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요14:1-7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고 너희에게 말했겠느냐?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내가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에게로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도마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제 너희는 내 아버지를 알고 있으며, 그분을 이미 보았다."]
• 어떻게 주님은?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한국교회가 탈핵 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2011년 3월 11일에 벌어진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를 기억하자는 취지에서 제정되었습니다. 후쿠시마 사고는 핵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위험인지를 인류에게 상기시켰습니다. 지금도 우리나라에서는 수명을 다한 월성 1호기의 재가동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만, 기독교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당장의 이익이 아니라 생명의 관점에서 사태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1:28)는 주님의 뜻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위험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생명 원리가 아니라 이익 원리가, 사랑의 논리가 아니라 증오의 논리가 지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난 주중에 일어난 미국 대사 마크 리퍼트 피습 사건은 많은 이들의 공분을 사고 있습니다. 한 극단적 민족주의자에 의해 저질러진 이 사건의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 알 수 없습니다. 폭력에 대한 논의는 충분한 숙고가 필요합니다. 폭력은 매우 다양한 형태로 자행되기 때문입니다. 객관적 폭력도 있지만 상징적 폭력, 구조적 폭력도 있습니다. 폭력이 평화로 위장된 채 나타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옳음에 대한 과도한 확신이 타자에 대한 폭력으로 나타날 때 그는 악마의 손에 쥔 칼이 될 때가 많습니다. 저는 이번 사건을 보면서 4세기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였던 성 크리소스톰이 마태복음 강론 가운데서 한 말이 떠올랐습니다.
"우리가 양으로 남아 있는 한 우리는 승리할 수 있다. 비록 우리가 늑대 천 마리에 에워싸인다 할지라도, 우리는 정복하고 승리한다. 그러나 우리가 늑대가 되는 즉시 우리는 패배한다. 우리는 늑대를 기르지 않고 양을 기르는 목자의 지지를 잃기 때문이다."(마태복음 강론 34에서)
경칩이 지나 봄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지만 이런 저런 일들로 인해 우리는 여전히 칼바람 앞에 서 있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여전히 이 시대의 모순과 어둠을 짊어지고 고난의 길을 걷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주님은 어떻게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당신을 팔아넘길 것을 아시면서도 그들의 발을 닦아주셨을까?" 주님이 유다의 발을 닦아주기를 거절했다는 말이 없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그의 발도 닦아주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나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고 다니는 사람을 만나면 아무리 내색하지 않으려 해도 눈빛이 살짝 흔들리곤 합니다. 마음은 숨길 수 있을지 몰라도 몸까지 제어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유다의 발을 닦으면서 주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어쩌면 기도를 올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이 사람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자기가 하는 일을 모릅니다.' 주님은 끝까지 그가 돌이키기를 기원했을 겁니다. 가없는 사랑입니다. 증오와 배신으로도 무화시킬 수 없는 사랑입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당신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할 것을 알면서도 사랑으로 응대해주셨습니다.
이런 짐작이 가능한 것은 13장 1절 때문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는,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여기에 나오는 '끝'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텔로스'입니다.
목적의 완수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끝끝내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게 주님의 소명인 셈입니다.
주님은 일찍이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주신 사람을 내가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요6:39)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거룩한 사명이 주님을 미움으로 몰아가지 않은 겁니다.
주님은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베드로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나중에는 따라올 수 있을 것이다"(요13:36)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아직은 베드로의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푸른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하지 않으십니다(緣木求魚).
우물에 가서 숭늉을 찾지 않으십니다.
모든 것이 때가 있는 법입니다.
주님을 통해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고전13:7)
• 근심하지 않는 삶
주님은 그러나 제자들에게 미구에 벌어질 일을 숨기지 않으십니다.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당신을 팔 것이고, 베드로가 당신을 모른다고 할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십니다. 책망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 사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겁니다. 서로를 의심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겠지요.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그들을 위로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고 너희에게 말했겠느냐?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내가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에게로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14:1-4)
주님은 근심하지 말라 하십니다. 근심의 뿌리는 불확실함입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근심스러운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예 근심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성격이 다를 뿐입니다. 바울 사도는 근심 혹은 마음 아픔을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하는 것은, 회개를 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일로 마음 아파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고후7:10)
주님은 근심하지 말라 하실 뿐만 아니라 스스로 근심하지 않으십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이미 꿰뚫어보고 있고, 또 그것을 회피할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근심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주저 없는 내맡김입니다.
저는 사하라 사막에서 무슬림들을 섬기며 살다가 살해당한 샤를 드 푸코의 기도를 좋아합니다.
나의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바치오니
당신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저를 어떻게 하시든지
감사드릴 뿐입니다.
저는 무엇이나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저와 모든 피조물에게서 이루어진다면
그 밖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다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샤를 드 푸코의 자세는 분명합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면 '무엇이나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위험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단단히 자신을 비끄러맨 사람은 이처럼 당당합니다. 사막의 건조함이 모든 것을 말려버리듯이 그는 모든 감상과 자기 연민을 내려놓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만 받드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자기 연민에서만 벗어나도 삶이 조금은 자유로워집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의 별명 가운데 하나가 '근심하지 않는 자'였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위해 마련한다는 '있을 곳'을 꼭 장소적 의미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개시된 생명의 세계, 자유의 세계입니다. 시인 정현종 선생은 <한 그루 나무와도 같은 꿈이>라는 시에서 방이 많은 집을 짓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곳은 '무정부적인 감각들의 절묘한 균형으로/집 전체가 그냥 한 송이의 꽃인 그러한 곳'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함께 살고 싶은 사람들을 열거한 후에, 그곳에 들이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열거합니다. '자기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사람', '어떤 경우에도 괴로워하지 않는 사람', ' 도대체 슬퍼하지 않는 사람', '모르면서 씩씩한 단세포'가 그들입니다. 시인의 꿈과 주님의 꿈이 똑같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상당 부분 유사하지 않을까요?
• 주와 함께 걷는 길
주님이 앞서 가신다는 그곳에 이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도마가 우리를 대신하여 주님께 여쭈었습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14:5) 주님은 아주 분명하게 대답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14:6)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구절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나는/내가 ~이다"라는 형태로 당신에 대해 언급하신 게 일곱 번 나옵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6:35, 48),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10:7),
"나는 선한 목자이다"(10:1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15:1).
'나는 ~이다'(에고 에이미)라는 문구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자신을 드러낼 때 사용하던 표현입니다.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사이에서 모세에게 당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은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말은 실제로는 '나는 나다'라는 뜻인데,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규정될 수 없다는 뜻일 겁니다.
세상의 어떤 술어로도 하나님을 오롯이 다 드러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일부분만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욥도 긴 번민의 시간을 보낸 후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욥42:3)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요한은 하나님께만 적용되던 그 구절을 빌어다 예수님의 자기 진술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계시자로 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구절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 입니다.
배타적인 신앙을 가진 이들은 이 말을 금과옥조로 삼아 다른 종교인들이나 믿지 않는 이들을 배척합니다.
그들은 정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하신 그 뜻을 알고 있는 것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길은 십자가의 길이고,
진리는 성육신의 진리이고,
생명은 부활의 생명입니다.
길은 걷기 위해 있는 것이지 찬탄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이들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오래 전 군대에 있을 때 병사들의 관물대에 적혀 있었던 말이 생각납니다. 제일 인상적인 것은 '세월아 구보하라, 청춘은 동작 그만'입니다. 또 있습니다. '군인의 길, 비포장도로'. 이 말을 패러디 해보면 '신자의 길, 십자가의 길'이 될 겁니다.
십자가의 은총으로 구원받았다는 고백만 반복하고 있어 한국교회가 망가졌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이 진리라고 수없이 외쳐도 우리가 그 진리를 몸으로 살아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교회 전통은 예수님을 가리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관념이 아닙니다. 주님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의 구체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이라고 고백하는 이들은 그 생명을 살아내야 합니다.
죽어도 죽지 않는 부활의 생명에 붙들려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는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물론 '나'는 2천 년 전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그 예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 '나'는 동시에 십자가의 길, 성육신의 진리, 부활의 생명을 체현한 존재를 가리킵니다. 그렇게 본다면 그런 삶을 살지 않으면서 예수님 덕분에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사명을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요10:10).
예수를 믿는다는 것,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다른 것 아닙니다.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생명 중심의 사고로 전환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생명과 파멸'의 갈림길 앞에 서 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께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14:5)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 가시는 길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분의 뒤를 따르려면 생명을 선택하는 용기를 내야 합니다.
생명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 불편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장의 편리함과 풍요로움을 위해 생명을 망가뜨리는 것은 역사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큰 죄입니다.
사순절 순례 여정을 통해 평화와 생명의 감수성이 깊어지기를 빕니다.
그리고 예수와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걷고,
성육신의 진리를 살아내고,
부활의 생명을 한껏 누리며 살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김기석목사(청파교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구를누구를 본받을까?[빌3:17-21] (0) | 2015.03.28 |
---|---|
뭇 민족의 빛 (0) | 2015.03.20 |
두려움과 용기 사이 (0) | 2015.02.13 |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잠16:1-9] (0) | 2015.02.13 |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0) | 2015.0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