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삼키고
막16:14-18
(2014/4/20, 부활절)
[그 뒤에 열한 제자가 음식을 먹을 때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이 믿음이 없고 마음이 무딘 것을 꾸짖으셨다. 그들이,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나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표징들이 따를 터인데, 곧 그들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으로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며, 독약을 마실지라도 절대로 해를 입지 않으며, 아픈 사람들에게 손을 얹으면 나을 것이다."]
• 절망의 땅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는 오늘, 우리는 차마 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 없습니다. 진도 앞바다에 가라앉은 세월호, 또 그 속에서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을 공포 가운데 바라보았을 사람들, 그리고 그 어린 자식들 생각에 억장 무너지는 슬픔에 잠긴 엄마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슬픔과 분노, 그리고 아픔이 오늘 우리가 불러야 할 기쁨의 노래를 삼켜버렸습니다. 2014년 4월, 주님이 못 박히신 골고다는 바로 저 차가운 바다였습니다. 주님은 그곳에서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이들의 손을 붙들고 계셨습니다. 배가 기울어가고 있을 때 한 아이는 전화로 엄마에게 기도를 부탁하면서 교회 다니는 아이들이 손을 붙잡고 함께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 아빠에게 무서우니 "나 데리러 와"라고 말했습니다. 그 아빠는 어쩌면 영원히 그 말에 붙들린 채 눈물을 흘리며 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은 알았을까요? 주님도 그 자리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물으며 그들 곁에 계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주님은 책임 회피에 급급한 무리들,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하지 않는 이들을 보고 차마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거기서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숨을 거두셨습니다.
우리는 게임에 중독된 철없는 22살 아버지가 게임하러 나가려는데 28개월짜리 아기가 운다고 하여 코와 입을 막아 숨지게 한 사건 소식에 접했습니다. 그 흉악한 애비는 아기를 죽인 후 태연하게 게임하러 나갔습니다. 계모에게 학대받던 아이들의 죽음 소식도 곳곳에서 들려옵니다. 선장과 승무원들은 배와 승객들을 버려두고 제일 먼저 탈출했다고 합니다. 이런 비극과 아픔을 이용해서 스미싱(smishing) 문자를 돌려 개인 정보를 빼내려는 이들도 있습니다. 남들의 피눈물을 자기 이익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이들은 사탄에게 팔린 자들입니다. 이것이 2014년 대한민국의 풍경입니다. 유대인의 전설이 떠오릅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영혼 없는 사람들이 나타날 거라는 것입니다. 이 물질주의 세상이 만들어내는 거짓 행복의 신기루를 좇느라 사람들은 자기 영혼이 황폐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한 주간 내내 그뤼네발트의 그림 <십자가 책형>을 묵상하고, 하이든의 <십자가 위의 마지막 말씀>을 들으며 지냈습니다. 부활절이 다가오는 데도 도무지 할 수 있는 말이 없었습니다. 십자가의 시간은 아직 지나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모두 울고 있는 데 어찌 우리만 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저는 찬양대에게 '할렐루야'를 부르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아직은 그 노래를 부를 때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그릇된 욕망이 만들어낸 이 땅의 참극 때문에 누구보다 아파하실 분이 주님이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너무 쉽게 부활의 영광을 노래하지 말아야 합니다. 깊게 절망하지 않고는 진정한 희망에 당도할 수 없습니다. 정말로 아파하지 않고는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없습니다.
• 제자들의 당혹감
이 참담한 상황 속에서 마가복음이 들려주는 부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마가복음은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을 두 가지 단어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무서워하였다', '믿지 않았다'. 제일 먼저 무덤에 달려간 여인들은 '그는 살아나셨다'는 천사의 증언을 듣고, 무덤 밖으로 뛰쳐나가서 도망하였습니다. "그들은 벌벌 떨며 넋을 잃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무서워서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와 함께 지내던 사람들에게 찾아가 예수가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전했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16:11).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돌아와 제자들에게 그 소식을 전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믿지 않았습니다(16:13).
그런데 열 한 제자가 음식을 먹고 있을 때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믿음이 없고 마음이 무딘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14). 그 꾸짖음은 격노가 아니라 점잖은 책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두려움'과 '불신'은 전대미문의 사건 앞에 선 인간의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주님의 꾸짖음 속에는 애정이 담겨 있습니다. 그 꾸짖음은 그들의 닫힌 마음을 여는 열쇠였습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창조가 그러하듯 인간의 인식과 상상을 뛰어넘는 사건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애정어린 꾸짖음을 통해 그들을 부활의 현실 속으로 초대하셨던 것입니다.
• 새로운 소명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부르셨던 주님은 이제 당혹감에 휩싸인 제자들을 세상을 향해 파송하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나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을 것이다." 세례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 초대 교회의 목소리가 반영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입니다. 전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입증된 하나님 나라의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현실은 지배와 피지배가 갈리고, 섬김을 받는 사람과 섬기는 사람이 갈리지만, 모두가 형제자매의 우애를 누리며 사는 새 세상, 사람들이 서로를 귀히 여기고, 아픔을 나누고, 저마다 자기 몫의 삶을 충만히 누릴 수 있는 세상의 꿈이 가뭇없이 스러지지 않도록 자꾸만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울면서라도 씨를 뿌리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믿는 이들에게는 표징이 따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으로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며, 독약을 마실지라도 절대로 해를 입지 않으며, 아픈 사람들에게 손을 얹으면 나을 것이다."(18)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돈 귀신에 들려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그 귀신이 우는 사자처럼 사람들을 삼키고 있습니다. 세월호 침몰 사고 소식을 전하던 매스컴은 사망자와 실종자들이 받게 될 보상금이 얼마인지를 계산하여 보여주었습니다. 제일 먼저 배를 빠져 나간 선장은 병실 온돌에 젖은 지폐를 말렸다고 합니다. 보험회사는 애도를 표하는 척하면서 여행자 보험 가입을 권유했습니다. 참담합니다. 천박합니다. 그런데 이게 바로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문제는 교회조차 그 귀신과 타협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생명보다 효율을 중시하는 정치는 사탄의 정치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보다 교회 성장에만 몰두하는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그 귀신을 쫓아내야 교회가 살고 나라가 삽니다.
주님의 사람들은 새 방언으로 말해야 합니다. 욕망의 기름기가 덕지덕지 묻은 말들은 사람들의 관계를 어긋나게 만듭니다. 미움과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는 말, 남을 저주하는 말, 책임 회피의 말은 낡은 말입니다. 우리는 일치와 화해의 말, 축복하는 말, 책임 있는 말을 해야 합니다. 참 말이 무너진 시대에 살면서 우리는 지쳤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만난 이들은 낡은 말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말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말이 곧 우리가 사는 세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람들은 뱀을 손에 들고, 독을 마시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음험한 세상은 뱀처럼 우리를 위협합니다. 중뿔나게 나서다가는 독이 든 잔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악이 기승을 부리는 것은 우리가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이계삼 선생은 지금 우리나라에는 오직 하나의 행동윤리만이 존재하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나서지 않을 것, 개인이 져야 할 책임이라면 굳이 지지 않을 것, 인간의 고통보다 상부의 진노를 두려워할 것, 끝내 내 자리를 지킬 것". 그리하여 우리는 '대충' 살게 되었다.>(한겨레신문, 2014/4/18일 칼럼) 이제는 대충 살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다운 말을 하고, 악에 맞서며, 인간다운 품위를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사람들은 아픈 사람에게 손을 얹어 낫게 해야 합니다. 주님처럼 육신의 병을 낫게 할 능력은 없다 해도, 고통 받는 이들에게 건넨 사랑의 손길은 뭔가 사건을 일으키게 마련입니다. 따뜻하게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 하나만 있어도 세상은 한결 훈훈한 곳이 됩니다. 계산하지 않는 사랑으로 누군가에게 다가설 때 세상은 치유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웃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 희생은 결코 헛되이 스러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그런 부활의 실재성이 드러나는 것은 오직 우리의 삶을 통해서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어지러움을 느낍니다. '무서워하고', '믿지 못했던' 제자들처럼 우리도 현실 속에서 당혹감을 감출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절망의 자리를 딛고 일어나 주님이 하시던 일을 계속하라 명하십니다. 저 진도 앞바다에 세워진 십자가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 것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풍성하게 하지 않는 모든 선택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가로막는 장애물들입니다. 저 차가운 물속에서 죽어간 이들은 우리의 사람됨을 재는 척도가 될 것입니다. 그들의 희생을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디딤돌로 삼지 않는다면 우리 죄는 용서받을 길이 없을 것입니다. 저는 주님이 부활하심을 확고히 믿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과 실천을 통해 이 땅에 오고 계십니다.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일, 모든 사람이 자기 몫의 삶을 한껏 누릴 수 있는 세상을 여는 일, 그것이 부활의 주님을 믿는 우리의 소명입니다. 주님의 위로와 평강이 상처 입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과 우리 가운데 늘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