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죽었는가 살았는가?
계3:14-22
["라오디게아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아멘이신 분이시요, 신실하시고 참되신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처음이신 분이 말씀하신다.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겠다.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내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네게 권한다. 네가 부유하게 되려거든 불에 정련한 금을 내게서 사고, 네 벌거벗은 수치를 가려서 드러내지 않으려거든 흰 옷을 사서 입고, 네 눈이 밝아지려거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너는 열심을 내어 노력하고, 회개하여라.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이기는 사람은, 내가 이긴 뒤에 내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보좌에 앉은 것과 같이, 나와 함께 내 보좌에 앉게 하여 주겠다.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 오늘 교회가 서 있는 현실
오늘은 한국교회가 교회연합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세상에는 정말 많고 많은 교회가 있지만 사실은 다 주님의 교회입니다.
서 있는 자리와 형편은 달라도 우리는 ‘하나의 교회’에 속해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그런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얼마 전 맹목적이고 광신적인 신앙을 가진 목사 한 분이 일을 저질렀더군요. 대구의 동화사에 들어가 탱화에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낙서를 하고, 불전함에 방뇨까지 했다 합니다. 사찰에 들어가 땅 밟기를 했던 젊은이들은 차라리 순진한 편이라 하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하는 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을까요? 바른 분별력을 갖지 못한 믿음이 얼마나 위험하고 저급한가를 보여주는 한 예입니다.
남의 동네 이야기 할 형편이 못됩니다. 감리교회에서 가장 큰 교회의 한 원로 목사는 조선일보에 전면 광고를 내서 감리교회의 수준을 만천하에 드러냈습니다. 감리교회는 9월 25일 입법총회를 통해 몇 가지 법안을 고치려 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소위 말하는 ‘세습 방지법’입니다. 목사나 장로의 자제나 사위/며느리들은 당사자들이 속해 있는 교회의 담임자가 될 수 없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법을 만든다는 사실 자체가 수치스럽지만, 그래도 이 법은 교회가 상식을 회복해 가는 첫 걸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많은 이들이 공감을 나타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그 원로 목사는 ‘세습방지법’을 한 마디로 대형 교회에 대한 시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일축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세습의 정당화하는 말을 했습니다. 목사도 사람인지라 자기 후임으로 온 목사가 목회를 잘 하면 시기심이 생기고, 못하면 탓하게 된다면서, 가족이 후임이 되면 시기심보다는 격려하는 마음이 더 생기니 좋은 일 아니냐는 것입니다.
아주 바닥을 다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앙은 그런 마음을 극복하는 과정이 아니던가요?
이런 난맥상은 일반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동을 상대로 한 성범죄가 빈발하고 여론이 들끓자 정치인들은 그런 이들에 대해 엄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성범죄자들에 대한 화학적 거세가 논의되더니 급기야 물리적 거세 법안을 만들려는 이들이 등장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문제를 특정인들에게 덮어씌우는 일에 익숙합니다. 사회적 증오를 특정한 개인들에게 집중시킴으로써 사람들의 분노를 해소시키려 합니다. 하지만 그들만 없어지면 세상이 좋아질까요? 그들을 절망과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던 사회 구조를 그대로 방치하는 한 그런 범죄자들은 계속해서 나올 것입니다.
저 역시 파렴치하고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미워하는 것으로 우리가 할 일을 다했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절망의 가장자리로 내몰리는 사람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자기를 존중하고, 자기 삶의 지도를 가질 수 있도록 돕지 않으면 그런 일은 계속해서 일어날 겁니다. 숙명여자대학교의 김응교 교수는 노숙인들을 위해 인문학 강좌를 해 줄 수 있느냐는 어느 시민단체의 요청을 받았을 때 즉시 ‘무조건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돈이 되는 일도 아니고, 명예가 따르는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의 배움을 사회적 자산으로 만드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교회가 할 일이 많습니다. 우리 시대의 땅 끝까지 복음을 가져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가 먼저 교회답게 변해야 합니다.
• 우리의 실상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겠다.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내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15-16)
라오디게아는 온천수가 솟아오르는 히에로폴리스와 가까웠는데, 그곳에서 솟아난 물이 흘러흘러 라오디게아에 이를 무렵이면 미지근해졌다고 합니다. 주님은 그런 지역적 특성과 관련시켜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믿음을 ‘미지근함’이라는 말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미지근한 믿음은 사실 믿음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경건하게 보이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딤후3:5)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 이들은 “늘 배우기는 하나 진리를 깨닫는 데에는 전혀 이를 수 없습니다”(딤후3:7). 냉철한 비판 의식이나 깨끗한 양심, 역사를 꿰뚫어보는 예언자적 시야도 없습니다. 불의한 일을 보아도 분노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배를 통해 뭔가 중요한 삶의 변화가 일어날 거라고는 아예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은 별 일 없이 사는 것입니다. 로또 복권에라도 당첨되면 더 좋아하겠지요? 복음의 대의를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주기철 목사는 1935년 12월 17일부터 20일까지 열렸던 평양신학교 학생 부흥회에서 <일사각오一死覺悟>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디두모라고도 불리웠던 도마가 동료 제자들에게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고 말했던 요한복음11장 16절을 본문으로 삼아 그는 정말 젊은이들의 혼에 불을 지르는 설교를 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도 다 쏟으시며 우리를 위해 죽으셨는데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겠느냐면서 일사의 각오와 다짐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설교의 한 대목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 두려워서 예수를 버리지 맙시다. 풀의 꽃같이 시들어 떨어질 목숨을 아끼다가 지옥에 떨어질까 두렵습니다. 더럽게 무릎을 꿇고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고 또 죽어 주님을 향한 각오와 다짐과 정절을 지켜 나갑시다. 다만 나에게는 일사각오의 결의가 있을 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시퍼렇고 백합화도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에 드려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세례 요한도 스데반도 청장년의 때에 뜨거운 피를 흘려 주님을 향한 그의 다짐을 지켜 나갔습니다.”
뜨거운 믿음입니다. 그는 예수를 믿어 복을 받기를 바라는 사람이 아니라, 그의 제단 앞에 제물로 바쳐지기를 바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모습도 다르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변질된 겁니다. 변질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이라고 말하는 17절에 대답의 열쇠가 있습니다. 문제는 부유함입니다. 부유하면 사람들은 복음이 갖는 전복적인 성격을 불편하게 여기기 시작합니다. 개인적 행복과 위안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로써 냉철하거나 뜨거운 신앙은 잦아들고, 신앙의 형식만 남습니다. 그들은 복음에 의해 변화함을 받지 않고, 복음을 변질시킵니다.
• 회생을 위한 처방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17)
자기의 실상을 아는 것이야말로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영에 부딪힌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는 것은 자기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거들먹거리며 살고, 제 잘난 맛에 살던 우리 속에 있는 상처와 어둠과 욕망과 죄를 보게 하십니다. 그걸 보면 울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간곡하게 당부하십니다.
“네가 부유하게 되려거든 불에 정련한 금을 내게서 사라.” 금은 변치 않는 믿음을 상징합니다. 믿음의 사람을 저는 독립의 사람, 직립의 사람, 자기 입장을 가진 사람, 하나의 중심을 가진 사람이라 규정합니다. 그는 세상의 가치관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그는 어지간한 인생의 무게가 짓눌러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 시련과 박해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우리 시대에 빗대 말하자면 그는 자본주의의 가치관에 사로잡히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의 정신에 접속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 '아멘'이 되기를 소원하는 사람이 됩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가 사야 할 정련한 금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벌거벗은 수치를 가려서 드러내지 않으려거든 흰 옷을 사서 입어라.”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믿음을 영적인 벌거벗음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숭이 임금님>이 떠오릅니다. 거울 보는 걸 좋아하고, 옷장에 쌓아둔 옷을 꺼내 입어보는 데 정신이 팔린 임금에게 어느 날 재단사를 가장한 사기꾼이 찾아옵니다. 그들은 기가 막힌 천이 있다면서 그 천은 착한 사람 눈에만 보인다고 말합니다. 허영심에 사로잡힌 왕은 그 옷을 주문하고 결국 ‘있지도 않은 옷’을 입고 거리로 나섭니다.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자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꼭 이런 거겠지요. 성도다운 품격도 인격도 갖추지 못했으면서 뭐라도 된 줄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보며 주님은 안타까우셨습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흰 옷을 사 입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그 흰 옷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라고 풀이하고 싶습니다. 그 마음을 얻지 못하면 우리는 여전히 벌거벗은 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네 눈이 밝아지려거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 이 말씀을 통해 주님은 안약으로 유명한 라오디게아 사람들이 사실은 영적으로 눈이 멀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눈이 밝다는 것은 영적인 분별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무엇이 정말 중요한 것이고 덜 중요한 것인지를 알아차리는 능력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을 보며 주님은 뭐라고 하실까요? 스스로 “눈 먼 사람이면서 눈 먼 사람을 인도하는 길잡이”(마15:14)라고 하지 않으실까요? 저도 나름대로 안간힘을 다해 공부를 하는 까닭은 눈먼 길잡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안약을 눈에 바르지 않고는 제대로 볼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사람과 세상이 제대로 보입니다. 우리는 지금 누구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습니까? 방송이나 신문의 눈이 아닙니까? 자본주의의 눈이 아닙니까? 주님의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야 합니다.
• 일상 속에 주님 모시기
라오디게아 교회는 많은 책망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책망 속에 희망이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19a). 하나님의 책망은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눈물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책망하시는 것은 고통과 굴욕감을 안겨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의 죄와 허물을 깨닫게 하고, 또 그것으로부터 돌이키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징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히브리서는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을 징계하시고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신다”(히12:6)고 말합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그나마 이 정로라도 된 것은 실패와 아픔과 좌절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성취되고 아무런 갈등과 좌절이 없었다면 우리는 정말 교만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어둠을 알기에 빛이 고맙습니다. 질병의 힘겨움이 있기에 건강이 고맙습니다. 난관이 있기에 살아있음이 고마움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한국교회를 향해 쏟아지는 비난 때문에 마음 아파합니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나 싶어 한숨도 납니다. 하지만 저는 또 다른 희망을 봅니다. 많은 뜻있는 사람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찬 바람이 불면 재 속에 파묻혔던 불씨가 되살아나는 것처럼 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좋은 목회자와 평신도 사역자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혼돈의 수면 위에서 움직이셨던 것처럼 성령은 지금 한국 교회 위에서 움직이고 계십니다. 문제는 그 영을 모시는 일입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 삶의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주님은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오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문을 열어 드릴 때만 들어오십니다. 우리 내면에, 가정에, 일터에, 학교에, 사회에, 우리들의 관계 속에 주님을 모셔 들여야 합니다. 주님은 매 순간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 소리를 가려듣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온통 빼앗고 있는 것들로부터 돌아서야 합니다. 이어폰을 꽂고 볼륨을 높인 채 음악을 듣는 젊은이들을 봅니다. 그들은 완강하게 외부와의 소통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금은 볼륨을 낮출 때입니다. 이것이 행복을 얻는 길이라고 떠들어대는 세상의 소리에 유혹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영위되는 모든 곳에 주님을 모시면 삶이 새로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과 더불어 한 상에서 먹고 마시는 시간이 길어진다면 우리는 그분의 숨결을 받아 새로운 존재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변하면 우리 주변도 변합니다. 교회가 변하면 세상도 변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 살아 있는 줄 알았지만 실상은 죽은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준엄하게 깨우쳐주시는 분이 계시기에 회생의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 한국교회도 이전의 부끄러운 일들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교회는 부유해지면 반드시 타락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크고 화려한 예배당에는 말구유와 십자가가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희생이 없는 교회는 교회일 수 없습니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신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파하지 않았습니다. 일사각오는커녕, 조금의 손해도 보려하지 않았습니다. 한국교회라 통칭해서 말했지만 우리 교회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르다는 생각 자체가 교만입니다. 이제 주님의 영으로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이 새로워지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이 새로워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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