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겔28:11-19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두로 왕을 두고 애가를 불러라. 너는 그에게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너는 정교하게 만든 도장이었다. 지혜가 충만하고 흠잡을 데가 없이 아름다운 도장이었다. 너는 옛날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서 살았다. 너는 온갖 보석으로 네 몸을 치장하였다.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녹주석과 홍옥수와 벽옥과 청옥과 남보석과 취옥과 황금으로 너의 몸을 치장하였다. 네가 창조되던 날에 이미 소구와 비파도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그룹을 보내어, 너를 지키게 하였다 너는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 살면서, 불타는 돌들 사이를 드나들었다. 너는 창조된 날부터, 모든 행실이 완전하였다. 그런데 마침내 네게서 죄악이 드러났다. 물건을 사고파는 일이 커지고 바빠지면서 너는 폭력과 사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서 쫓아냈다. 너를 지키는 그룹이, 너를 불타는 돌들 사이에서 추방시켰다. 너는 네 미모를 자랑하다가 마음이 교만하여졌고, 네 영화를 자랑하다가 지혜가 흐려졌다. 그래서 내가 너를 땅바닥에 쓰러뜨려 왕들 앞에 구경거리가 되게 하였다. 너는 죄를 많이 짓고 부정직하게 무역을 함으로써, 네 성소들을 더럽혔다. 그러므로 내가 네 한가운데 불을 질러 너를 삼키도록 하였으며, 너를 구경하는 모든 사람의 눈앞에서, 네가 땅바닥의 재가 되도록 하였다. 뭇 민족 가운데서 너를 아는 모든 사람이 네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멸망이 너를 덮쳤으니, 이제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 꿈조차 빼앗긴 사람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평화 세상을 향한 우리의 염원은 언제나 상처를 입곤 합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많은 이들의 공분을 산 사건은 인천 연수구의 어느 어린이집에서 벌어진 '구타 사건'이었습니다. 방송에 나오는 CCTV 화면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폭력은 늘 문제이지만 4살 밖에 되지 않은 아이에게 가한 폭력치고는 매우 악마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아이는 물론이고 그 공포스러운 상황을 지켜봐야 했던 아이들, 그리고 그 부모들이 입은 마음의 상처는 어떤 말로도 나을 수 없을 것입니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영유아들을 어린이집에 맡길 수밖에 없는 젊은 부부들은 혹시 우리 아이도 저런 폭력에 노출된 것이 아닌가 하는 잠재적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폭력의 가해자인 그 교사에게 엄정한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또 감정 조절 능력에 문제가 있는 이들을 걸러내지 못하는 시스템의 문제도 되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유아를 돌보는 이들은 정말로 아이들을 사랑하는 이들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사건을 '문제 많은 특정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우리는 구조의 문제에 눈을 감게 되고, 이런 사건은 반복적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영유아들을 돌보는 이들에 대한 처우가 합당했는지, 그들이 감당해야 하는 감정 노동에 대한 배려가 있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은 사람을 난폭하게 만듭니다. 뭔가에 쫓기는 듯한 마음으로 살 수밖에 없기에 감정은 거칠어지고, 타인을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은 점점 줄어듭니다. 마음이 고요하고 따뜻한 사람을 만나기 참 어렵습니다. 마음이 날이 갈수록 날카로워져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만나는 이들을 찌르고 상처를 입히기 일쑤입니다. <미생>이라는 드라마가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고 합니다. '미생'은 바둑 용어라고 하는 데 '완전히 살지는 못한 상태'를 이르는 말이라 합니다. 씁쓸하지만 미생은 오늘의 직장인들의 처지를 보여주는 기호가 되었습니다. 자본주의는 직업을 소명이라 가르쳤던 프로테스탄트 윤리로부터 나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자기 일을 소명으로 여기는 직장인들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직업이 오직 돈벌이를 위한 수단에 불과할 때 진실한 삶과 행복은 늘 유보되게 마련입니다. 통계청의 발표에 따르면 2014년 청년층의 실업률이 9%로 나타났습니다. 또 일자리를 얻는 데 성공한 청년취업자 5명 중 1명은 1년 이하의 계약직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한다고 합니다. 오늘의 청년들은 불온할 기회조차 박탈당한 셈입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가 만들어 놓은 삶의 문법을 해체하고 새로운 문법을 만들어 낼 용기를 발휘하는 젊은이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희망으로 봅니다. 모레면 우리 교회 젊은 부부가 안락한 삶을 뒤로 하고 하나님 뜻 안에서 사는 삶을 모색하기 위한 긴 여정에 오릅니다. 그들의 장도를 마음 깊이 축복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풍요와 안락을 사랑하지만, 그것이 때로는 삶을 망가뜨리기도 하고, 우리로 하여금 삶의 깊은 곳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할 때가 있습니다.
• 아름다운 시절
예언자들은 누구보다도 그러한 현실을 꿰뚫어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에스겔의 눈을 빌어 우리 현실을 가늠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기에 부름을 받은 예언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이 떠난 성전의 비전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지만, 곧 이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려는 하나님의 멋진 계획을 깨닫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주변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도 전했는데, 오늘의 본문은 두로에 대한 예언에 속합니다. 지금의 레바논 땅에 속한 두로는 페니키아 해변의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두로는 원래는 두 개의 섬(27:32)으로 이루어진 땅이었습니다. 하나에는 마을이 들어서 있었고 다른 하나에는 신전이 서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두로의 황금 시기를 이끌었던 히람 왕(주전 969-936년)이 두 섬을 연결시켰습니다. 그리스의 역사가인 헤로도투스는 두로에 있던 헤라클레스 신전의 아름다움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배를 타고 두로에 간 적이 있습니다.
"나는 거기서 엄청난 봉납물로 장식된 신전을 보았는데, 수많은 봉납물 중에서도 특기할 만한 것은 두 개의 뿔기둥이었다. 하나는 순금으로 만들어졌고, 다른 하나는 어둠 속에서도 빛날 정도로 거대한 에메랄드로 만들어졌다."(헤로도토스, <역사> 상권, 박광순 역, 범우사, 184쪽)
헤로도토스는 순금으로 만들어진 기둥과 에메랄드로 만들어진 기둥의 위용에 감탄했습니다. 그 기둥은 예루살렘 성전 앞에 서 있었던 야긴과 보아스를 연상시킵니다. 두로는 알렉산더 대왕이 지중해 세계의 패자로 등극했을 때 제방을 통해 육지와 연결되었고, 그 제방이 수 세기에 걸쳐 확장되면서 반도가 되었습니다. 두로는 백향목과 붉은색 염료의 산지로도 유명했고, 일찍부터 무역업에 뛰어들어 막대한 부를 쌓았습니다. 두로가 얼마나 풍요로운 도시였는지는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에스겔은 두로를 가리켜 '정교하게 만든 도장', '항해자들이 머물던 성읍', '바다에서 세력을 떨치던 성읍'(겔26:17), '흠없이 아름다운 배'(겔27:4)라고 말합니다. 이사야는 '빛나는 왕관을 쓰고 있던 두로'(사23:8)라고 말하고, 그 무역상들은 세상이 우러러보던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나 로마처럼 대제국을 건설한 것도 아니고, 찬란한 문화를 발전시킨 것도 아니지만 두로는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살만한 풍요의 도시였습니다.
• 몰락의 시작
그러나 예언자들은, 특히 에스겔은 두로의 몰락을 선언합니다. 두로 왕에 대한 그의 선언은 간결하지만 결정적입니다.
"네가 마음속으로 신이라도 된 듯이 우쭐대지만,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다."(28:2c)
"네 재산 때문에 네 마음이 교만해졌다."(28:5)
풍요로움은 사람들을 착각에 빠뜨립니다. 자신이 전능하다고 생각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갑질'이라는 말이 널리 통용되고 있는 오늘의 세태를 보십시오. 돈 많은 사람들, 높은 자리에 앉은 이들은 자기들이 누리는 특권에 도취해 있습니다. 자기들의 특권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이들을 보면 마치 모욕을 당한 것처럼 부르댑니다. 사람들을 무릎 꿇리고 폭력을 가하기도 합니다. 소유를 자기 존재와 등치시키는 이들은 어떤 의미에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따지고 보면 그들이 그럴 수 있는 것은 그런 대접에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은 구매력이 있는 이들에게 기꺼이 특권을 부여합니다. 사람들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을 비틀어 돈의 복음을 만들었습니다. '돈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러나 두로 왕에게 내린 선고는 엄중합니다. "네가 마음으로 신이라도 된 듯이 우쭐대지만,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다." 재산이 그를 교만하게 만들었고, 그 교만함은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했습니다. 왕만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질적 가치를 최우선으로 삼는 백성들의 죄 또한 간과할 수 없습니다. 에스겔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물건을 사고파는 일이 커지고 바빠지면서 너는 폭력과 사기를 서슴지 않았다"(16)
"너는 네 미모를 자랑하다가 마음이 교만하여졌고, 네 영화를 자랑하다가 지혜가 흐려졌다."(17)
교역의 규모가 커지고, 분주함에 빠지면서 사람들은 사람됨의 근본을 저버렸습니다. 폭력과 사기를 서슴지 않게 된 겁니다. 약자들은 그 존엄함을 박탈당한 채 수단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수단은 언제든 교체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관계, 정 깊은 관계는 간데없고 서로를 이용하려는 책략만 난무합니다. 자기 이익을 강화하기 위해 폭력을 쓰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교만한 마음에는 지혜가 없습니다. 우리는 두로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잘 압니다.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두로도 강대국인 앗시리아의 괴롭힘을 받았고, 나중에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두로는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했을 때 기뻐했습니다.
"사람아, 두로가 예루살렘을 두고 '아하, 뭇 백성의 관문이 부서지고, 성의 모든 문이 활짝 열렸구나. 예루살렘이 황무지가 되었으니, 이제는 내가 번영하게 되었다'고 말하였다"(겔26:2)
오랜 경쟁관계에 있던 나라가 망한 것을 보고 속 시원히 여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교훈을 몰랐습니다. 춘추전국시대 진(晉)나라의 헌공(獻公)은 괵나라를 치고 싶어 했습니다. 괵을 치기 위해서는 두 나라 사이에 있던 소국 우(虞)나라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헌공은 우왕에게 진귀한 보물을 보내면서 괵나라를 치러 갈 수 있도록 잠시 길을 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신하들이 반대했지만 보물에 눈이 어두워진 우왕은 헌공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결과는 뻔합니다. 괵나라를 치고 돌아오던 길에 헌공은 우나라를 쳐서 복속시켰습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이라는 고사는 우나라의 신하가 한 말입니다.
두로는 오랜 강대국인 애굽을 치기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려는 바벨론의 정책에 의해 제거되고 말았습니다. 성서기자들은 두로의 패망을 정치 외교적인 차원에서 보지 않습니다. 그들의 패망은 죄를 많이 짓고 부정직하게 무역을 함으로써 성소를 더럽힌 죄에 대한 징계라는 것입니다. 이익을 공의보다 앞세우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대한 반역입니다. 이것은 아주 명백한 진리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이렇게 혼란스럽게 된 것은 '진리'와 '공의'가 차지해야 할 자리를 '이익'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두로조차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는 국가라는 역사 인식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마치 에덴과도 같은 곳에서 살게 하셨고, 그룹을 보내 그들을 지키시고 보호하기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교만함의 죄를 저질렀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 대한 보호를 철폐하셨습니다.
• 오늘, 우리 삶은?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자기 마음을 자꾸 하나님께 끌어가지 않으면 우리 또한 교만함에 빠질 수 있습니다. 내가 뭐라도 된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영적으로 위험한 때입니다. 주님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제일 먼저 요구되는 것은 '자기 부인'입니다. 자꾸 움츠러든 채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도 즐겁게 씩씩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작은지를 늘 기억해야 합니다. 교만해지기 쉬운 마음을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인 빈곤에 시달리지 않으려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아름다움을 날마다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주 멈춰 서서 주위에 있는 것들에 눈길을 주십시오. 작고 여린 것들 속에 깃든 신비에 눈을 뜨는 순간 세상의 인력은 줄어듭니다. 이문재 시인의 시구가 떠오릅니다
"별을 올려다볼 때마다/저 별빛 중 하나가/천 년 전에 출발해/이제 막 도착하는 거라고/이제 막 지구를 스쳐가는 거라고/생각해보라."(이문재, <아주 낯선 낯익은 이야기 3> 중에서)
어디 천 년 뿐이겠습니까? 수만 년 전에 출발한 빛이 오늘의 우리 눈에 와 닿는 것도 많습니다. 그런 눈으로 보면 세상은 온통 신비입니다. 그런 신비에 경탄하던 시인은 시를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너와 나는/얼마나 신비롭고/거룩한 것인가." 그 신비 앞에 서면 너와 나를 가르는 장벽들은 사소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은 그분의 사랑에서 배제된 이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서 새 생명을 얻으면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한다'는 찬송 시인(436장)의 고백은 적실합니다.
문제는 자기 마음을 비끌어 맬 큰 기준을 갖지 못한 이들입니다. 마음의 크기는 좁쌀보다 작은 데 물질적으로 풍족한 것은 복이 아니라 화일 때가 많습니다. 인공 낙원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아름다움을 즐기지 못합니다. 전등을 환히 밝히면 달빛을 즐길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밥의 문제를 도외시 할 수 없지만, 밥에만 집착하는 순간 삶은 비루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종교학자인 정진홍 선생님은 청계천이 피난민들의 거주지였던 때의 한 일화를 들려줍니다. 어느 날 그는 옷을 수선하기 위해 얇은 널빤지를 얼기설기 엮어 바닥을 만들고 두꺼운 종이상자로 벽을 세우고 그 한 부분을 잘라 창을 만든 허름한 집에 들어섰습니다. 엉성한 마룻바닥 밑으로 퀴퀴한 냄새가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눈에 띈 것은 창턱에 놓인 녹슨 깡통이었습니다. 깡통에는 채송화가 노란색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때의 감동을 이렇게 전해줍니다.
"저는 그 아주머니께서 길거리에서 깡통을 주워 거기 구멍들을 뚫고 흙을 담고, 어디서 얻으신 것인지 채송화 씨를 뿌리고, 그것을 정성스레 양지 볕에 놓고 물을 주고 키워 마침내 노란 꽃이 피었을 때, 그때 당신이 그 꽃에 담았을 온갖 삶의 애환과 그 꽃에서 피어났을 당신 삶의 추억과 꿈을 어떻게 숨 쉬셨을까 하는 것을 짐작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습니다."(정진홍, <<정직한 인식과 열린 상상력>>, 청년사, p.412-413)
그 아주머니는 궁핍한 시대를 멋지게 살아낸 삶의 시인이 아니었을까요? 정진홍 박사는 그 때부터 그 꽃과 아주머니는 아름다움과 진실함과 착함을 가늠하는 잣대처럼 당신 안에 머물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부자가 되어도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진심으로 이웃을 존중할 줄 모르는 이들은 몰락의 벼랑에 서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교만한 두로 왕을 향해 '너는 신이 아니다' 하신 하나님, 자기들의 부에 도취된 두로 사람들을 향해 '너는 아무 것도 아니다' 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십니다. 그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우리 삶이 건강해지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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