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쓴 편지
고후3:1-6
(2014/5/4, 교회설립기념주일)
[우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우리 자신을 치켜올리는 말을 늘어놓는 것입니까? 아니면, 어떤 사람들처럼, 우리가, 여러분에게 보일 추천장이나 여러분이 주는 추천장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겠습니까? 여러분이야말로 우리를 천거하여 주는 추천장입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에 적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것을 알고, 읽습니다. 여러분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쓰신 편지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작성하는 데에 봉사하였습니다. 그것은 먹물로 쓴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요, 돌판에 쓴 것이 아니라 가슴 판에 쓴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확신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우리에게서 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격은 하나님에게서 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 옹두리 많은 나무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 설립 106주년을 기념하며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올리고 있습니다. 맨 처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리고 감사의 마음으로 뜻을 모았던 분들이 떠오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뜻'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요한복음은 그것을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요1:1)고 표현했습니다. 106년 된 나무를 머리에 그려 보십시오. 둥치도 커졌고 가지도 볼만하게 뻗었을 것입니다. 품도 제법 넉넉해서 지친 이들을 품어주기에 충분할 겁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꼭 그렇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런 큰 나무의 웅장한 자태에 매혹됩니다. 그런데 제 눈길이 머무는 것은 나무 이곳저곳에 맺혀 있는 옹두리들입니다. 옹두리, 즉 나뭇가지에 병이 들거나 벌레 따위가 파서 결이 맺혀 불퉁해진 혹을 일컫는 말입니다. 옹두리는 온갖 풍상을 겪어온 나무의 흉터입니다. 볼품이 없습니다. 하지만 나무는 그 옹두리 덕분에 죽지 않습니다. 지난 세월, 실수도 많았고, 갈등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인간적인 허물과 약점을 넉넉히 품어 안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겼던 분들의 헌신 덕분에 이 교회는 이렇게 든든히 서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자기가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을 밝히길 꺼려합니다. 조롱거리가 되거나, 왕따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그러신지요? 이럴 때일수록 교회의 본질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제가 자주 언급하는 독일의 루터교 목사 디트리히 본회퍼는 우리가 교회에 그저 다니는 것 말고 교회에 속하여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속한다는 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순례자의 길을 가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에 속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며, 영원으로부터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에 속한다는 것은 혼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란 하나님 안에서 그분의 백성들과 더불어 교제하는 것을 말합니다."(디트리히 본회퍼, <타인을 위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을까?>, 좋은씨앗, 2014, p.31-32)
교회에 속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서 다른 이들과 함께 순례자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 곧 영원으로부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강물이 바다를 향해 흐르듯이 교회에 속한 이들은 모두 영원하신 하나님에게 이끌려 살아갑니다. 홀로 그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함께 걸어갑니다. 분명한 지향점이 있기에 그들은 순례자들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순례자로 살고 계십니까? 어떤 방해물을 만나도 하나님의 마음을 향해 잘 흘러가고 있습니까?
• 추천장
사람들이 모인 곳인지라 교회는 때로는 지친 영혼들에게 품이 될 때도 있지만,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곳이기도 합니다. 고린도교회는 바로 그런 교회의 양면성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일 년 육 개월 동안 그 도시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유대인들로부터 많은 박해를 받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격려가 더 컸기 때문입니다. "무서워하지 말아라. 잠자코 있지 말고, 끊임없이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나의 백성이 많다"(행18:9-10). 고린도교회에 속한 이들은 복음에 잇대어 살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습니다. 내적인 힘도 커졌습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가 떠난 후, 고린도에 들어온 다른 교사들 때문에 교회는 상당히 큰 시련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사도직을 문제 삼았고, 바울의 헌신이 사적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닌가 의심했고, 급기야는 성치 않은 그의 몸에 대한 조롱까지 일삼았습니다. 자기를 그럴싸하게 보이기 위해 버릇처럼 남을 비난하고 깎아내리는 것이 못난이들의 특징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그 때문에 분열되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의 그 재빠른 돌아섬 때문에 마음이 상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기를 변론할 생각이 없습니다. 자기를 그럴싸하게 보이기 위해 근사한 포장지를 사용할 생각이 없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자기 소개서를 써야 할 사람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추천장을 받아 제출해야 할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의 존재 자체가 바울이 누구인지를 가리키는 표지들입니다. 그들은 바울 사도가 마음으로 낳은 자식들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절통한 것은 자식들이 아버지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의심한다는 사실입니다. 요즘 장 전도사님은 아침 회의 때마다 새로 태어난 세 번째 손녀를 자랑하고 싶어 기회만 노립니다. 눈치를 채고 아기 사진을 보여 달라고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빛의 속도로 휴대전화를 꺼내서 사진을 보여줍니다. 사진을 보니 아기 엄마와 아빠의 얼굴이 다 들어있습니다. 참 신기합니다. 이런 것이지요.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자신의 개인적 친분이나 연고만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는 다만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쓰신 편지'(3:3)라고 말합니다. 그 편지의 저자와 발신인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은 자신이 한 일이라고는 그리스도께서 그 편지를 작성하시도록 조금 거든 것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바울의 논리는 점점 깊어집니다. 그 편지는 먹물로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라는 것입니다. 흙으로 빚은 아담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생령이 되게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매 순간 성도들의 가슴에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그들을 새로운 존재로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 편지는 또한 돌판에 쓴 것이 아니라, 가슴 판에 쓴 것입니다. '돌판'은 물론 율법을 가리킵니다. 율법은 우리 외부에 있는 법입니다. 바깥에 있어 우리 행동을 제한하고 규율하고 지시합니다. 그래서 늘 불편합니다. 위반에의 욕구가 스멀스멀 기어나옵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죄의 욕정"(롬7:5)이라 했습니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해 깨닫게도 하지만, 죄로 우리를 이끌어가는 유혹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편지는 돌판이 아니라 가슴 판에 쓴 것입니다. 가슴에 새겨진 것, 즉 내면화된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 속에 내주하여 계시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우리도 원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입니다."(빌2:13)
• 새 언약의 일꾼
이 변화는 놀라운 것입니다. 사람은 본래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은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변화시킵니다. '나 좋을 대로' 살던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이 또 있을까요? 루이스 멈퍼드라는 미국의 문명비평가는 인간의 자아를 셋으로 나눠 설명합니다. 첫째는 기본적 생물적 자아입니다. 욕망에 충실하게 복무하려는 자아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파생적인 사회적 자아입니다. 이것은 양육과 훈련과 교육을 통해 형성되는 자아입니다. 우리가 사회에서 쓰고 있는 가면과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이상적 자아입니다. 자아의 한계를 넘어 더 큰 세계와 접속하려는 마음입니다. 이 세 가지 자아는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문제는 이상적인 자아가 가장 허약하고 불안하다는 사실입니다. 어려움이 닥쳐오면 사람들은 이것을 쉽게 포기합니다. 바로 그것이 타락입니다.(루이스 멈퍼드, <인간의 전환>, 박홍규 옮김, 텍스트, 2011, p.98)
하지만 예수에게 붙들린 사람들은 현실적인 어려움이 닥쳐온다 해도 이상적 자아를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땅의 인력에 이끌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늘의 인력에 이끌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낯선 사람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고전1:18)이라 말했습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몸과 마음에 밴 습성 때문입니다. 그 마음을 자꾸만 닦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 우리 마음을 자꾸만 가져가야 합니다. 물론 마음을 자꾸 살피는 일 또한 중요합니다. 불교에서는 '불법을 들어서 마음을 닦아 가는 것"을 일러 훈습薰習이라 합니다. 그렇게 애써야 조금이나마 맑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도종환 선생은 <섬백리향>이라는 시에서 어느 초등학교에 계신 선생님께 받은 섬백리향을 키우며 '이 꽃처럼 살 수 있다면 하고 생각'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척박한 땅 가리지 않고 아무 곳에서나 잘 자라고/잎 전체에서 나는 향기로 나쁜 벌레 오지 않고/화려하지 않아도 향기가 백 리까지 간다는/이 꽃만큼만 살았으면 싶었다"는 것이지요. 그런 소망이 있었기에 물도 주고 손때도 묻혀 봤지만 결국은 죽이고 말았습니다. 시인은 그 식물을 죽게 만든 것이 무엇인지 가만히 돌아봅니다.
"내 마음 어느 구석에 너무 지나치거나/너무 모자라는 데가 있어서/조급하게 자랑하고 싶거나 은근히/내세우고 싶어서 어린 꽃을 힘들게 하다/공연히 꽃만 죽인 꼴이 되었다"
지나침 혹은 모자람, 조급함, 내세우고 싶은 마음이 그 꽃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향기를 가진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고, 척박한 땅에 살면서 향기롭게 산다는 게 아무나 되는 일이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꽃 이야기이지만 사실은 우리 삶의 이야기입니다. 서두른다고, 원한다고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향기를 품고 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악취를 풍기며 살기란 참 쉽습니다. 한 순간만 방심해도 우리는 악취를 풍기게 됩니다.
• 오늘 우리의 현실
어느 신학교 교수는 지금 한국교회의 신앙이 '구원파'의 신앙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하더군요. 이미 구원받았기에 더 이상 회개하지 않아도 된다는 가르침은 면죄부보다도 더 악마적인 가르침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교회에 다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암송할 수 있는 구절입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신 까닭은 '이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세월호는 인간의 탐욕이 지배하는 세상의 축약판입니다. 그 세계 속에서 무고한 이들이 속절없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가르칩니다. 하지만 그 복은 늘 넘치게 마련인 우리 욕망의 충족과는 무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평안을 누리며 살기를 바라십니다. 또 우리가 건강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물질적으로도 궁핍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하지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진짜 복은 우리가 경외심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것, 타인들을 배려하며 사는 것,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복은 좀 인기가 없습니다. 오랫동안 교회는 '번영의 복음'을 전하면서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십자가의 복음을 신비화함으로써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예수의 따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은폐했습니다. 고백은 넘치지만 실천은 없는 교회, 하나님께 영광의 박수를 올리자고 말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과는 무관한 삶으로 인도하는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13세기의 성자인 프란체스코는 꿈에 성 다미아노를 만납니다. 그분은 누더기를 걸치고 맨발로 지팡이에 의지해 울고 있었습니다. 깜짝 놀란 프란체스코는 달려가 그를 부축하며 말했습니다. "울지 마세요, 하나님의 성자여. 어찌 된 일입니까? 당신은 천국에 계시잖아요, 그렇죠? 그럼 천국에도 눈물이 있다는 말입니까?" 다미아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습니다. "그래, 천국에도 눈물이 있다네. 하지만 그것은 아직도 지상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눈물이지. 나는 자네가 포근한 침대 위에 누워서 평화롭게 자는 모습을 보고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네. 왜 잠만 자는가, 프란체스코! 부끄러운 줄 알게! 교회가 위험에 처해 있다네." 당황한 그에게 다미아노는 손을 뻗치고, 어깨로 교회를 받쳐서 그것이 쓰러지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했습니다.(니코스 카잔차키스, <성자 프란체스코1>, 열린책들, 2008, p.76 참조) 잠에서 깬 프란체스코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듣고 타락한 교회, 본을 버리고 말을 취한 교회, 그래서 무너질 수밖에 없는 교회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자기 생을 다 바쳤습니다.
'왜 잠만 자는가?' 하는 성인의 음성이 천둥소리처럼 들려옵니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하나님의 편지라고 말합니다. 송구스러운 표현입니다. 우리는 이런 호칭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아날 수도 없습니다.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 그 이름값을 해야 합니다. 주님은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에 종말을 고하셨습니다. 생명이 존중되고, 모두가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새 세상을 열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고백은 거짓이 될 것입니다. 교회 설립을 기념하는 이 주일에 우리 모두 나른하던 신앙생활에서 벗어나 긴장감 있는 신앙의 길로 접어들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앞장서 걸으신 그 길을 따라 걷는 동안 우리 모두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맛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