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삶의 잔치에 응하라

천국생활 2012. 8. 20. 17:27

삶의 잔치에 응하라
눅14:15-24


[함께 먹고 있던 사람 가운데 하나가 이 말씀을 듣고서 예수께 말하였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였다. 잔치 시간이 되어, 그는 자기 종을 보내서

‘준비가 다 되었으니, 오십시오’ 하고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말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핑계를 대기 시작하였다.

한 사람은 그에게 말하기를 ‘내가 밭을 샀는데, 가서 보아야 하겠소. 부디 양해해 주기 바라오’ 하였다.

다른 사람은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시험하러 가는 길이오.

부디 양해해 주기 바라오’ 하고 말하였다. 또 다른 사람은 ‘내가 장가를 들어서, 아내를 맞이하였소’ 하고 말하였다.

그 종이 돌아와서, 이것을 그대로 자기 주인에게 일렀다.

그러나 집주인이 노하여 종더러 말하기를 ‘어서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을 이리로 데려 오너라’ 하였다.

그렇게 한 뒤에 종이 말하였다. ‘주인님, 분부대로 하였습니다만, 아직도 자리가 남아 있습니다.’

주인이 종에게 말하였다. ‘큰길과 산울타리로 나가서,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워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초대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서는, 아무도 나의 잔치를 맛보지 못할 것이다.’”]



• 모호한 삶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이제 제법 시원해졌습니다.

무더위를 핑계로 소홀히 했던 일들을 다시금 살피고 가지런히 정돈해야 할 때입니다.

한번 생활의 리듬을 잃고 나면 그것을 다시 회복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일상은 진부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자고 깨고, 밥 먹고, 일하고, 사람들 만나고, 더러 책이나 텔레비전을 보는 것 말고

우리 삶을 구성하는 것이 또 무엇이 있을까요?

 

그러는 중에 주름살과 흰머리가 늘어나고, 기력이 약해지면서 늙어가는 것이겠지요.

어느 날 문득 살아온 날을 돌아보며 ‘내가 지금까지 뭐 하고 살았나?’ 싶어 자괴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생명은 ‘살라는 명령’인데, 우리는 그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받은 바 명령이 무엇인지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그 명령은 날 때부터 주어졌다기보다는 우리 삶의 순간순간마다 주어집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지만,

인생이란 어찌 보면 매 순간 하나님께서 던지시는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모든 것이 모호하다는 사실입니다. 삶에 정답은 없습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택해야 하고, 그 선택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한다면 선택의 결과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시는 분이니 말입니다.

성서에 등장하는 위대한 인물들은 오류 없이 산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도 사람인지라 때로는 비겁했고, 때로는 무모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책망을 달게 들었고, 이끄심을 신뢰했습니다.


• 예수의 잔치


성경에는 ‘떠나라’는 말씀이 유난히 많이 등장합니다. 떠나지 않고는 사람이 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떠남은 모험입니다. 모험이기에 위험을 동반합니다.

사람들은 그런 위험이 싫어서 익숙하고 안전한 세계에 머물곤 합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산에 오르는 사람도 있지만 예견되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산을 바라보기만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푸른 바다를 향해 돛을 올리고 나가는 사람이 있지만 풍랑이 두려워 출항조차 시도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낯선 상황, 낯선 만남이 빚어낼 수도 있는 불쾌한 일을 가급적이면 피하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익숙한 세계에만 머물면 영혼이 자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번 올림픽에 참여했던 선수들은 도전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에 감사한다고 말했습니다.

도전하기를 주저하는 순간 사람은 늙기 시작합니다.

만남의 기쁨을 생각하면서 잔치를 열심히 준비했는데, 꼭 오겠다고 말했던 이들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오지 않을 때 주인은 얼마나 상심했을까요?

오늘 본문의 비유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이 마련한 천국 잔치를 외면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고, 귀신을 내쫒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벗이 되어주었을 때,

그리고 아무와도 꺼리지 않고 식사를 함께 하셨을 때, 소위 경건하다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한결같이 배척했습니다.

까닭이 무엇이었을까요? 유대 사회는 거룩한 것/속된 것, 의인/죄인, 유대인/이방인, 남자/여자를 가름으로 존립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경계 혹은 금기를 지키지 않으셨습니다.

손을 씻지 않고 식사 자리에 앉는 것도 허용했고,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고, 병든 이방인을 고치셨고,

여자들과 거리낌 없이 만나셨고, 유대인들이 경멸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좋은 이웃’의 표본으로 내세우기도 하셨습니다.

이처럼 경계선을 넘나드는 예수님의 행태는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대단히 위험하게 보였습니다.

자칫하면 자기들이 서있는 사회의 토대를 허무는 일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그런 경계선은 무의미했습니다.

예수가 만난 사람들은 다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었고, 사랑받기를 원하는 생명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어떻게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사랑의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예수는 거룩함이라는 척도를 가지고 사람을 가르기 보다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모두를 품어 안으셨습니다.

예수는 모두가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벗들의 나라를 꿈꾸셨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로막혀 있던 담이 무너질 때, 하늘과 땅 사이의 담이 무너질 때

사람들은 해방감과 아울러 기쁨을 느끼게 되고, 그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 잔치를 벌입니다.

예수가 계신 곳마다 식탁공동체가 형성되었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사회적 금기나 경계선을 긋는 일에 익숙했던 사람들은

예수 주변에서 벌어지는 생명의 잔치를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그 식탁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바로 그런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 형제됨의 거부


예수님은 오늘의 비유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성대한 잔치 자리에 비유하고 계십니다.

잔치는 축제이고 만남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음식을 나누어 먹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자기를 드러내 보임을 통해 하나의 공동체가 생겨납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처럼 경계가 무너진 벗들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식탁에 참여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은 자기들이 죄인으로 규정한 사람들을 형제와 자매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배타적인지를 보여주는 실례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디베랴 바다로 물러가 물고기를 잡던 제자들을 찾아오셨을 때의 광경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은 밤새도록 수고한 제자들을 위해 숯불을 피우고 떡과 생선을 구워 아침식사를 준비하셨습니다.

그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셨다는 것은 그들의 배반을 이미 용서하셨다는 말이고,

그들을 다시금 형제로 받아들인다는 표입니다.

지금도 우리를 위해 아침 밥상을 차리고 계신 예수님,

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르지 않습니까?

성령강림절 이후 최초로 수립된 예루살렘 신앙공동체가 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사도의 말씀을 듣고, 함께 기도하고, 서로가 받은 은혜의 선물을 나누고,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머리만 가지고 모인 관념공동체가 아니라, 음식을 함께 나누는 생활공동체였던 것입니다.


• 핑계의 감옥


비유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공통점은 끝내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 가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내세운 불참의 명분은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그 잔치 자체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의 초대에 기꺼이 응하며 사십니까?

아니면 그 초대를 짐짓 외면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비유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바로 오늘 우리의 자화상이 아닐까요?

우리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미루곤 합니다.

언제나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타성에 젖은 사람들의 모습이 이러합니다.

‘준비가 다 되었으니 오십시오’ 하는 주인의 초대에 밭을 산 사람은

 새로 산 밭에 나가봐야 한다며 초대에 응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소유에 집착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재산 불리기에 온통 마음을 빼앗겨 주님의 생명 잔치에 참여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계량화해서 생각합니다. 이익이냐 손해냐가 그의 판단 기준입니다.

이런 사람은 신앙조차도 어떤 이익이 있는지를 먼저 계산합니다.

그는 잔치자리에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시간 낭비로 여깁니다.

소를 산 사람은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시험하러 가는 길’이라며 초대에 응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인생의 의미가 일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끊임없이 일을 만들어 냅니다.

그에게 있어서 최대의 악덕은 게으름입니다. 그는 다른 이들과 어울려 괜히 노닥거리는 이들을 뜨악한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호젓한 산길을 걷거나, 강을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저녁놀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는 스스로 부과한 일을 처리하느라 하나님과 이웃의 초대를 외면하며 살아갑니다.

세 번째 사람은 ‘내가 장가를 들어서, 아내를 맞이하였소. 그러니 가지 못하겠소’ 하고 핑계를 댑니다.

이 핑계는 성서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신명기 법전은 “아내를 맞은 새신랑은 군대에 보내서는 안 되고, 어떤 의무도 그에게 지워서는 안 됩니다.

그는 한 해 동안 자유롭게 집에 있으면서, 결혼한 아내를 기쁘게 해주어야 합니다”(신24:5)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군대에 가는 일조차 면제해주는 판이니 잔치 초대를 거절하는 것쯤은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주인의 초대를 받았을 때 꼭 참석하겠다고 약속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은 주님이 마련하신 잔치에 응하지 못할 만큼 소중한 일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영원히 하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할 것입니다.



• 초대는 매일 온다


자기가 하는 일이 너무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기회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잔치에 참여해 자기 비위에 맞지 않는 이들과 사귈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그들은 다 부유하고 넉넉한 사람들입니다.

밭을 사고, 소를 사고, 결혼을 하고…. 그들은 행복을 위해 굳이 타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시편 17편의 시인의 노래가 떠오릅니다.

“주님, 이 세상에서 받을 몫을 다 받고 사는 자들에게서 나를 구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몸소 구해 주십시오.

그들은 주님께서 쌓아 두신 재물로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남은 것을 자녀에게 물려주고

그래도 남아서 자식의 자식들에게까지 물려줍니다.”(14)

초대를 거절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받을 몫을 다 받고 사는 자들’이었습니다.

주인은 노했습니다. 그래서 종들을 시켜서 초대받지 않았던 이들을 부르십니다.

“어서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을 이리로 데려 오너라.”(21) 이들은 한마디로 우리가 늘 대면하며 살면서도

짐짓 외면하곤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땀내 나고,

더럽고 위험해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인의 초대에 기꺼이 응했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함께 사는 삶의 아름다움을 잘 아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창녀들이 오히려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21:31b)고 하셨습니다.

그래도 잔치 자리에 빈 자리가 있다는 보고를 받고 주인은 ‘큰길과 산울타리로 나가서,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워라’(23) 하고 지시합니다.

이들은 한마디로 말해 낯선 사람들입니다.

이 비유를 듣는 사람들은 아마도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을 가리킨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우리와 문화도, 언어도, 피부색도, 종교도 다른 사람들도 주님의 초대를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 머물고 있다 하여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초대에 응하는 사람이라야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초대는 매일 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나와 함께 즐거워하자’며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강물 곁으로 부르기도 하고, 산그늘 아래로 부르기도 하고, 흘러가는 구름 속에서 부르기도 하고,

피어나는 꽃 속에서 부르기도 하십니다. 고통 받는 형제자매들의 신산스런 삶의 자리로 부르기도 하고,

찢기고 파헤쳐진 산하를 회복하는 자리로 부르기도 하십니다.

많은 이들이 바쁘다는 핑계로,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핑계로 그 초대에 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쓸쓸하게 만들고 자기 삶도 불모의 땅으로 만듭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통렬하게 다가오는 구절은 24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초대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서는, 아무도 나의 잔치를 맛보지 못할 것이다.”

행여 우리도 여기에 속한 것은 아닌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 우리는 주님의 초대에 응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비상소집에 응할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삶이 제 아무리 분주하다 해도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며 사는

어리석은 이들이 되지 마십시오.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 삶이 생명의 축제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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