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 창세기 1:24~28, 3:21, 17:1~8, 갈라디아서 3:6~7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6~28).
1. 하나님의 피조물
(1) 삼위일체 공동사역
성삼위께서 공동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위는 셋이시나 한 분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무슨 일을 완전히 한 위가 단독으로 하시는 일은 없습니다. 혹 성경에 삼위의 이름 다함께 기록되어 있지 않는 경우가 있기는 하나 그래도 그것은 기록이 없을 뿐이지 어떠한 한 위가 완전히 단독으로만 역사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때에도 성삼위가 다 공동으로 역사하셨습니다.
창세기 1:26에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 ‘우리’라고 하는 복수대명사를 사용하신 것은 성삼위가 복수이기 때문에 이렇게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신 것이었습니다. 혹 이 우리라는 말은 겸손이나 장엄을 의미하는 복수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마는 그런 것은 아니고 성삼위의 복수라고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2)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26에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었다고 하셨는데 이 우리의 형상이란 무엇이고 우리의 모양이란 무엇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혹 어떤 사람들은 우리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았고 우리의 육신은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심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고 육신이 없는데 우리의 육신이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이고 또 하나님의 모양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이 두 단어는 다 같은 뜻의 말입니다. 같은 뜻을 다른 말로 기록한 것이 성경에는 많이 있습니다. 또 모양이라는 말은 성경 다른 곳에는 창세기 5:3에만 있고 그 외에는 다 형상이라는 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창 5:1, 9:6, 고전 11:7, 15:49, 골 3:10, 약 3:9). 그러므로 두 단어를 합하여서 형상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성품, 곧 그 속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때에 자기의 성질(속성)들을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찰스 하지 박사는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의 형상대로 만드심에 있어서 영이신 자기의 성질에 속하는 속성들을 부여하셨다”고 말하였습니다(인죄론 P. 97).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속성들을 어떻게 사람에게 주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속성은 사람의 이성, 양심, 도덕성 등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러한 속성들은 다 사람의 영혼, 심령에 반영되어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우리의 육체에도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정신이나 마음 혹은 영혼의 여러 기능에 있었다고 하지만 그러나 사람, 심지어는 육체의 부분에도 그 영광의 광채로 장식되지 않은 곳은 없었다”고 하였고(인죄론 P. 104), 박형룡 박사는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을 직접으로 제시하는 데 대하여 육체는 그것을 간접으로 제시한다”고 말하였습니다(인죄론 P. 109).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형상을 사람의 영혼에 직접 넣어 주셨고 또 사람의 신체에는 간접적으로 나타내 주셨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사람은 육신과 영과 혼의 세 가지 요소로 조성되어 있다고 말하나 사람은 육신과 영혼의 두 가지 요소로만 조성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 성경적이고 또 정상적인 학설입니다.
(3) 만물을 다스릴 권세를 주심
이렇게 사람을 자기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자기가 창조하신 모든 만물을 다스리라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1:28에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번영과 승리와 지배를 약속하시고 주권을 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까지 번영하여서 땅에 충만하고 온 땅을 정복하여서 승리하였고 모든 것을 다스리고 지배하여 왔습니다.
2. 불순종 - 타락
사람들은 범죄하고 타락하여 저주를 받고 완전 부패 전적 무능력하게 돼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어 에덴동산에 두실 때에 한 가지 행위언약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2:16, 17에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행위언약입니다.
이 언약의 내용을 분석하여 보면 “네가 선악과를 먹지 아니하면 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으면 죽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행위를 조건으로 하여 살고 죽는 문제가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행위언약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금령을 위반하여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명령과 금령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명령이라는 것은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 것이요, 금령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인데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시는 금령을 위반하여서 범죄하였습니다. 죄의 본질은 불순종입니다.
성경 소요리문답 14문에서 “죄는 하나님의 법을 순종함에 부족한 것이나 혹 어기는 것이다”고 대답하였고, 벌코프는 “죄는 행동에서나 성향에서나 상태에서나 하나님의 도덕적 율법에 대한 불순종이다”고 하였습니다(인죄론 P. 246).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모든 설명들을 결합하여서 “죄는 행동에 있어서나 말에 있어서나 생각에 있어서나 성향에 있어서나 상태에 있어서 하나님의 도덕적 율법을 불순종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범죄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대로 사람들은 정녕 죽게 되었습니다. 육신도 죽었고 영혼도 죽었습니다. 육신이 죽는다는 것은 육신과 영혼이 분리되는 것이고, 영혼이 죽는다는 것은 영혼이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범죄와 죽음은 아담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계승되어 왔습니다. 죄도 계승되어 왔고 죽음도 계승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 되었고 모든 사람이 다 죽었습니다.
죄와 죽음이 계승되는 것은 아담은 모든 인류의 대표자로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되어서 사람은 완전히 부패하였고 전적으로 무능력하게 되었습니다. 신령한 일은 아무 것도 모르게 되었고 거룩한 일은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칼빈주의자는 “범죄한 사람이 성령의 조명을 받지 못하면 신령한 일에 대하여는 두더쥐와 같이 우둔하다”고 하였습니다.
범죄한 사람도 농사를 하고 물건을 만들고 집을 짓고 아들딸 낳아서 키우고 이러한 일들을 다 할 수가 있습니다마는 신령한 일들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고 조금도 할 수가 없으니 신령한 일에 대하여서는 두더쥐와 같이 어리석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3. 구원 - 은혜언약
완전 부패, 전적 무능력으로 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언약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행위의 언약에서 실패하였습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는 행위를 요구하셨으나 사람들은 이 요구에 불순종하고 선악과를 따 먹었으므로 행위언약을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행위언약을 거절하고 범죄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이상 더 행위를 요구하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순종하는 행위를 조건으로 생명을 주겠다고 하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을 다 영원히 멸망하라고 내버려두실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저 은혜로 구원하시겠다고 하시는 언약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언약입니다. 행위언약은 완전히 순종하는 행위를 하면 구원하겠다 하시는 것이요, 은혜언약은 사람들이 완전히 순종하는 행위를 할수 없게 되었으므로 행위를 요구하지 아니하고 오지 은혜로만 구원하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3:7에 “이에 그들이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고 하였고, 또 창3:21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고 하였습니다.
7절에서 아담과 하와는 자기 생각대로 자기 방법으로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서 치마를 만들어 가지고 자기들의 부끄러움을 가리워 볼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무화과 나뭇잎 치마로 부끄러움이 가리워졌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래서 2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친히 동물을 잡아 가죽옷을 만들어서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 주셨습니다. 무화과 나뭇잎 치마로 어설프게 자기 몸을 가리우고 있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지어 입혀 주시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완전히 부끄러움이 가리워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짓기 위하여서는 동물을 잡으셨습니다. 어린양을 잡으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린 양을 희생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혀 주셔서 부끄러움을 가리워 주셨습니다. 이것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하셔서 그 의의 옷을 입혀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죄의 가리우심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은혜요, 이것이 복음입니다.
창세기 1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나의 언약을 너와 너의 후손 사이에 세운다고 하시면서 “너는 번성하라, 열국의 아버지가 되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내 백성이 되리라”고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은혜의 약속입니다. 신령한 약속입니다. 영적으로 우리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다 신령한 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다. 갈라디아서 3:7에 보면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아브라함과 함께 신령한 은혜의 약속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의 언약 아래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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