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천국생활 2012. 8. 13. 11:46

하나님을 잊지 말라
신8:11-14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전하여 주는 주님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하고,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하십시오. 당신들이 배불리 먹으며, 좋은 집을 짓고 거기에서 살지라도, 또 당신들의 소와 양이 번성하고, 은과 금이 많아져서 당신들의 재산이 늘어날지라도, 혹시라도 교만한 마음이 생겨서, 당신들을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신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 음울한 징조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입추가 지나면서 이제 더위는 조금씩 물러가고 있습니다.

농가월령가는 이즈음을 일러 “늦더위 있다 한들 절서節序야 속일쏘냐. 비 밑도 가비업고 바람 끝도 다르도다”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러나 올해 우리가 겪은 가뭄과 무더위는 강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조절하려는

인간의 오만에 대해 심각한 경고를 남기고 있습니다.

낙동강 수역에서부터 시작된 녹조 현상이 이제는 한강을 비롯한 전국의 하천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녹색으로 변해버린 강물을 보면서 묵시록적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물의 삼분의 일이 쑥이 되고, 많은 사람이 그 물을 마시고 죽었다고 말합니다(계8:11).

 애굽 사람들은 핏빛으로 변한 나일강을 보며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일부러 공포를 자아내려는 것은 아니지만 녹조로 물든 강은 우리 삶을 돌아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폭염으로 말미암아 100만 마리가 넘는 가축들이 폐사를 당하고, 농작물이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농부들의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필리핀은 홍수로 인해 100만 명이 넘는 이재민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들은 미구에 닥쳐올 더 무서운 날들의 예고편인 것 같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 관리실은 몇 시간에 한 번씩 에어컨을 비롯한 전열기 사용을 줄여달라고 방송하고 있습니다.

예비 전력이 부족하다는 말이 나오더니 원전 고리 1호기를 슬그머니 재가동했다는 소식도 들려옵니다.

사람들은 불편함을 견디려 하지 않습니다. 이미 편리함에 중독되었기 때문입니다.

편리함의 중독에 빠진 사람들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퇴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우리가 아주 의도적으로 불편함을 선택하는 용기를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세기의 로마 철학자인 세네카는 “사람들은 시간이 없다고 말하면서 시간이 무한히 있는 것처럼 산다”고 말했습니다.

시간뿐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원이 인간의 필요에 따라 무한정 공급되는 것인 양 처신합니다.

화석 연료의 정점이 이미 지났다는 예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에너지 소비는 과도할 정도입니다.

냉장고를 비롯한 가전제품은 자꾸만 커집니다.

저는 우리 사회를 보며 엉뚱하게도 이스라엘의 초막절을 떠올립니다.

그들은 가을 추수를 마치면 초막(수카)을 지어놓고 거기에 일주일 동안 머물렀습니다.

초막은 각종 열매와 나무 가지를 엮어 만듭니다. 하지만 초막은 허름해야 합니다.

밤이면 별빛이 스며들 수 있어야 하고, 비가 오면 비가 샐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들이 그런 절기를 지키는 까닭은 광야에서 지냈던 그 힘겨운 시간을 잊지 말자는 뜻일 겁니다.

개구리 올챙잇적 생각을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풍요와 편리함에 길들여진 이들은

자기가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망각하곤 합니다.

우리는 초막을 잊었습니다. 어른들이 힘겨웠던 지난날을 떠올릴라치면 젊은이들은 그건 그 때의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생각이 만들어 놓은 것이 오늘 우리가 겪는 기후 재앙입니다.

저는 노아 시대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문장을 현재시제로 읽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임을 보시고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 하셨다.”(창6:5-6)

‘하나님의 마음 아파하심’이라는 구절이 가슴을 울립니다.

이 시대도 그러하지 않은가 해서 말입니다. 이제는 정말 돌이켜야 할 때입니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오늘 저는 신명기 본문을 통해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되새겨 보려 합니다.


• 잊지 말라
모세는 출애굽 공동체를 향해 유언과도 같은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우선 두 가지의 명령이 눈에 띕니다.

“주님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어기지 말라”,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하라.

두 가지 명령 같지만 사실은 하나입니다.

‘어김’은 ‘잊음’에서 나오고, ‘잊음’은 ‘어김’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어기는 것은 더 이상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지 않겠다는 거부의 표시입니다.

내가 누구 혹은 어떤 목소리에 반응하며 사는지를 보면 나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돈’과 ‘물질’을 주인으로 섬기는 이들도 있고,

 ‘권세자’나 ‘연예인’이 자기 삶을 규정하도록 허용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주님을 주님이라 부르는 이들은 많지만 주님을 따르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외로우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받아들여 수행하는 이들을 통해 구현됩니다.

말씀을 선포하는 자들은 자신이 전하는 말이 허공을 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절망합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나의 입에서 나가는 말도,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고 나서야,

내가 하라고 보낸 일을 성취하고 나서야, 나에게로 돌아올 것이다.”(사55: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그런 걸까요? 이 확신이 흔들릴 때 전하는 자들은 낙심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어기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신명기 저자는 아주 정확하게 핵심을 짚어내고 있습니다.

배불리 먹고, 좋은 집에서 살고, 소와 양이 번성하고, 은과 금이 많아져 재산이 늘어나면 교만한 마음이 생기고,

그 결과 하나님을 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반드시 교만한 마음으로 귀착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둘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교만을 뜻하는 라틴어 ‘수페르비아superbia’는 자신을 실제보다 크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교만한 사람의 특징은 다른 사람보다 자기를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성도들에게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빌2:3)라고 권면했습니다.

풍요로움과 교만한 마음이 상호 작용하는 것과 같이 교만한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망각으로 이어집니다.

자기를 크게 여기는 마음의 극단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교만한 마음에는 하나님을 모실 자리가 없습니다.

가난을 미화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지금보다 조금 살기가 어려웠던 시절에도

우리 삶이 이렇게까지 각박하지는 않았습니다.

돈이 늘어날수록 이웃 간의 정과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감사가 줄어들었습니다. 분명합니다.

풍요로움은 우리 마음을 둔감하게 하여 하나님을 잊게 만듭니다.

그런데 하나님 망각은 결국 멸망의 길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과도한 욕망의 터 위에 세운 문명은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잊지 말라’는 말씀이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 하나님은 어떤 분?
그러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모세는 백성들에게 야훼 하나님을 가리켜 “당신들을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신”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노예들을 바로의 압제에서 이끌어내 모두가 자기 삶의 결정권을 갖고 살 수 있는

 새로운 땅으로 이끄시는 해방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땅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를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탄원으로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무시당하고, 억눌리고, 착취당하고,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 히브리들의 인권을 되찾기 위해

바로로 상징되는 제국주의와 싸움을 벌이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삶이 평안해졌다고 해서, 먹을 것이 넉넉해졌다고 해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짓밟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망각인 동시에 도전입니다.

하나님은 히브리인들을 광야로 이끌어 내시어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훈련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당신의 백성을 굳이 광야로 이끄시는 것일까요?

사막 탐험가였던 테오도르 모노는 사막을 가리켜 “이 공간은 파우스트적인 인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막은 잡다한 생각을 버리고 강인해지도록 가르치는 학교”(<<사막의 순례자>>, 24쪽)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사막은 나약함을 허락하지 않고, ‘생략하는 법’을 가르쳐준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광야는 혹독한 곳이었지만 히브리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불뱀과 전갈이 우글거리는 광야에서, 물이 없는 사막에서 주님은 그들을 인도하셨고,

바위에서 물이 솟아나오게 하셨습니다. 만나로 먹이셨고,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삶의 든든함을 일깨워주셨습니다.

광야에서 히브리인들은 그런 소박하고 강인한 삶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존하는 마음을 일으키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강인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삶의 환경이 달라지면 사람은 언제든 편안함에 길들여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십니다.

전갈과 불뱀이 우글거리는 땅에서 하나님을 믿고 따르던 이들도 풍요로운 땅에서는 생각이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골짜기와 산에서 지하수가 흐르고 샘물이 나고 시냇물이 흐르는 땅, 밀과 보리가 자라고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가 나는 땅, 올리브기름과 꿀이 생산되는 땅, 돌에서는 쇠를 얻고 산에서는

구리를 캐낼 수 있는 땅(8:7-9)은 아름다운 곳이지만 위험한 곳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망각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신앙이 무기력해진 것은, 교회가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는 것은 부자가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가진 것이 많으면 신앙적 모험을 할 생각이 없어집니다.

가진 것을 지키는 일에 온통 관심을 기울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정의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요?



• 엄중한 경고
우리나라도 많이 부유해졌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조선시대의 신분질서는 사라졌는지 모르겠지만 소득 격차에 따른 새로운 신분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우리를 지배하던 제국주의의 망령은 사라졌는지 몰라도 이전보다 훨씬 공교하고 음험한 물질주의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바로’는 돈입니다.

세상에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관계가 돈으로 치환되는 세상은 좋은 세상이 아닙니다.

자본주의 세계 속에서 사람들은 돈을 매개로 하여 관계를 맺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직접적이고 인격적인 관계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본래 사람을 서로 비스듬히 기댄 채 살도록 하셨는데,

마음 놓고 등을 기댈 수 있는 있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듭니다.

외로움과 우울함이 넘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돈을 매개로 하지 않는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자기의 재능을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나누고,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있는 길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돈이 지배하지 않는 공간을 넓혀가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선교적 과제가 아닐까요?

그런데 이것은 일찍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우리는 성결법전에 나오는 아주 아름다운 권고를 알고 있습니다.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로 지칭되는 사회적 약자들이 어떤 인간적 굴욕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살 수 있도록 땅의 소출 가운데 일부를 남겨두라고 명령하십니다.

그것은 해도 그만이고 하지 않아도 그만인 권고가 아니라 명령입니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은 자선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함께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8장 말미에서 모세는 아주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내가 오늘 당신들에게 다짐합니다. 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참으로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가서 그들을 섬기며 절한다면, 당신들은 반드시 멸망할 것입니다.

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으면, 주님께서는, 당신들 앞에서 멸망시킨 민족들과 똑같이,

당신들도 망하게 하실 것입니다.”(19-20)
‘다른 신들’을 따라가면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는 이 말씀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신들’은 물론 가나안 토착민들이 믿던 바알이나 아세라를 가리키는 말일 겁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다른 신들’을 반드시 특정한 종교가 신봉하는 신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른 신들’과 ‘야훼 하나님’은 어떻게 다를까요?

다른 신들은 지주와 권력자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동원되는 신들입니다.

하지만 히브리의 하나님을 자처하신 야훼는 이 땅에서 짓밟히고 억눌리고 소외된

이들의 살 권리를 찾아주시는 분입니다.

‘다른 신들’을 따라가면 ‘반드시’ 망할 것이라는 말씀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야훼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어야 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종교 할 것 없이 홀로 잘 사는 삶이 아니라 함께 잘 사는 삶을 목표로 정해야 합니다.

그 길로 접어들 때 우리는 비로소 민족의 광복절을 다시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먼저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바로 그런 삶을 연습하고 경험하는 훈련장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우리 모두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가는 기쁨을 맛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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