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해 웅천교회
주기철 목사의 고향인 경남 진해에는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교회가 있다. 주 목사는 13세 때인 1910년 12월 25일 경남 진해시 성내동 소재 웅천교회로 나와 예수를 믿게 됐다. 웅천교회는 1900년 세워진 것 외에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1889년 호주장로회에서 데이비스 목사와 그의 누이 메리를 파송했다. 데이비스는 한국에 온 지 1년만에 도보 선교여행 후유증과 천연두로 부산 부근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호주장로회에서는 오히려 더 많은 선교사를 파송했다. 이를 근거로 호주장로교단의 활약이 두드러졌고 경남지방 특성상 그들의 영향으로 웅천교회가 세워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현재 웅천교회에서는 주기철 목사의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 수련관을 건립하기 위해 ‘주기철 목사 생가복원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글·이주희 기자)
주기철 목사 생가, 현재 공터인 생가는 복원 작업이 추진중이다.
진해 웅천 주기철 생가, 교회 기념관 (출처- 매일신문사 정우용 기자/200701)
주기철 목사가 웅천교회 집사일 때 기록한 헌금록,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전시
경남 양산읍교회 전도사 시절(1922-25), 앞줄 중앙이 주기철 전도사
웅천교회 마당에 있는 주기철목사 순교기념비 (사진·김용두 기자)
마산 문창교회 (출처- http://cafe.naver.com/ma77)
1889년 호주장로회에서는 데이비스 목사와 그의 누이 메리를 파송했다. 데이비스는 한국에 온 지 1년만에 도보 선교여행 후유증과 천연두로 부산 부근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호주장로회에서는 오히려 더 많은 선교사를 파송했다. ‘경남 지방 어머니 교회’라는 별칭이 붙은 문창교회는 바로 이같은 배경으로 마산시에 처음으로 세워진 교회다. 1901년 창립시에는 마산포교회였다가 1919년 신축예배당을 추산동으로 옮기면서 문창교회로 교회명을 바꾸었다. 주기철 목사가 부임한 1931년 7월은 교회내부 사정으로 어려운 시절이었다. 주 목사는 1936년 평양 산정현 교회로 떠날 때까지 교회 안정에 힘을 쏟았다. 이를 기념해 문창교회 역사관에는 무학산에서 주 목사가 기도하던 십자가 모양의 금 간 바위를 축소 보관하고 있다.
(마산=글·이주희 기자/사진·김용두 기자)
마산 문창교회, 두번째 목회한 1950년대 교회모습
초량교회
초량교회(부산광역시 동구 초량1동 1005번지)는 순교자 주기철 목사가 목사안수를 받은 뒤 처음으로 부임해 사역(1926∼1931)한 곳이다. 1892년 미국 선교사인 윌리엄 베어드 목사에 설립된 초량교회는 1920년 호주 선교부 소유의 초량동 땅에 교회를 지으면서 급성장했다. 일제시대 임시정부 소속 광복군을 지원하기 위해 비밀모임이 초량교회에서 자주 있었는데, 그중 윤현진 집사는 임시정부의 재무차장이 되어 왕성한 활동을 벌이다 상해에서 병사하기도 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항해 교인 중 많은 이들이 투옥되거나 교회에서 추방된 사람이 많아 고등계 형사들로부터 엄격한 감시를 받았다. 이때 교인명부와 헌금 등 교회성도들 사이에서만 은밀히 통용된 자료가 초량교회 역사관에 잘 보관돼 있다. (부산=글·이주희 기자/사진·김용두 기자)
초량교회 주기철 목사가 쓰던 강대상
1926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초량교회 담임목사가 된 주기철 목사를 기리는 유품이 초량교회 제일 꼭대기에 있는 역사 전시관에 있다. 바로 주기철 목사가 쓰던 강대상(사진). 1926년부터 1931년까지 시무한 주기철 목사의 순교정신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전시관에 보관된 노회록과 직원회록에 보면 주기철 목사의 활동내역이 자세히 나와있다. 부임 후 주기철 목사는 주일학교 활성화에 힘을 쏟았다. 또한 교회 형편이 어려운 마산교회(문창교회)로 가기 위해 초량교회에서의 6년 사역을 내려놓았을 때 성도수 200명이 채 안됐던 교회는 배가 넘는 400여 명의 성도가 있는 교회로 성장해 있었다. 선교사 베어드 목사에 의해 설립된 초량교회는 영선현, 영주동, 초량으로 옮기는 과정을 통해 한강 이남의 어머니 교회로서 부산지역 선교와 민족 복음화의 구심점으로 지난 112년간 말씀을 지켜오고 있다. (부산=글·이주희 기자/사진·김용두 기자)
주 목사가 목회하던 평양 산정현교회
1936-1944년까지 주기철 목사가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사용하던 강대용 성경
산정현 교회 주기철 목사 장례식 장면 (출처- 매일신문사 정우용 기자/200701)
평양 산정현교회 교인들
평양 산정현교회
1996년 현재 남한에는 평양 산정현교회를 모체로하여 뿌리를 두고 있는 산정현교회가 4개 교회이다. ① 서울 용산구 후암동 406-5에 소재한 산정현교회는 1907년의 장로교 처음 조직인 독노회의 정신적, 역사적 맥을 수진자들에 의하여 이어오는 교회로 위에 기술한 연혁의 역사성을 가지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② 서울 서초구 서초동 494-3에 소재하고 있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측에 속해있는 산정현교회는 1964년에 후암동 산정현교회에서 분립해나간 교회이다.
③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10-2에 소재하고 있는 산정현교회는 평양에서 수진자들과 혁신복구적 의견의 차이로 마찰을 빚다가 수진자들이 덕이 안되는 마찰을 피해 산정현교회를 떠나자 그곳에 남아 예배드리던 이들이 6.25가 일어나자 남하하여 세운 교회로 통합측에 속해있다.
④ 부산 사하구 괴정3동 284-3에 설립된 산정현교회는 6.25사변으로 피난온 평양산정현 교회 교인들이 서울로 올라와서 후암동 산정현교회를 설립하기위해 임시로 회현동에 적산가옥을 얻어 예배드릴때 부산에 잔류한 일부교인들에 의하여 설립된 교회로 현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에 속해있다.
양지 총신대 100주년 기념 예배당, 주기철 목사 기념 기도실이 있다
총신대 기념 예배당 내 주기철 목사 기념 기도실
양지 한국 100주년 순교자 기념관 뜰 주기철 목사 추모비
경남지역의 기독 유적지 , 국민일보 2003-04-09
부산·경남지역은 짙은 향토색 때문에 기독교 유적을 찾기 힘들다. 그러나 꼭 기억해야 할 몇몇 교회가 있다. 부산진교회와 함께 부산 기독교의 한 축을 차지하는 초량교회. 1892년 미국 북장로회 소속 베어드 선교사가 영선현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시작됐으며 교회에 역사전시관이 설치돼 있다. 특히 1926∼32년 교회를 담임했던 주기철 목사가 사용한 강대상도 잘 보존돼 있다. 군항 진해에서는 웅천교회를 반드시 찾아야 한다. 주기철 목사의 신앙이 싹튼 곳이기 때문이다. 1897년 태어난 주기철 목사는 1910년 예수를 영접했다. 주 목사는 1916년 오산학교를 졸업한 후 연희전문으로 진학했다. 그러나 안질에 걸려 1년만에 낙향했으며 1919년 웅천교회에서 집사 직분을 받았다. 이 기간에 주 목사는 인생의 진로를 바꾸게 된다.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린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은혜를 받고 1922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초량교회에서 위임목사로,1931년 문창교회에서 목회했다. 특히 초량교회 시절, 신사참배 거부안을 경남노회에 제출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마산 문창교회 역시 부산· 경남지역을 답사할 때 꼭 찾아봐야 할 곳. 영남지역의 모교회다. 독립운동가이며 부통령을 지낸 함태영 목사가 시무한 교회며 주 목사가 1931∼36년까지 이곳에서 사역했다.
주기철 목사 생가 복원 작업
경남 진해시 성내동 웅천교회(담임 오성한 목사)에 설치된 '생가복원운동본부'는 웅천1동 주 목사의 생가터 등을 매입, 생가를 복원하고 수련원을 설립하기로 하고 모금에 들어갔다. 주 목사가 태어난 집은 현재 공터로 있으며, 유년기 살았던 생가는 남의 손에넘어갔다. 생가복원운동본부는 생가복원, 기념관.수련원 설립 등을 통해 이곳을 신앙교육과 순교수련 등의 훈련장으로 삼을 계획이다. 본부측은 현재 주 목사의 사료를 찾고 있다. 현재 주 목사를 다룬 저작은 200여권이 발행돼 있으며 논문은 300여편에 달하나 각 지역 도서관이나 개인 소장 등으로흩어져 있는 실정이다.
한국 순교자 기념과의 주기철 목사 사진
주기철 목사
주기철 목사
주기철 목사의 생애
1. 성장기
주기철(1897~1944) 목사는1897년 11월 25일 경상남도 창원군 웅천면 복부리(현재 진해시 웅천 1동)에서 주현성씨의 4남 3녀 중 네째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웅천은1595년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 시(소서행장)가 웅천성에서 수많은 왜군을이끌고 조선병사들을 무참히 학살했던 비운의 역사현장이기도 하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일제가 웅천에 다시 침략해올 것을 우려했던 주목사 일가의 어른 주기효는 민족 수난을 극복하기 위해선 힘을 길러야 한다면서 이곳에 1906년 개통학교를 세웠는데 어린 기철은 이학교에 입학,투철한 민족정신과 남다른 민족애를 키웠다. 주씨 가문의 큰형 주기원이 1907년에 교회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하여 한일 합방으로 전국이 우울했던 그 이듬해 1월 7일에 학습을 받고 10월 5일에 입교를 하기 시작하여 온 식구들이 믿음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웅천교회에 있는 당시의 생명부 기록에 의하면 주기복(주기철 목사 아명)은 1910년 12월 25일 성탄절에 형님의 권면으로 성탄절 행사를 즈음하여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그의 아버지 주현성은 1914년부터 출석하기 시작하여 조재선(주현성의 처), 주기원(주현성의 장남), 황덕황(주기원의 처), 주국영(주기원의 장남), 주영민(주기원의 2남), 주영숙(주기원의 3남), 주영옥(주기원의 장녀), 주수원(주기원의 2녀), 양호아(주국영의 처), 주기정(주현성의 3남), 주용선(주기찬의 장녀), 주재용(주기찬의 장남), 주영우(주기형의 장남), 주기용(주현관의 3남), 주영혁(주기채의 장남), 주영문(주기채의 2남), 주길선 (주기채의 장녀), 주말순(주현식의 2녀), 주상신(주기우의 장녀) 등의 기록을 볼 때 주씨 가문이 대거 웅천교회를 출석했던 것이다. 이즈음 그의 맏형인 주기원은 이곳에 웅천교회를 세워 목회활동을 시작했는데 어린 기철은 이교회에 열심히 다녀서 `소년 목사'라는 칭호를 듣기도 했다고 한다. 주기복은 13세의 나이인 개통학교 5학년 때에 웅천교회에 나갔다. 그는 웅천교회에서 민족의식과 애국심, 신앙심을 키우며 큰 꿈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개통학교 7년과정을 마칠 무렵, 그는 당시 부산에서 우연히 춘원 이광수 애국강연을듣고 (강연내용- "여러분, 나라는 망했습니다. 젊은이들은 비탄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닙니다. 부지런히 배우고 힘을 길러야 합니다. 그래야만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찾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분발을 하면 우리도 세계의 일등 국민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과 용기를 가지고 국운을 개척하는 선봉이 됩시다. 민족 운동가 남강 이승훈 선생께서 설립한 오산학교에서는 구국의 도량이 될 전국의 인재를 모아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민족 교육의 전당, 오산학교에 와서 공부하십시오. 뜻이 있는 곳에 반드시 길이 있습니다." ) 감동을 받아 춘원이 교장 대리로 있던 평북 정주의 오산 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정한다. 오산학교에 진학한 그는 그곳에서 민족 지도자인 이승훈을 비롯, 조만식, 서춘선생등을 만나 철저한 민족교육과 함께신앙교육을 받았다. 주기철은 1916년 오산학교를 졸업한 뒤 그해 4월 선교사들이 세운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입학한지 몇달도 채 안돼 지병인 안질이심해져 학업을 중단해야할 지경에 이르렀다. 할수 없이 학업을 포기하고낙향한 그는 웅천교회에서 집사로 봉사하면서 동시에 교남학교에서 교편을잡으며 야학과 청년운동에도 정열을 쏟았다. 이즈음 그는 김해 교회 이기선 목사의 중매로 안갑수와 혼인을 한다.
2. 성령체험과 목회의 길
주기철은 1920년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린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해 뜨거운 성령체험을 한뒤 목사가 되기로 결심, 22년 3월 평양장로회신 학교에 입학했다. 어느날 스승 남강 이승훈 선생이 평양신학교를 방문하였다. 남강도 이 학교를 다녀었다. 그는 독립운동 33인 중 한 분으로 3년 가까운 옥고와 여러 차례의 옥고를 치렀고 오산학교도 불질러버려 새로 학교를 세우느라 모교를 오랜만에 찾았고 그의 나이가 60이 넘은 노인이 되어 버렸다. "기철 군, 자네는 여기 신학교를 마치고 나서 동경 고등사범학교를 계속하게나. 그런 다음에 우리 오산학교를 자네가 맡아 달라는 말일세." 기철은 스승의 부탁에 호응하지 못해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두 사람은 헤어졌다. 남강 선생이 교문을 떠나는 모습이 기철의 눈에 쓸쓸하기 그지없이 보였다. 기철은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그에게 주어진 기회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그는 마포삼열 교장을 비롯, 배위량, 왕길지, 곽안련, 나부열 등 쟁쟁한 교수진으로부터 철저한 신학교육을 받게 된다. 당시그는 출신도 별로 나뉘어 있던 기숙사 제도의 맹점을 학교당국에 시정토록건의, 혼합방식을 채택토록 하는 선도적 역할을 해내기도 했다. 신학교 재학시절 양산읍 교회 전도사로 시무한 그는 1925년 12월 신학교 졸업과 함께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부산초량교회 위임 목사로 부임을 했다. 첫 부임지인 초량교회에서 그는 헌신적이고도 정열적으로 목회활동을 한다.
3. 신사참배 거부
주기철은 1925년 12월 22일(화), 평양 신학교를 19회로 졸업하게 되었다. 졸업 대표로 답사를 했다. 주기철은 1926년 봄에 부산에 내려가 초량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곧이어 초량교회의 위임목사가 되었다. 만 28세의 어린 나이에 33년의 전통을 가진 부산에서 제일 큰 교회 목사가 된다는 것이 그에겐 부담이 되기도 하였지만 그는 잘 준비된 목사였음에 틀림이 없었다. 주기철 목사가 초량교회에 부임하기 전 1925년 10월에 서울에서는 조선신궁, 다시 말해 소위 일본 황실의 신을 모신 사당이 서울에 도착하였는데 이때부터 일본인 경기도 지사의 명령으로 서울 안에 있는 각급 학교의 학생들은 차례로 조선신궁에 가서 참배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신사참배를 하라는 것이었다. 주기철 목사는 이러한 일이 전국으로 확산될 것을 미리 예견하고 교회와 노회에서 이 일은 우리가 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기 시작하였다. 이유는 첫째가 하나님께 범죄행위요, 둘째, 우리 나라 국민이 일본의 천황을 숭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주기철 목사는 경남 총회에서 신사참배 반대 결의안의 기수가 되었던 것이다. 어떠한 시험과 핍박이 와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경성하여 싸워야 한다고 호소했다. 당시 그는 구덕산 기슭에 자기 기도처를 정해 놓고 수시로 밤샘 기도를 했는데 이튿날 내려 올 때 온몸이 비를 맞은 듯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고전해진다. 또 외출도 하지 않으면서 설교원고를 집필, 완성된 원고를 토요일 밤까지 수십번씩 낭독해 암송한 뒤에야 주일 설교에 나섰다고한다. 그는 또 이때 신사참배가 기독교 교리상 어긋난다며 `신사참배반대 결의안'을 경남노회에 제출, 정식 가결을 받아 내기도 했다. 그는 1936년 마산 문창교회에 이어 평양 산정현 교회에 부임해 갔는데 이즈음 일제는 신사참배라는 무기로 한국교회의 목을 죄어오기 시작했다. 일제는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교인들을 모조리 구속하고 고문하는 잔악성을드러내기 시작했다. 탄압이 계속되자 당시 평양에서 열린 제 27회 장로회총회에서는 굴욕적인 신사참배를 공식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무기력하게 신사앞에 무릎을 꿇었지만 주목사와 그와 뜻을 같이하는 일부 목회자들은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본군의 총칼 앞에 당당히 맞섰다. 주기철 목사의 초량교회 사역 가운데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유치원을 개원했다는 것이다. 1931년 3월 20일 제1회 유치원생 10명을 배출시켰던 것이다. 어릴 때의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요즘도 교회가 하기 쉽지 않은 유치원을 당시에 시작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사람을 키울 줄 아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유치원을 개설한 일은 조국의 미래를 내다 볼 줄 아는 눈이 있었던 지도자적인 기질에서 나온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어릴 때의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분이었다. 나이 30세에 이러한 안목을 가졌다는 것에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에 유치원은 오늘날은 유치원이 흔하여 유치원을 나오지 않은 아이들이 없지만 당시엔 유치원이라는 이름조차 몰랐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주기철 목사가 설립했던 유치원은 지금도 초량교회에서 삼일유치원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유치원을 운영 중이다. 어느날 마산 문창교회에서 목사님을 초빙해 가려고 사람들이 왔다.당시 마산 문창교회는 여러 가지 갈등으로 당시에 교회가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목사님, 목사님이 아니시면 우리 교회가 다시 세워지기 힘든 위치에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 오셔서 교회를 안정시켜 주시고 저희들을 먹여 주십시요."라는 요청에 주기철 목사는 하나님의 부름받은 몸이 지금보다 어려운 교회에 가서 섬기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안정되고 인정받던 초량교회를 사임하고 마산 문창교회로 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교인들은 대성통곡을 하며 목사님을 말렸다고 한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는 "이 교회는 안정이 되고 좋은 교회니 내가 없어도 되고, 힘들고 어려운 교회가 있으니 하나님의 부름인 줄 알고 떠난다"고 하면서 성도들을 안정시키고 마산 문창교회로 부임해 갔던 것이다.이러한 수고와 노력으로 마산 문창교회를 평안하게 이끌어 갈 수 있었다. 마산 문창교회에서의 주기철 목사의 사역 중에 꼭 기억할 만한 일은 그가 어디를 가든지 미래에 기둥이 되는 인재들을 양성하는 일에 부단한 노력과 수고를 아끼지 않았음이다. 나라가 튼튼해지는 일이 인재를 양성하는 일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어느날 멀리 평양에서 그의 스승이었던 고당 조만식 장로와 김동원 장로가 산정현교회 대표로 주기철 목사를 찾아왔다. 오랜만의 만남은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얼마나 그리워하고 보고 싶었던 얼굴인가. 서로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전한 후 조만식 장로가 오게 된 목적을 밝히며 평양 산정현 교회로 초빙하게 되어 주기철 목사는 평양으로 향하게 된다. 당시 평양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마산 문창교회를 두고 가는 섭섭함이 있었지만 순교의 땅인 평양의 부름을 받아 가게 된 것이다. 4. 투옥 생활
주목사는 1938년 부터 1944년 마지막 순교를 할 때까지 모두 5차례 총 5년 4개월 간의 투옥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옥중에서 몽둥이 찜질, 채찍질, 쇠못 밟기, 거꾸로 매달아 코에 고추가루 뿌리기, 발바닥 때리기 등 상상도 할 수 없는 갖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내 신앙적 변심을하지않았다. 7년 동안 구속과 석방을 거듭하며 안질, 폐병, 심장병 등이악화돼 폐인이 되어갔지만 감옥에선 언제나 평화로운 얼굴로 성경말씀을 묵상하며 감사찬양을 했다고 한다. 5번째로 구속돼 형무소에 갇히기직전 자택에서 늙은 노모와 처자, 20여명의 평양산정현 교회 교인들이 모인 가운데 그는 생애 마지막 설교를 남긴다. "우리 주님 날 위해 십자가 고초 당하시고 십자가 지고 돌아가셨는데 나 어찌 죽음이 무섭다고 주님을 모른체 하리이까. 오직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전에 찍어야 시퍼렇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이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에 드려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5. 유언과 순교
그는 투옥된 이후 취조와 고문을 혹심하게 당했다. 그로 인하여 그의 몸은 약해지고 드디어 그는 옥중에서 순교를 하게까지 되었다. 때는 1944년 4월 13일이었는데 그날 사모님과 마지막 면회시에 남긴 말을 다음과 같다. "어머님 뵈옵구 싶구려...미음도 먹고 싶소...나는 가나 산정현 양떼들은 어찌하리이까?" 이때 사모님되시는 오정모 집사님은 "그는 염려하지 마십시오"하고 위로하였다. "그러면 안심하겠소. 어머님을 많이 위로해 드리시오." 이 말을 최후로 사모님과는 작별했다. 1944년 4월 21일 금요일 밤 9시 숱한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의 몸은 평양형무소의 한 귀퉁이에서 그날 밤 9시 30분에 주목사님은 49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내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를 붙잡으소서"하시고 웃으며 운명하셨다.
그는 첫 번째 부인을 사별하고, 두 번째 부인과 결혼하는 등 개인적으로 고난도 많았지만, 신앙적인 나라 사랑을 굳건하게 지킨 기독교 민족주의 목회자의 대표자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의 맏아들 주영전 전도사도 1950년 6.25 기간중 공산당에게 살해당하는 순교의 길을 걸었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공로 국민장을 추서하였고, 1986년 국립묘지에 안장토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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