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의 현실
이미 구원받았기에 더 이상 회개하지 않아도 된다는 가르침은 면죄부보다도 더 악마적인 가르침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교회에 다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암송할 수 있는 구절입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신 까닭은 '이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세월호는 인간의 탐욕이 지배하는 세상의 축약판입니다.
그 세계 속에서 무고한 이들이 속절없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가르칩니다.
하지만 그 복은 우리 욕망의 충족과는 무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평안을 누리며 살기를 바라십니다.
또 우리가 건강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물질적으로도 궁핍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하지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진짜 복은
우리가 경외심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것,
타인들을 배려하며 사는 것,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복은 좀 인기가 없습니다.
오랫동안 교회는 '번영의 복음'을 전하면서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십자가의 복음을 신비화함으로써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예수의 따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은폐했습니다.
고백은 넘치지만 실천은 없는 교회,
하나님께 영광의 박수를 올리자고 말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과는 무관한 삶으로 인도하는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13세기의 성자인 프란체스코는 꿈에 성 다미아노를 만납니다.
왜 잠만 자는가, 프란체스코! 부끄러운 줄 알게! 교회가 위험에 처해 있다네."
당황한 그에게 다미아노는 손을 뻗치고,
어깨로 교회를 받쳐서 그것이 쓰러지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했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성자 프란체스코1>, 열린책들, 2008, p.76 참조)
잠에서 깬 프란체스코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듣고 타락한 교회,
본을 버리고 언어를 취한 교회,
그래서 무너질 수밖에 없는 교회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자기 생을 다 바쳤습니다.
'왜 잠만 자는가?' 하는 성인의 음성이 천둥소리처럼 들려옵니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하나님의 편지라고 말합니다.
송구스러운 표현입니다.
우리는 이런 호칭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아날 수도 없습니다.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 그 이름값을 해야 합니다.
주님은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에 종말을 고하셨습니다.
생명이 존중되고, 모두가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새 세상을 열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고백은 거짓이 될 것입니다.
-김기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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