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이야기가 있는 신앙생활

천국생활 2012. 9. 17. 08:22

이야기가 있는 신앙생활
수4:20-24

[여호수아는 요단 강에서 가져 온 돌 열두 개를 길갈에 세우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들 자손이 훗날 그 아버지들에게 이 돌들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거든, 당신들은 자손에게 이렇게 알려 주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이 이 요단 강을 마른 땅으로 건넜다. 우리가 홍해를 다 건널 때까지, 주 우리의 하나님이 우리 앞에서 그것을 마르게 하신 것과 같이, 우리가 요단 강을 다 건널 때까지, 주 우리의 하나님이 요단 강 물을 마르게 하셨다. 그렇게 하신 것은, 땅의 모든 백성이 주님의 능력이 얼마나 강하신가를 알도록 하고, 우리가 영원토록 주 우리의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 교육의 핵심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기독교교육 진훙주일입니다.

 저마다 자기에게 품부된 삶을 아름답게 살아내는 사람, 이웃과 더불어 평화를 누릴 줄 아는 사람이 되도록 돕는 것이

모든 교육의 핵심이 되어야 하지만, 오늘의 교육은 남들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에 지나칠 정도로 몰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때 기독교 교육이 꼭 붙들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새겨 보아야 하겠습니다.

 제가 교회학교 교사들에게 신신당부하는 것이 있습니다.

 제발 아이들에게 죄의식을 주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큰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 데 아이들에게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신다든지, 하나님이 벌을 내리실 것이라고 위협하는 것은

아이들의 영혼에 그늘을 만드는 일입니다. 아이들은 실수도 하고, 속이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며 크는 법입니다.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아이를 혼내기 위해 하나님을 동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렇게 작은 분이 아닙니다.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아브라함 J. 헤셀이 했던 말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알기 위해서 배웠고, 히브리 사람들은 공경하기 위해서 배웠으며, 현대인은 써먹기 위해서 배운다."

조금 도식적이라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그의 말이 시사해주는 바가 참 많습니다.

현대인은 써먹기 위해 배운다는 말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실용적인 목표와 관계없는 공부는 하지 않으려 합니다.

학생들이 선생님께 종종 던지는 질문은 '선생님, 그거 시험에 나와요?' 입니다.

시험에 안 나오면 몰라도 그만입니다. 공경하기 위해 배운다는 것은 어떤 걸까요?

저는 삶을 정성스럽게 살아내도록 돕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람을 정성스럽게 대할 때 우리 영혼이 오히려 고양됩니다.

그는 행복한 사람이기 되기보다는 세상에 가득 찬 하나님의 숨결에 놀라고 기뻐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합니다.

아동과 청소년 교육 전문가로 활동 중인

얀-우베 로게(Jan-Uwe Rogge)는 일상에서 수행되어야 할 교육의 핵심을 네 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첫째, 교육에 관여하는 이들은 아이들이 자기감정에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아이들도 행복과 기쁨, 실망과 절망, 슬픔과 분노의 감정을 느낍니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네가 뭘 안다고…'라고 말함으로 무시하면 안 됩니다.

 

둘째, 아이들이 성장하는 속도를 참을성 있게 지켜보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아이들을 몰아대지 말고 천천히 그와 동행하라는 것입니다.

 

셋째,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불완전해질 수 있는 용기를 내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아이들은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이에게 답을 주려고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넷째, 경계를 정해주어야 합니다. 즉 세상만사가 자신의 의도나 계획 혹은 바람대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안 되는 일이 있음을 배워야 사람이 영급니다.

(안젤름 그륀/얀-우베 로게, <<아이들이 신에 대해 묻다>>, p. 9-11 참조)

 



• 기억의 매개물


이런 교육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을 저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으며 컸습니다. 어느 대형 서점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근사한 말입니다. 저는 이 말을 이렇게 바꿔놓고 싶습니다.

'사람은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는 사람을 만든다.'

'책'의 자리에 '이야기'만 넣어서 독창성은 좀 떨어집니다만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나는 내가 들어온 이야기가 형성한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것이 성경 이야기 혹은 옛날이야기일 수도 있고, 동화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잡다한 일상 속에서 들어온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삶의 이야기를 만드는 이들과 함께 살았느냐가 우리의 가치관과 세계관 그리고 지향을 만들어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야기 만들기의 명수들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의 내력을 잘 알고 있습니다.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사무엘, 사울, 다윗, 솔로몬, 예언자들…. 모두 역동적으로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한결같이 조금씩 흠결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친근함을 자아냅니다.

탈무드나 미드라쉬, 미쉬나 같은 책들도 이야기의 보물창고입니다.

인류의 자산이 되는 지혜는 이렇게 이야기를 통해 전승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듣는 순간 사람들은 그 이야기에 자기 감정과 생각을 투입시킵니다.

이야기를 통해 자기를 보고, 이야기를 통해 다른 세계도 이해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참 멋진 이야기입니다.

애굽을 탈출한 히브리 공동체는 우여곡절 끝에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추수 때가 되어 요단강물은 제방까지 넘실거리고 있었습니다. 건너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그 강물에 발을 들여놓자 위에서부터 흐르던 물이 멈추었습니다.

백성들이 강을 건너는 동안 제사장들은 요단강 한 복판에 딱 버티고 서 있었습니다.

마침내 백성들이 다 건너자 여호수아는 열두 지파에서 각각 한 사람씩을 뽑아 요단강 가운데서

돌 한 개씩을 가져오라고 했고 그것을 그들이 머물던 자리에 모아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곳은 길갈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돌 열두 개를 모아 세우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 자손에게 이렇게 알려 주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이 이 요단 강을 마른 땅으로 건넜다.

우리가 홍해를 다 건널 때까지, 주 우리의 하나님이 우리 앞에서 그것을 마르게 하신 것과 같이,

우리가 요단 강을 다 건널 때까지, 주 우리의 하나님이 요단 강물을 마르게 하셨다."(22-23)

그 돌무더기는 기억의 매개물이 되어 요단강을 건넜던 그 놀라운 사건을 후손들에게 상기시키는 역할을 했을 겁니다.

유럽 도시들이 고풍스런 느낌을 주는 것은 비단 오래된 건물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 도시의 골목마다 새겨진 이야기가 없다면 유럽 도시의 매력은 반감될 것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만한 것이 없는 곳도 이야기의 힘에 의지하여 아주 의미 있는 장소로 다가오곤 합니다.

사람들은 볼거리도 좋아하지만 의미있는 장소와 만나는 것도 좋아합니다.

길갈에 있는 돌무더기는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그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이야기가 서린 장소를 개발이라는 명분으로 파괴하는 나라는 희망이 없습니다.

문화란 공동의 기억이 시간 속에서 농축되어 나타나는 것이니 말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상기시켜주는 기념물은, 삶이 힘겨워 낙심될 때마다 그들을 일으켜 세워주는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기억을 상기시키는 이야기가 많을수록 인생은 풍요로워집니다.

물론 아름답고 가슴 벅찬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실패와 좌절의 기억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개입하셨는지, 그리고 인간이 망쳐놓은 일을 어떻게 바로잡으셨는지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기억은 스승이고 안내판입니다.

 



• 오늘 우리는 어떤 이야기 속에 살고 있나?


오늘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만들며 살고 있습니까? 누군가에게 들려줄 삶의 이야기가 있습니까?

특히 신앙의 이야기 말입니다. 젊은 남성 직장인들이 많이 나누는 이야기는 주식 시세와 골프 이야기라고 합니다.

젊은이들은 연예계에 대해 말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개가 한 달에 얼마를 번다더라, 아무개가 아무개와 사귄다더라,

걔 얼굴이 너무 달라져서 몰라볼 뻔했다…. 자기 삶, 더 나아가 자기 존재에 대한 이야기는 잘 하지 않습니다.

내적 빈곤함이 드러날까 두렵기 때문일까요?

더군다나 신앙 이야기는 적극적으로 기피합니다.

신앙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진보의 표상인 것처럼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교회생활을 하면서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지 않습니다.

권정생 선생님은 <우리들의 하나님>이라는 글에서 조촐한 희망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그는 만약 교회를 세운다면 뾰족탑에 십자가도 없애고, 오두막 같이 조촐한 집을 짓고 싶다고 말합니다.

교회 간판은 물론 안 붙이고, 강단 같은 거추장스러운 것도 없애야 합니다. 그냥 맨 마룻바닥이면 됩니다.

그곳에 여럿이 둘러앉아 세상살이 얘기도 하고, 성경책 얘기도 하고, 가끔은 절간의 스님을 모셔다가 부처님 말씀도 듣고,

점쟁이 할머니를 모셔 와서 궁금한 것도 물어봅니다. 단오날이면 돼지도 잡고 막걸리도 담그고 해서 함께 춤추고 놀기도 하고,

그래서 어려운 일, 궂은일도 서로 도와가며 사는 그런 교회를 세우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권정생 선생은 추운 겨울날 캄캄한 새벽에 종 줄을 잡아당기며 유난히 빛나는 별빛을 바라보는 때를 상기합니다.

소박하고 아름답고 거룩했던 새벽기도 장면도 그리움으로 회상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가 이렇게 냉랭하게 된 까닭을 그는 물질이 풍성해져서 몸으로 봉사하고 마음으로 정을 나누는 일이

적어졌기 때문이 아닌가 진단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하느님>>, 녹색평론사, p. 15-16)

신앙의 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집니까?

교우들이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때,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때, 공동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할 때,

그리고 신앙을 지켜내기 위해 함께 고난을 견딜 때, 고난의 현장을 찾아가 그들에게 작은 힘이나마 보태주기 위해 노력할 때 만들어집니다.

어느 목사님은 교회 설립 기념일에 '교우들의 삶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펴냈습니다. 참 좋은 시도입니다.

교회 역사는 결국 교우들이 빚어내는 신앙 이야기이니 말입니다.

많은 이들이 다른 이들과 연루되기 싫어서 가급적이면 사귐을 피하려 합니다.

그런 나태함을 극복해야 믿음이 자라고 공동체가 자랍니다.



• 외경심을 불러일으키는 것


여호수아는 길갈에 세워놓은 돌무더기가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언급한 후에 한 마디를 더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땅의 모든 백성이 주님의 능력이 얼마나 강하신가를 알도록 하고,

우리가 영원토록 주 우리의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려는 것이다."(24)

여기서 말하는 '그렇게 하신 것'은 요단강물을 마르게 하신 사건을 일컫는 말입니다.

돌무더기 이야기가 결국 지향하는 것은 '하나님 경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론이고, 다른 나라 사람들까지도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도록 하는 것 말입니다.

신앙인들은 누군가의 가슴에 거룩한 삶에 대한 열망을 불어넣을 수 있어야 합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그의 <기도 시집>을 열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지금 시간이 기울어가며 나를/맑은 금속성 울림으로 가볍게 톡 칩니다./나의 감각이 바르르 떱니다. 나는 느낍니다, 할 수 있음을,/

그리하여 나는 조형造形의 날을 손에 쥡니다." 시간이 맑은 금속성 울림으로 톡 친다는 말이 참 감각적입니다.

젊은 시절, 지리산가리산 삶의 갈피를 잡지 못해 방황할 때면 <이 세상 어딘가엔>이라는 노래를 자꾸 불렀습니다.

그 가사야말로 맑은 금속성 울림으로 제 영혼을 톡 치곤 했습니다.

이 세상 어딘가엔 남이야 알든 말든
착한일 하는 사람 있는 걸 생각하라
마음이 밝아진다

이 세상 어딘가엔 탐욕과 분심 눌러
얼굴이 빛나는 이 있는 걸 생각하라
마음이 밝아진다

이 세상 어딘가엔 청빈을 감수하고
덕행에 힘쓰는 이 있는 걸 생각하라
마음이 씻기운다

이 세상 어딘가엔 하늘을 예경하고
이웃을 돕는 사람 있는 걸 생각하라
기뻐서 눈물난다

설명을 하면 오히려 감동이 사라질 것 같아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이 세상 어딘가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돌연 세상은 살 만한 곳으로 변합니다.

그런데 바로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있음 그 자체로 세상을 맑게 만드는 사람 말입니다.

이슬람의 예언자인 무함마드를 비하하는 동영상이 유포되면서 아랍권 전역으로 반미시위가 번져가고 있습니다.

어느 종교가 되었건 자기만 옳고 다른 이들은 그르다는 논리에 사로잡힌 근본주의자들이 세상에 폭력을 흩뿌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증오를 피어오르게 하는 이들은 그들이 믿는 종교와 신념이 어떠하든 사탄에게 속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증오의 교리, 배제의 가르침은 주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저는 교회학교 교사들에게 굳이 설교를 하려고 애쓰지 말고 성경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잘 들려주라고 말하곤 합니다.

우리 교회가 만들어가는 신앙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으면 더 좋겠지요.

함께 말씀을 묵상하고, 형제자매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성찬에 참여하고, 땀 흘려 봉사하고,

불의와의 싸움에서 연대했던 경험이 있을 때 우리는 이야기를 가진 사람이 됩니다.

이제 나태한 신앙생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저 교양 있는 신자로 머물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의 일부로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삶의 여건을 통해 신앙 이야기라는 아름다운 천을 짜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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