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엡4:17-24
[그러므로 나는 주님 안에서 간곡히 권고합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이방 사람들이 허망한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과 같이 살아가지 마십시오. 그들은 자기들 속에 있는 무지와 자기들의 마음의 완고함 때문에 지각이 어두워지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습니다. 그들은 수치의 감각을 잃고, 자기들의 몸을 방탕에 내맡기고, 탐욕을 부리며, 모든 더러운 일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는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 관해서 듣고, 또 그분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면,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 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그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 참 험한 세상
이제 처서가 지났으니 우리 마음을 제 자리로 돌려놓아야 할 텐데, 세상은 여전히 거칠고 마음은 스산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제15호 태풍 볼라벤이 다가오고 있어 농어민들의 마음이 타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는 하루에도 여러 번 빛과 어둠이 교차합니다.
문태준의 시집을 뒤적이다가 “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
(<빈집의 약속>)라는 구절과 만났습니다. 우리 마음에는 볕 좋은 마루가 들어와 살기도 하고,
눈보라가 몰아쳐 마음이 서럽기도 합니다. 그게 인생이겠지요. 하지만 요즘 세상일 돌아보면 괜히 서글퍼집니다.
흉악한 일들이 참 많습니다. 의정부 지하철 흉기 난동 사건이 일어나고, 수원 살인 사건이 나더니
며칠 전에는 여의도에서 칼부림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사회생활에서 좌절하거나 사회에 대해 막연한
적개심을 가진 사람들이 벌이는 그런 범죄를 일러 ‘자포자기형 범죄’라고 부릅니다.
여의도에서 칼부림을 한 사람은 무직자인 자신이 한심해서 자살하려고 했지만 혼자 죽기 억울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이용만 당하고 내쫓긴 것에 앙심을 품고 동료들에게 앙갚음을 하기 위해 그런 일을 저질렀습니다.
실직자들의 한숨과 절망, 미래에 대한 희망조차 허락받지 못한 사람들의 원한감정이 그런 범죄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에 대한 선망이 아니라 증오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행복의 기회를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자기 영혼조차 잃어버렸다는 점에서 이중으로 소외된 이들입니다. 그들은 외롭습니다.
사회가 어떤 대책을 내놓지 않는 한 이러한 범죄는 늘어갈 것이고 우리 사회는 한결 더 위험한 곳으로 변할 겁니다.
홀로 버려진 것 같은 외로움에 대한 처방은 무엇일까요? 저는 미국의 평화운동가인 도로시 데이의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우리는 모두 숙명적으로 외로움을 느낀다. 이 외로움 앞에 내놓는 이번 삶의 유일한 답은 공동체다.
함께 살고,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누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
사랑하는 그 형제와 공동체를 이루어 가까이 살아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보여야 한다.”(도로시 데이, <<고백>>, 복 있는 사람, p. 425)
기쁨과 슬픔, 아픔과 서러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공동체가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위안인지 모릅니다.
신앙 공동체는 처절하게 외로운 이들을 품어 안을 만큼 품이 커져야 합니다.
세상이 제시하는 행복을 따라가다가 낙심한 이들에게 뭔가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어야 합니다.
• 윤똑똑이
“여러분은 이방 사람들이 허망한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과 같이 살아가지 마십시오.”(17b)
기독교인은 하늘의 뜻을 중심으로 자기 삶을 재구성하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삶의 자리는 결국 현실입니다.
마음을 불쾌하게 하는 사람과도 만나야 하고, 원치 않는 상황에 휘말리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더욱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허망한 생각으로 살아가는 삶이란 영적인 분별력 없이
그저 자기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삶을 가리킵니다. 18절에는 ‘허망한 생각’을 보충해주는 단어들이 몇 개 등장합니다.
‘무지’와 ‘마음의 완고함’이 그것입니다.
무지는 우리 시대 사람들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 말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이전 시대 사람들에 비해서 정말 많은 것을 압니다.
지식의 총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보급된 스마트폰이 3000만 대가 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스마트한 시대입니다. 그걸로 게임도 하고 드라마도 보고 화투도 치고 누군가와 접속하기도 합니다.
부지런하기만 하다면 무한한 정보를 획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지합니다.
바울은 사람들은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다(롬1:22)고 말합니다.
옛 사람은 ‘남을 아는 것을 일러 지혜롭다 하고 자기를 아는 것을 일러 밝다’(知人者智, 自知者明, 노자 33편)고 했습니다.
지혜란 세상에서 자기의 위치를 알고, 자신을 둘러싼 상호 관계를 잘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정보가 많아져도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능력이 저절로 늘어나지는 않습니다.
자기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는 것은 많으나 정말 알아야 할 것은 하나도 모르는 이들을 일러 윤똑똑이라 합니다.
윤똑똑이들이 만들어내는 세상은 차갑습니다. 차갑고 무정한 세상에서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자기 마음을 갑각류처럼 단단하게 만듭니다. 스스로 움츠리고 있으니 더욱 외롭고 쓸쓸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마음이 어두워지면서 영적인 민감함이 사라집니다.
‘세상이 다 그렇고 그런 거지’ 하면서 자신의 비겁함과 무정함과 완고함을 정당화합니다.
부끄러운 일을 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릅니다.
바울은 그런 마음이 빚어내는 삶이 방탕과 탐욕이라고 요약합니다.
• 다른 세상을 보는 사람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성도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연합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세상에 대해 죽은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쉽지 않은 요구입니다. 현실은 끊임없이 우리를 방탕과 탐욕 쪽으로 끌어당깁니다.
거기에 저항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무기력하게 유혹에 넘어갑니다.
처음에는 자기의 못남을 아파하고 후회하기도 하지만 점차 덤덤해집니다. 타락은 그렇게 완성됩니다.
기독교인들은 자기 자신의 비겁과 무능과 탐욕과 이기심에 대해 민감해야 합니다.
새로운 삶은 그러한 자기 모습에 대해 아파할 때 시작됩니다.
사탄은 우리 양심을 마비시켜 죄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듭니다.
성령은 우리 양심을 깨워 죄에 대해 아파하게 만듭니다.
자신의 죄와 허물에 대해 진심으로 아파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빚으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새 사람이 될 때 가치관이 새로워집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와 만난 이후에 이전에 소중했던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겼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닮고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을 깨닫는 것이 가장 소중한 인생의 목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주님 안에서 거듭난 사람의 삶을 몇 가지 인상적인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는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이요, 하나님을 위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롬6:11)입니다.
둘째, 자기 지체를 의의 연장으로 하나님께 바친 사람(롬6:13)입니다.
셋째, 거룩함에 이르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는(롬6:19) 사람입니다.
그 마지막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기쁨과 평안을 맛봅니다.
이 기쁨과 평안함은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은 데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그 마음을 알아드리는 사람이 된다는 것처럼 귀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웃들을 경쟁과 질시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함께 살라고 보내주신 소중한 존재로 바라보게 된다는 것,
여기에 진정한 안식이 있습니다. 그런 귀한 경험을 한번이라도 한 사람은 이전과 똑같이 살 수는 없습니다.
아주 조금씩이라도 삶의 변화가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 그리스도를 어떻게 배웠는가?
현악기를 다루는 이들은 연주하기 전에 기준음에 맞춰 악기 줄을 조율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된 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줄이 너무 팽팽해도 안 되고, 너무 느슨해도 안 됩니다. 삶도 똑같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모방하며 살아갑니다.
프랑스의 어느 철학자(르네 지라르)는 인간의 욕망을 ‘매개된 욕망’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뭔가를 욕망하는 것은 그것이 꼭 필요해서라기보다는 누군가가 우리 속에 질시의 감정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명품에 대한 욕구는 그것이 최상의 상품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소유한 이들에 대한 선망 때문입니다.
삶의 문제는 결국 무엇을 자기 삶의 기준음으로 삼을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자기보다 형편이 나은 사람만 바라보는 사람은 언제나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의 기준음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 사도는 방탕과 탐욕에 찬 삶을 경계하면서 성도들에게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에 대해’라고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를’이라고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생활은 그리스도에 대한 객관적 정보를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대해 많이 안다 하여 경건한 사람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자신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분의 심정과 그분의 마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섬겨달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마음을 알아달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이런저런 이유로 세상에서 천대받는 사람들의 아픔을 누구보다 아파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분에게 당신과 무관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함부로 대해도 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인간답게 살지 못하도록 만드는
종교와 제국의 지배에 대해 분노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시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온전히 바치셨습니다.
주님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 나의 양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까?
그 마음을 얻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표입니까? 우리는 이 목표를 망각할 때가 많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어버리면 신앙은 습관이 됩니다.
주일이면 교회에 나오기는 하지만 마음의 변화, 삶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사야는 그런 이들을 가리켜 성전의 마당만 밟는 자들이라고 말했습니다.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교회에서도 세상의 방식과 가치관을 적용하려 합니다.
그래서 신앙공동체를 어렵게 만듭니다. 옛 사람의 습성을 벗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 새 사람 입기
썩어 없어질 그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합니다.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표현이 우리에게는 낯설지 모르지만 초대교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말은 세례를 통해 새로워진 사람들의 상태를 상징적으로 일컫는 표현이었기 때문입니다.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것은 물론 마음먹는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 늘 새롭게 일깨워져야 합니다.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24)
요트를 타는 이들이 바람을 향해 돛을 펴듯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영을 향해 늘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삶은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이라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것은 어떤 삶일까요?
아주 소극적으로는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삶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지는 못한다 해도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상처를 입히지 말자고 결심만 해도 우리 삶은 아름다워집니다.
성도들은 자기의 자리 혹은 권력을 이용하여 사회적 약자들에게 돌아갈 몫을 가로채는 일을 그만 두어야 합니다.
사실 의로운 삶과 거룩한 삶은 구별되지 않습니다. 이사야는 그 사실을 절묘하게 보여줍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6-7)
믿음의 사람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모든 사람을 소중한 사람으로 대해야 합니다.
날마다 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려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일상이 성화됩니다.
믿음의 사람은 누군가에게 기댈 언덕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묻지마 범죄’가 늘어나고 있는 세상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의 희망으로 부르십니다. 죽었던 나사로를 살려내신 예수님은 “그를 풀어 주어서 가게 하여라”(요11:4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절망에 손발이 묶인 사람들을 풀어 주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처서가 지났으니 이제 가을이 눈앞입니다.
여름을 보내며 이제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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