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소서

천국생활 2012. 8. 6. 10:58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소서
시141:1-10

[주님, 내가 주님을 부르니, 내게로 어서 와 주십시오. 주님께 부르짖는 내 음성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내 기도를 주님께 드리는 분향으로 받아 주시고, 손을 위로 들고서 드리는 기도는 저녁 제물로 받아 주십시오. 주님, 내 입술 언저리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 앞에는 문지기를 세워 주십시오.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지지 않게 해주십시오. 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어울려서, 악한 일을 하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그들의 진수성찬을 먹지 않게 해주십시오. 의인이 사랑의 매로 나를 쳐서, 나를 꾸짖게 해주시고 악인들에게 대접을 받는 일이 없게 해주십시오. 나는 언제나 그들의 악행을 고발하는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그들의 통치자들이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지면, 그제서야 백성은 내 말이 옳았음을 알고서, 내게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맷돌이 땅에 부딪쳐서 깨지듯이 그들의 해골이 부서져서, 스올 어귀에 흩어질 것입니다. 주 하나님, 내 눈이 주님을 우러러보며, 주님께로 내가 피하니, 내 영혼을 벌거벗겨서 내쫓지는 말아 주십시오. 내 원수들이 나를 잡으려고 쳐 놓은 덫에서 나를 지켜 주시고,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의 함정에서 나를 건져 주십시오. 악인들은, 자기가 친 덫에 걸려서 넘어지게 해주시고, 나만은 안전하게, 빠져 나가게 해주십시오.]


• 가장 외로운 시간에
좋으신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쉼, 기도, 사귐’을 주제로 한 수양회가 잘 끝났습니다.

모두가 앞만 향해 질주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잠시 멈추어 쉼을 연습했습니다.

집보다 조금은 불편하고 올림픽 소식도 듣기 어려운 곳이었지만 함께 있어 참 좋았습니다.

평화노래꾼 홍순관 집사의 글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테크놀로지가 아무리 앞선다 해도 나무 한 그루만 못한 것이요,

호사한 샹들리에보다 잠잠한 촛불 앞에서의 기도가 깊을 것입니다.

대리석으로 저택을 두른다고 권위가 단단해지는 것은 아니지요.

첨탑의 높이로 하늘과 가까워질 수는 없는 일입니다.

수없는 세월을 달려와 우리 앞에 열리는 별빛을 알았다면

눈앞의 부富를 향해 달리는 사람과 종교는 그 걸음을 멈추어야 합니다.”(홍순관, <<네가 걸으면 하나님도 걸어>>, 108쪽)

멈추어 서지 않으면 아름다움에 접속하기 어렵습니다.

멈추어 서지 않으면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가늠할 수 없습니다.

몸 받아 이 세상에 태어난 우리들, 삶은 언제나 만만치 않은 무게로 우리를 짓누릅니다.

하지만 슬픔이 있기에 기쁨이 있고, 절망이 있기에 희망이 고맙습니다.

살면서 가장 힘든 순간은 내가 세상에서 잊힌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아닐까요?

불의한 세상에 저항하다가 ‘너 홀로 의롭냐?’는 비아냥거림을 받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이 마치 나를 왕따시키기 위해 공모한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면 가슴이 무지근해집니다.

오늘 시편의 시인도 그러한 것 같습니다. 그는 지금 외롭습니다.

자칫하면 마음의 중심이 무너져 내릴 수도 있는 형편입니다.

문제는 흔들리는 마음을 곧추세울 수 있는 힘이 그에게 없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은 불의한 자들이 득세하고, 의롭게 살려는 이들은 늘 그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곤 합니다.

어찌해야 할까요? 그런 상황에서 시인은 자기가 홀로가 아님을 불현듯 깨닫습니다.

상황이 어떠하든 언제나 함께 계시는 분, 누구보다도 자기 말에 귀를 기울여주시는 분,

이런저런 충고를 늘어놓지 않으면서 말없이 품어주시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근심과 걱정으로 인해 잠시 잊고 있었던 그분을 떠올리자 내면에서 용기가 솟아납니다.



• 기도할 용기
그는 그 분 앞에 자기 심정을 토로합니다.

 마치 사무엘이 태어나기 전에 자식을 얻지 못한 여인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주님 앞에 쏟아 놓았던 한나처럼 말입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부르니, 내게로 어서 와 주십시오. 주님께 부르짖는 내 음성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내 기도를 주님께 드리는 분향으로 받아 주시고, 손을 위로 들고서 드리는 기도는 저녁 제물로 받아 주십시오.”(1-2)

시인은 지금 부르짖습니다. 아무리 마음을 고요히 하려고 해보아도 불쑥불쑥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누를 길이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혹은 누구 때문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지쳤습니다.

마음에 쌓인 울울함을 떨쳐낼 힘이 없습니다. 이야기를 나눌 벗조차 떠오르지 않습니다.

진정한 우정이란 벗들의 무거운 짐을 함께 나누어질 때 생기는 법이지만,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는 이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아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사이가 버름해지기 일쑤입니다.

시인은 그래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만수받이로 우리의 투덜거림을 들어주시고,

결국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기도를 주님께 드리는 분향焚香으로 받아 달라고 기원합니다.

분향은 제사장들이 향단 위에 향을 피우는 행위를 일컫는 말입니다.

출애굽기는 제사장들이 등을 손질할 때나 등불을 켤 때 향을 피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분향은 기본적으로 시간과 공간의 정화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향을 피움으로써 악하고 속된 것들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현존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공경의 표시이기도 했습니다.

출애굽기는 분향에 사용할 가루향을 만드는 방법을 자세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순수한 향품들을 순수한 유향과 제조법에 따라 잘 섞고 거기에 소금을 쳐서 깨끗하고 거룩하게 만들어야 합니다(출30:34-38).

재미있는 것은 사사로이 쓸 목적으로 가루향 제조법대로 그걸 만드는 사람은 누구든지 백성 가운데서 끊어질 것이라고

엄중히 경고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자기 기도를 분향처럼 받아달라는 말은 심상한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라 해도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일임을 그는 명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또한 손을 위로 들고서 드리는 기도는 저녁 제물로 받아 달라(2b)고 청합니다.

그는 지금 말로만 기도드리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도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그만큼 절박합니다.

때로는 말보다 몸이 더 정직합니다. 사람들은 기도할 때 무릎을 꿇기도 하고,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도 하고,

손을 위로 들어올리기도 합니다.

유도 금메달리스트인 김재범 씨는 매트에 서기 전 하늘을 우러러 보며 두 손을 들어 올리곤 했습니다.

그 긴장된 순간 그는 하나님 앞에 자기 마음을 바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 무엇을 청할 것인가?
시인의 기도는 계속됩니다. 그는 자기 입술 언저리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입 앞에는 문지지를 세워달라고 청합니다.

자기가 얼마나 말에 실수가 많은 사람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성미가 급하거나 경솔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누구나 `성급한 열정에 사로잡히는 순간, 말은 이성의 통제를 넘어 마치 토사물처럼 쏟아져 나옵니다.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스스로 억제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우리는 다 실수를 저지르지만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 몸을 다스릴 수 있는

온전한 사람’(약3:2)이라고 했던 겁니다. 시인은 자기를 믿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 청합니다.

자기 입술 언저리에 파수꾼을 세워달라고, 입 앞에 문지기를 세워달라고 말입니다.

말이 진실해야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지지 않게 마련입니다.

조선시대의 선비인 백광훈(白光勳, 1537-1582)은 가족과 떨어져 서울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해남에 살고 있던 아들들에게 자주 편지를 보내 가풍을 세워나갔습니다. 편지 가운데 한 대목이 마음을 울립니다.

“듣자니 너희가 자못 남을 업신여기는 태도가 있고, 또 남의 허물 말하기를 좋아한다 하더구나.

사람이 배우는 것은 다만 이러한 병통을 없애려 함인데, 이제 너희가 만약 정말로 이와 같다면

비록 만 권의 글을 배워 곧장 과거에 급제한다 해도 그 사람을 어디에다 쓰겠느냐?

놀라고 절통하여 죽고만 싶구나. 이후로도 너희들이 이 같은 버릇을 딱 끊지 못하고 뭐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게 되면

맹세컨대 다시는 너희들을 보지 않겠다.”(정민, <<책 읽는 소리>>, 86쪽에서 인용)

만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과거에 급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임을

아버지는 절통한 심정으로 일개우고 있습니다. 남을 업신여기지 않고, 남의 허물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꽤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다음에 시인이 청하는 것은 원수에 대한 보복도 아니고, 욕망을 채워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를 지킬 수 있도록 힘을 달라는 것입니다.

1) 내 마음이 악한 일에 기울어지지 않게 해주십시오.

2) 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어울려서, 악한 일을 하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3) 그들의 진수성찬을 먹지 않게 해주십시오.

4) 의인이 사랑의 매로 나를 쳐서, 나를 꾸짖게 해주십시오. 이 기도를 저는 고스란히 제 기도로 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악에 빠지는 것은 우리 속에 있는 뿌리 깊은 죄성이 극복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화를 향한 우리의 노력은 죽는 순간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 후에는 하나님의 자비하심 앞에 엎드릴 뿐입니다.

그래도 죄의 잡아당기는 힘을 약화시킬 방법이 없을까요? 있습니다.

그것은 악한 일을 도모하는 이들과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악인의 진수성찬을 거절할 수 있는 용기를 내는 것입니다.

악인의 진수성찬은 미끼일 따름이어서 그걸 무는 순간 우리는 그에게 얽매일 수밖에 없습니다.

뇌물 스캔들이나 공천헌금을 둘러싼 잡음이 끊이질 않습니다.

최근에 우리는 매스컴을 통해 용역경비업체인 컨택터스에 대해 많이 보고 듣고 있습니다.

그들은 SJM 안산 공장에서 농성하던 노조원들을 무차별하게 폭행하였습니다.

고스란히 폭력에 노출된 피해자들의 모습은 참혹했습니다. 열지어 서 있는 가해자들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이들도 있었지만, 잔뜩 겁에 질린 듯한 표정으로 서있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루에 일당 7-8만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일당을 벌기 위해 그런 일에 동원되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불행한 시대에 태어나 괴롭게 살고 있는 젊은이들입니다.

일자리가 없다고는 해도 그런 일을 거절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자기 영혼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성숙한 사람이라는 것은 의인이 사랑의 매로 쳐서 자기를 꾸짖게 해달라는 기도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칭찬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옳음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사람은 준엄하게 꾸짖어 줄 사람이 없는 사람입니다.

바른 길로 가기 위해서는 자꾸만 엇길로 나가는 우리를 꾸짖어 제 자리로 돌려놓는 사람이 꼭 필요합니다.

 

 



• 결의
시인은 자기 영혼의 문제에만 골똘한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진공의 상태에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세상은 무균실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시대를 닮게 마련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을 가르면서 종교가 집중할 일은 개인구원이라고 강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만,

그들은 성경에 대해 전혀 무지한 자들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구체적인 삶의 문맥 속에서 선포되곤 했습니다.

성경은 일상의 삶의 자리와 무관한 영성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폭력과 부패로 가득 찬 세상이 나와 무슨 상관이랴 하면서 자기만의 행복을 구하는 사람은

도인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독교인은 아닙니다.

시인은 아주 단호하게 말합니다.

 “나는 언제나 그들의 악행을 고발하는 기도를 드리겠습니다.”(5b)

기도는 말로 드릴 때는 사룀이지만, 몸으로 드릴 때는 행동입니다.

악행을 고발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사뢰는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악인들을 꾸짖는 일이고

또 그들의 악행에 저항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강력한 저항이 때로는 가장 절실한 기도인 것입니다.

시인은 악인들이 얼마나 공교한지를 잘 압니다. 그렇기에 시인은 원수들이 쳐 놓은 덫과 함정에서 지켜달라면서,

오히려 그들이 자기가 친 덫에 걸려서 넘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악인들이 제 꾀에 빠져 비틀거리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때

사람들은 비로소 의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인들에 맞서 싸우는 일은 언제나 위험을 동반합니다.

위험이 예기되는 데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저항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영혼이 벌거벗겨져서 내쫓기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힘은 위험을 통해서만 자랍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사람들에게 ‘떠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떠나라는 명령을 들었고, 히브리인들도 그런 명령을 들었습니다.

신약에 오면 ‘떠나라’는 말은 ‘따르라’는 말로 바뀝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안락한 자리에 선 채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아멘’은 대개 세상의 기득권을 향한 ‘아니오’일 때가 많습니다.

교우 여러분,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울고 계십니까?

내 사정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담벼락 같은 사람들 때문에 상처를 입으셨습니까?

그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부르짖기도 하고, 온 몸으로 사정을 아뢰십시오.

그런 후에는 마음이 고요해질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그리고 침묵 속에서 우리에게 유입되는 주님의 평화를 누리십시오.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충만해지십시오.

악인의 진수성찬을 거부할 용기를 내십시오.

부정의에 민감하고, 불의에 항거할 줄 아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제 벌써 화요일이면 입추입니다. 삼복더위 한복판이지만 가을이 이미 시작되고 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애굽 한복판에서 자유의 꿈을 꾸게 하십니다.

로마의 평화라는 허구의 평화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꿈꾸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하나님의 뜻으로 충만하게 채우며 사십시오.

주님의 은총이 우리를 평화의 길로 이끄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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