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곧 교회다
막13:1-2
[예수께서 성전을 떠나가실 때에, 제자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건물들입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 두 행렬
종려주일 아침,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종려주일인 오늘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을 향하던 주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순례의 축제인 유월절을 지키려고 수많은 인파가 예루살렘에 몰려 있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로 전락한 지 이미 오래였습니다. 그렇기에 예루살렘은 슬픔의 땅이었습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그런 상황이 끝나고, 이스라엘이 세계의 중심으로 우뚝 설 거라는 민중들의 기대와 소망이 최고조로 증폭되는 것이 바로 유월절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기드론 시내를 건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나귀는 작고 볼품없는 짐승이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짐승입니다. 무거운 짐을 등에 짊어지고 끄덕뜨덕 앞으로 나아가는 나귀를 보면 측은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평소에 나귀를 타고 다녔다는 말이 없는 것을 보면 유월절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은 고도로 연출된 의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상징 행위였다는 말입니다. 예수는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나귀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활용하는 가축이기도 했지만, 왕이 즉위할 때에 사용하는 전례용 짐승이기도 했습니다. 열왕기서의 기자는 솔로몬을 왕으로 옹립한 사람들은 그를 다윗 왕의 노새에 태워 기혼샘으로 데려갔고, 거기서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이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었다고 말합니다. 나귀 혹은 노새를 탄다는 것은 뭘 의미하는 것일까요? 즉위하는 왕이 통치하는 동안 안정과 평화가 깃들기를 기원하는 것일 겁니다. 급할 게 하나도 없다는 듯이 노량으로 걸어가는 나귀를 보노라면 우리 마음의 리듬도 절로 고요해집니다.
나귀가 평화 시기를 상징한다면 말은 전쟁을 연상시키는 짐승입니다. 말 잔등에 올라앉으면 세상이 다 눈 아래로 보입니다. <향수>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정지용 시인의 시 <말>의 화자는 어린이입니다. "말아, 다락 같은 말아/너는 점잔도 하다마는/너는 왜 그리 슬퍼 뵈니?" 말을 다락 같다고 한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다락이 있는 집에서 자란 분들은 아실 겁니다. 다락에는 온갖 진귀한 것이 다 있어서 아이들은 어떻게든 다락에 올라가보려고 애쓰지만 아이들이 오르기에는 그 문턱이 너무 높았습니다. 천진한 아이의 눈에는 말이 다락처럼 보입니다. 높다는 것이지요. 나귀와 말은 그만큼 대조적입니다. 종려주일이면 우리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예수님만 주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나귀 타심의 의미가 제대로 드러나려면 또 다른 행렬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명절은 유대인들에게는 축제였지만 식민 당국자들에게는 정말로 긴장되는 시간이었습니다. 민족 감정이 고양되는 시기였기에 사람들이 언제 폭도로 변할지 모른다는 공포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명절 때가 되면 화려한 깃발을 든 총독의 군인들이 기마부대를 앞세운 채 위풍당당하게 예루살렘을 향해 행진을 했습니다. 일종의 무력 시위인 그 행렬은 사람들의 내면에 공포감을 주입하는 동시에, 반역은 꿈도 꾸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였던 것입니다.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행렬은 그 행렬에 대한 부정 혹은 조롱입니다. 예수님은 폭력이 아니라 비폭력이, 지배가 아니라 섬김이, 경쟁이 아니라 협동이 참 삶의 원리임을 몸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제국의 길과 하나님 나라의 길은 이렇게 어긋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도, 예수를 보고 환호했던 군중들도 그 행진의 참 의미를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은 외로우셨습니다.
• 종교인들의 민낯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의 마음의 고향이었습니다. 그곳에 성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성전 봉헌 때 올린 기도문은 성전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주님의 종인 나와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바라보며 기도할 때에, 그 기도를 들어주십시오"(왕상8:30)라고 청했습니다. 무슬림들이 세계 어디에 있든지 메카를 향해 엎드리는 것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떤 처지에 있든지 성전을 바라보며 기도를 올렸습니다. 다니엘은 다리우스 임금 이외의 어떤 신에게도 기도를 올리면 안 된다는 칙령이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집 다락방에 올라가 예루살렘 쪽으로 나 있는 창문 앞에 앉아 하루에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습니다(단6:10). 그 때문에 그는 사자굴 속에 던져지기도 했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시편 시인도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본다. 내 도움이 어디에서 오는가? 내 도움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주님에게서 온다"(시121:1-2)고 노래했습니다. 이때 그가 말하는 '산'은 북한산 도봉산 설악산 같은 산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 산은 '시온산'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라는 말입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간 예수님은 성전을 둘러보신 후 신적 분노에 사로잡히셨습니다.
민중들의 순수한 열망이 집중된 그 성전은 더 이상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거룩과 정결의 허울 뒤에 숨어 사람들을 착취하는 강도들의 굴혈로 변해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에는 대제사장에 대한 임명권이 로마에 있었기에 대제사장이 되고자 하는 이들은 로마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로비 자금이 필요했고, 그 돈은 순박한 이들의 주머니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높아지기 위해 돈을 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들이 말입니다.
그것은 믿음의 배신이요 자기기만일 뿐입니다. 기득권에 연연하는 이들은 일쑤 '말末'을 붙잡느라 '본本'을 버립니다.
타락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다시 성전으로 돌아가 볼까요? 성전 구역은
사제계급과 결탁한 환전상들과 희생제물로 사용할 수 있는 동물을 파는 상인들로 북적였습니다.
그들은 순례자들의 신심을 자기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이용했습니다.
시세보다 높은 가격으로 제물을 팔았던 것입니다.
그 가운데 일부가 제사장들의 주머니로 들어갔음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예수가 분노한 것은 거룩의 탈을 쓰고 있지만 실은 돈 욕심에 사로잡혀 가난한 이들을 등치고 간을 내먹는 종교인들의 민낯이었습니다.
성전은 공간의 구성 자체가 매우 위계적입니다.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 제사장들이 희생제물을 바치는 성소,
유대인들이 머무는 뜰, 이방인이 머무는 뜰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일종의 칸막이가 있었던 셈입니다.
성전에 들어서는 순간 사람들은 저절로 사제 계급의 권위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간을 사회적 위계에 따라 배분하는 행위는 어디에나 있었습니다. 경복궁에 가 보면 문무백관들이 서열에 따라 서는 자리가 정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 시대의 의궤(儀軌)도 그런 것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의궤란 왕실이나 국가행사가 끝난 후에 그 준비과정, 의식의 진행 절차, 논공행상 등에 관하여 기록해놓은 책입니다. 의궤에는 화공들의 정묘한 그림이 첨가되어 있어 그 당시의 풍습을 눈에 보일 듯 알 수 있기에 매우 중요한 자료입니다. 봉수당진찬도奉壽堂進饌圖(1795년)는 그 가운데서도 아주 유명한 것입니다. 정조가 화성에 가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화갑을 기념한 잔치를 그린 것입니다. 의궤를 보면 잔치 공간은 문이나 휘장을 쳐서 구별되어 있었고, 참석자들은 신분에 따라 일정한 자리에 배치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분질서의 강고함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 권위는 특권이 아니다
그러한 사회적 위계가 필요한 부분도 있습니다. 사사기의 마지막 부분은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하였다"(삿21:25)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권위에 대한 존중은 꼭 필요합니다.
모든 권위가 해체되면 세상은 욕망의 전장이 되고 말 겁니다.
문제는 자기에게 주어진 권위를 공동체를 세우고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주어진 것임을 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권위를 특권으로 바꾸는 일에 익숙합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을 그렇게도 신랄하게 비판했던 것은 그 때문입니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예복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막12:38-40)
예수님은 위선적인 종교인들의 행태를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사회적 존경의 욕구와 경제적 이득입니다. 달리 말해 신심을 가장한 자기 부풀리기 혹은 탐욕 채우기입니다.
마가는 그러한 율법학자들을 경계하라는 교훈에 이어 과부의 헌금 이야기를 배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가 헌금함에 돈을 넣는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많이 넣는 부자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돈 두 닢 곧 한 고드란트를 넣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놓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헌금함에 돈을 넣은 사람들 가운데, 이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모두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을 떼어 넣었지만, 이 과부는 가난한 가운데서 가진 것 모두 곧 자기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막12:43-44)
흔히 이 구절은 헌신을 강조하기 위해 즐겨 선택되는 본문입니다. 특히 교회 건축이나 큰 행사를 계획하고 있는 교회에서 말입니다. 자기 생활비 전부를 봉헌한 과부의 행위는 신심의 본으로 추켜 올려지곤 합니다. 하지만 이 대목은 마가복음 12장 전체의 맥락에서 살펴야 합니다. 앞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율법학자들을 경계하시면서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킨다"고 말씀하셨음을 보았습니다. 여인은 절박한 심정으로 자기 생활비 전부를 봉헌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복을 받는 비결이라고 배웠겠지요. 여인은 그런 신심 행위를 통해 자기 삶도 좀 활짝 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여인의 행위를 기복적이라고 비난하면 안 됩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절박한 그 여인의 마음을 받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가난한 과부의 헌금은 결국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의 배를 채우는 데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과부의 가산을 삼킨다는 말이 가리키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성전은 사람들에게 깊은 위안을 주고, 영혼을 자유롭게 하고, 삶을 풍요롭게 하고, 더 큰 질서 속에서 자기 삶을 조망할 수 있도록 도와줄 때 아름답습니다. 성전을 교회로 바꿔놓아도 마찬가지입니다. 흔히 교회를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가 그것입니다. 각지에 흩어져서 살던 이들이 주일이면 주님께로 나아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올리기 위해서입니다. 예배는 세상의 창조자이시고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기리는 행위입니다. 동시에 예배는 우리의 조각난 마음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음으로써 하나님의 치유를 기다리는 행위입니다. 신앙의 벗들과 함께 드리는 예배를 통해 우리는 홀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재확인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모이는 교회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흩어지는 교회이기도 해야 합니다. 신자들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이웃들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삶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일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가 곧 교회입니다.
• 교회의 교회됨
어느 날 예수께서 성전을 떠나가실 때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건물들입니까!"
높은 건물이 없는 팔레스타인에서 그는 성전 건물의 위용에 놀란 것 같습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 있는 '통곡의 벽'에 가보면 벽을 세우는 데 사용한 돌 크기에 놀라게 됩니다.
기중기도 없던 시절에 그런 돌을 옮기고 또 그것을 돌 위에 겹쳐 놓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 제자는 예수님도 맞장구쳐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대꾸는 냉랭합니다.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13:2).
같은 대상을 보아도 보는 눈에 따라 다른 게 보이는 법입니다.
제자의 눈에는 웅장한 건물이 보였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본질을 잃어버린 성전의 퇴락이 보였습니다.
본질을 잃어버린 성전은 혹은 교회는 그 이름과 상관없이 이미 무너졌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언젠가부터 한국교회는 교회의 본질을 추구하는 일보다 교회성장에 더 매달리고 있습니다.
크기에 집착하는 순간 교회의 교회됨은 훼손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는 지금도 십자가의 길을 향해 나아가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그러하므로 우리도 진영 밖으로 나가 그에게로 나아가서, 그가 겪으신 치욕을 짊어집시다."(히13:13)
그리스도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교회는 아무리 작아도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큰 교회와 작은 교회로 나눌 것이 아니라 산 교회와 죽은 교회로 나누어야 합니다.
사람들을 진심으로 환대해주고, 상처 입은 이들의 품이 되기 위해 몸을 낮춘 교회,
함께 삶을 경축하려는 마음이 넘치는 교회는 참 교회요 산 교회입니다.
그러나 자기만족에 빠진 채 십자가의 길을 외면하는 교회는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해도 무너진 교회입니다.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오늘, 우리는 근본적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참 교회인가?'
'우리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고 있는가?'
순례길의 막바지에 우리는 이 질문에 삶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큰 건물로서의 교회당은 많지만 참다운 의미의 교회는 많지 않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참 교회가 되어야 할 때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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