종이 되었고, 주님은 내 힘이 되셨다".
어찌보면 오연(傲然)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는 짐짓 겸손한 체 할 생각이 없습니다.
프란체스코 성인은 인간을 가리켜 '진흙 등불'이라 했습니다.
인간은 진흙과 같은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빛을 모셨기에 등불입니다.
어린 시절 반딧불이를 잡아 호박꽃에 넣은 후 꽃잎을 오므린 채 휘휘 돌리던 기억이 납니다.
반딧불이 때문에 호박꽃이 꽃등을 켠 것처럼 환해지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좋아했던지요?
이게 우리의 자화상이 아닐까요?
주님을 모신 사람은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
남들 앞에서 젠체하며 산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들의 눈치나 보는 노예가 아니라
스스로 주체로 살아가는 자유인이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패배자로 여겼던 하나님의 종들을 새로운 소명의 자리로 회복시켜 주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소명을 확장해 주십니다.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켜 세우고 이스라엘 가운데 살아 남은 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은 오히려 네게 가벼운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땅 끝까지 나의 구원이 미치게 하려고, 내가 너를 '뭇 민족의 빛'으로 삼았다."(6b)
잘나서가 아닙니다. 진실하기 때문입니다. 유능해서가 아닙니다. 자기의 약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죄가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기의 죄를 진심으로 아파하기 때문입니다.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잘 엎드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들을 통해 땅 끝까지 당신의 구원이 미치게 하려 하십니다. '땅 끝'은 물론 거리상으로 먼 곳을 뜻합니다. 하지만 오늘의 상황에서 '땅 끝'은 벼랑 끝에 내몰린 이들을 뜻하는 말이 아닐까요? 우리 사회의 그늘진 곳에 머물면서 스스로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이들의 삶의 자리야말로 땅 끝입니다. 그 땅 끝에 서 있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부모의 돌봄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된 아이들, 홀로 외롭게 지내고 있는 농어촌의 노인들, 도시 빈민들, 거리로 내몰린 노동자들, 경쟁에 지친 채 거칠어져 가고 있는 청소년들, 취업의 문 앞에서 번번히 좌절한 채 낙심하는 청년들,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여성들, 자식을 잃고 울고 있는 이 땅의 라헬들, 전쟁과 테러의 희생양이 된 사람들…. 하나님은 바로 그런 자리에 당신의 종들을 보내십니다. 아니, 먼저 그곳에 가셔서 당신의 종들을 부르십니다. 교회가 있어야 할 자리는 바로 그런 곳입니다. 가능하면 그런 자리에 자꾸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형편이 아니라면 그런 자리에 서 있는 이들과 연대해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 시대 양심의 촉수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추문거리가 된지 이미 오래이지만 교회가 공신력을 회복하는 길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자신의 본질에 충실하면 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는 세상살이에 지친 사람들에게 사람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자꾸만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높아짐이 아니라 낮아짐을 통해 세워집니다. 부유함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꾸만 자기를 내어줌을 통해 든든히 서 갑니다. 교회는 물질이 지배하는 나라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언해야 합니다. 교회가 빛을 잃은 것은 부유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를 땅 끝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편안함에 길들여진 우리는 그런 부름 앞에서 머뭇거리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서 있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한달음에 달려나가지는 못한다 해도 다만 한 걸음씩만이라도 주님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사순절 순례 여정을 통해 우리의 굼뜬 몸과 마음이 새로와져 주님이 앞서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 걷는 용기가 회복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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