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잠16:1-9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 사람의 행위는 자기 눈에는 모두 깨끗하게 보이나, 주님께서는 속마음을 꿰뚫어 보신다.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기면,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그 쓰임에 알맞게 만드셨으니, 악인은 재앙의 날에 쓰일 것이다. 주님께서는 마음이 거만한 모든 사람을 역겨워하시니, 그들은 틀림없이 벌을 받을 것이다. 사람이 어질고 진실하게 살면 죄를 용서받고, 주님을 경외하면 재앙을 피할 수 있다. 사람의 행실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 그의 원수라도 그와 화목하게 하여 주신다. 의롭게 살며 적게 버는 것이, 불의하게 살며 많이 버는 것보다 낫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앞길을 계획하지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 꿈이 뭐예요?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인생을 길에 빗대어 말하길 좋아 했습니다.
가수 최희준님이 부드럽고도 쓸쓸한 음성으로 부르던 '하숙생'을 기억하시는지요?
1964년에 발표된 곡인 데도 여전히 그 생명력을 잃지 않는 것을 보면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와 맞닿아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정일랑 두지 말자/미련일랑 두지 말자/인생은 나그네 길/구름이 흘러가듯 정처없이 흘러서 간다".
어린 시절이었지만 왠지 인생의 쓸쓸한 비애를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특히 2절에 나오는 "강물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 길에"라는 대목에서는 시적 감흥까지 일곤 했습니다.
지금껏 꽤 오랜 세월을 살아왔지만 인생은 여전히 모호합니다.
인생의 각 시기가 내주는 숙제에 응답하며 살다 어느덧 서쪽인 셈입니다.
가끔 신학생들이나 기자들이 찾아와 이야기를 나눌 때가 있습니다. 인터뷰의 말미에 그들이 꼭 묻는 것이 있습니다.
"목사님, 남은 생의 목표가 뭡니까?" 참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하루하루 즐겁게 기쁘게 그리고 성실하게 사는 거요"라고 대답하면
그들은 좀 맥이 빠진다는 표정을 짓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꿈이 없습니다.
저는 바울 사도를 부러워합니다. 그는 자기 인생의 목표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빌3:12-14)
지금 여러분은 10년 전, 20년 전, 30년 전에 상상했던 그 모습으로 살고 계십니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교우들이 농담처럼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세상에, 할 일이 이렇게 많은 데 아직도 한가하게 직장생활이나 하고 있다니."
우리 삶은 언제나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 사이의 긴장 속에서 진행됩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 밖에 없답니다.
'되고 싶은 나'와 '현실의 나' 말입니다.
이 둘이 하나라면 좋겠지만 둘은 대개 불화 속에 있습니다.
• 운명, 필연, 우연
오늘의 본문은 그런 불화 속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1)
한편으로는 옳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쓸쓸해집니다.
아무리 애써 봐도 삶이 의지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현재와 미래를 위해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말라는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계획을 잘 세워야 합니다. 성공이 마치 삶의 목적인양 제시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성공하기 위해서
잘 나가는 사람들을 카피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습관', '성공하는 사람들이 하지 않는 말' 등등. 성공 담론이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성공하려면 미래에 대한 분명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고 합니다.
그 말을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성공'이라는 게 꼭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생의 목적인지에 대해서
한번쯤 검토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성공을 향해 일심으로 달려갔는데 남는 것이 공허함과 외로움 밖에 없다면
그처럼 허망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어제 신문에서 정희진의 칼럼을 읽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는 시인들의 자유분방한 상상력이
세상을 새롭게 만든다면서 '이제는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다'는 말을 재해석할 때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용이 될 필요도 없거니와 ,개천에서 시를 쓰면 된다. 개천이 시궁창이 되었다고?
그렇다면 시로써 개천을 새롭게 하자."(한겨레, 2월 7일 자)
세속적인 성공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 한 우리는 늘 패배자 의식에 사로잡혀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인간은 운명을 피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운명의 여신들의 이름은 모이라moira, 아난케ananke, 티케tyche인데, 그 이름은 각각 '몫', '필연', '우연'이라는 뜻입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몫이 있고, 인생은 필연과 우연을 날실과 씨실로 삼아 짜는 태피스트리라는 말일 겁니다.
그런 운명적인 요소가 분명히 있습니다. 운명은 '사전에 결정된 것'(destiny, Schicksal, Geschick)입니다.
우리가 이 한반도에 태어난 것도, 남자나 여자로 태어난 것도 운명적인 요소입니다.
돌아보면 우연적인 요소 또한 많습니다. 우리 인생의 방향을 바꿔놓는 만남이 그러합니다.
왜 하필 그 때, 그 자리에서, 그 사람을 만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우연입니다.
하지만 그 만남이 우리 인생을 바꿔놓았다면 사람들은 그 만남을 필연으로 간주합니다.
필연은 우연을 통해 실현되고 우연은 필연을 수반하게 마련입니다.
사울은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과 만났습니다.
그것은 우연히 벌어진 사건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거기서 필연을 봅니다.
성경에는 유난히 '택하심을 받았다'는 구절이 자주 나옵니다.
부르심을 받은 순간은 철저히 우연적인 것처럼 보여도,
그것이 영원한 계획 속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기도 합니다.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는 구절은 자칫하면 오해하기 쉬운 말입니다.
지금 비교적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리 되게 하신 것이고, 해도 해도 어려움을 면치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아 그런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이 구절 속에 담긴 속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라는 말이 아닐까요? 2절이 가리키는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의 행위는 자기 눈에는 모두 깨끗하게 보이나, 주님께서는 속마음을 꿰뚫어 보신다."
사람은 누구 하나 예외 없이 자기중심적입니다. 그것은 본능에 가깝습니다.
물론 의지적인 노력을 통해 혹은 은혜를 통해 자기중심주의로부터 해방된 이들도 더러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를 우주의 중심에 놓고 사고를 하게 마련입니다.
그렇기에 아무리 객관적으로 판단한다고 해도 그 판단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저 멀리 서있는 산을 보십시오. 서 있는 자리에 따라서 달리 보이게 마련입니다.
제한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총체적인 인식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순간순간 하나님의 뜻을 여쭙고,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 삶을 자꾸만 비춰봐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십니다. 이사야는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사55:8)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사55:9)
• 주님께 맡긴다는 것
세상에는 우리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참 많이 일어납니다.
하루도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사건 사고를 보면 인생이 갑자기 우울해집니다.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기는커녕 자화자찬에 여념이 없는 전직 대통령을 보면 참 인생이 씁쓸해집니다.
시편 시인들은 악인들이 평안을 누리고 선하게 살려는 이들이 어려움을 겪는 현실을 보면서
하나님의 정의가 어디에 있는가 묻곤 했습니다.
독립 운동가의 후손들은 극심한 가난 속에서 살아가고, 친일파의 후손들은 호의호식 하며 살아가는 현실을 보면
우리도 하나님의 정의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에 비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덧없는 한 순간에 지나지 않기에 우리는 조급합니다.
역사의 변화가 너무 더딘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지혜자는 너무 조급해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그 쓰임에 알맞게 만드셨으니, 악인은 재앙의 날에 쓰일 것이다.
주님께서는 마음이 거만한 모든 사람을 역겨워하시니, 그들은 틀림없이 벌을 받을 것이다."(4-5)
하나님의 시간은 반드시 온다는 말입니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듯이 악은 선을 이길 수 없습니다.
현실이 어둡다 하여도 빛에 속한 사람은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악인이 득세하는 현실로 인해 낙심할 필요 없습니다.
겸허하게 우리의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궁극적으로 새롭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능력과 근기를 따라 잠시 주님의 일을 하다가 갈 뿐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들린 몽당연필이라 했습니다.
큰 일을 하겠다는 생각만 버려도 삶이 수월해집니다.
각자가 서 있는 자리에서 등불 하나를 밝혀드는 마음으로 살면 됩니다.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밭에 가라지가 섞여 있다고 너무 속상해 할 것 없습니다.
가라지는 결국 뽑힐 것입니다. 악인은 재앙의 날에 쓰일 것이라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마음이 거만한 사람을 역겨워하십니다.
우리가 할 일이 있다면 하나님을 철저히 신뢰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는 우리의 노력은 결코 허비되지 않을 것입니다.
잠언 기자가 들려주는 지혜로운 삶의 비결이 있습니다.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기면,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3).
이것은 우리가 주님을 믿기만 하면 욕심껏 세운 모든 계획이 저절로 다 잘 될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께 맡긴다는 말은 의탁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봉헌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주님께 바치는 마음으로 살라는 뜻이 됩니다.
골로새서는 이것을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에게 하듯이 하지 말고, 주님께 하듯이 진심으로 하십시오"(골3:23)라는 말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자신을 바치는 삶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어질고 진실하게 사는 것, 주님을 경외하며 사는 것(6)입니다.
누구를 대하든지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십시오.
상대의 허물에만 집중하지 말고 그 사람 속에 있는 아름다움을 보아내고
또 그것을 호명하여 불러내십시오. 그것이 어진 삶입니다.
진실한 사람이 되십시오. 이익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라
언제라도 안과 밖이 동일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십시오.
그리고 늘 하나님의 뜻을 조회하며 사십시오. 하나님을 인정하십시오.
인생의 성공은 다른 이들과의 비교우위를 통해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어질고 진실한 사람이라면,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산다면
우리는 이미 잘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의롭게 살며 적게 버는 것이, 불의하게 살며 많이 버는 것보다 낫다"(8)는 구절도 같은 사실을 가리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성공의 길을 제시하면서 그것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맹목적인 최선은 우리에게서 행복의 능력을 빼앗아갑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잊게 만듭니다. 옛 중국 시인은 이렇게 탄식합니다.
"인생이란 백년도 채우지 못하거늘,/늘 천년의 시름을 품는구나"(生年不滿百, 常懷千歲憂, 古詩十九首 제15수).
잠시 머물다 가는 인생을 시름에 잠긴 채 보내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시간을 충실히 살아내십시오.
우리는 모두 그분 앞에 서야 할 존재들입니다.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동원하려 하지 말고,
나를 향한 주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늘 자신을 바치며 사십시오.
주님의 은총이 우리를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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