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 히브리서 11:1~6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11:1~3)
우리는 다 예수를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를 믿되 바로 믿어야 하고 참으로 믿어야 합니다. 아무리 오래 믿고 열심으로 믿는다고 해도 잘못 믿고 거짓으로 믿으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믿음이라고 인정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바로 믿어야 하고 참으로 믿어야 합니다.
1. 신앙의 조성자
신앙의 조성자(신앙을 만들어 내는 분)는 누구인가? 다시 말해 신앙은 사람이 자유로 믿고 싶어서 믿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주셔서 믿는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믿음은 내가 자유로 믿고 싶어서 믿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아니하고 성경도 또 그렇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야고보서 2:1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믿음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고로 데살로니가후서 3:2에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믿음은 사람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7:5에 보면 믿음은 이와같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사도들은 예수님에게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믿음 주시기를 간청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도 “더 확실한 믿음을 주시옵소서. 더 큰 믿음을 주시옵소서”하고 믿음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믿음의 내용
(1)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
믿음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6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아무리 열심을 내고 훌륭한 일을 많이 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무신론자들이야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마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도 하나님이 계신 것을 완전히 확실하게 믿지 못하고 희미하게 믿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디도서 1:16에 “저희가 하나님을 인정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무신론자들은 아닙니다. 생각으로, 사상으로, 관념으,로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행동으로, 생활로, 실천으로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부정하고 믿지 아니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관념적 유신론자·실천적 무신론자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초대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사도들의 전도하는 말을 듣고 크게 감동을 받아서 자기 재산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갖다놓고 유무상통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자기의 밭을 팔아서 그 판 값의 얼마는 감추어 두고 얼마만 사도들 앞에 가져다 놓고 이것이 전부라고 하였습니다. 이 부부는 베드로 사도의 책망을 받고 죽었습니다.
어떤 예수 믿는 학생이 시험을 칠 때에 컨닝(부정)을 하였다고 합니다.
어떤 예수 믿는 성도가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칠려고 따로 떼어 놓았다가 급히 돈이 필요하게 되어서 그 십일조를 써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사상적·관념적으로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생활로 실천으로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참으로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었으면 땅값 얼마를 숨겨 두고 이것이 전부라고 하지는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그 학생이, 그 성도가 참으로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었으면 컨닝을 하거나 떼어 놓았던 십일조를 써 버리지는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만일 어떤 날 어떤 성도가 하루종일 한 절도 성경 읽지 아니하고 한 번도 기도하지 아니하고 지냈다고 하면 그 사람은 그 날은 관념적 유신론자·실천적 무신론자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관념적으로 유신론자일 뿐만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유신론자인 성도들도 많이 있습니다.
형들의 미움을 받아서 애굽으로 팔려갔던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았을 때에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하면서 그 여인의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다른 사람 아무도 보는 사람, 아는 사람이 없지마는 하나님이 보시는데, 하나님이 아시는데 내가 어찌 범죄할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범죄하지 아니하였습니다(창 39:9참고).
다니엘 3장에 보면 느부갓네살왕은 큰 금신상을 만들어 놓고 다니엘의 세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 이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면 풀무불에 던지겠다고 위협하였습니다. 그러나 세 친구들은 신상 앞에 절하는 것을 거절하면서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그럴 것이면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서 건져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왕의 신상 앞에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단연 거절하였습니다.
이러한 요셉이나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강력한 관념적 유신론자일 뿐만 아니라 철저한 실천적 유신론자였습니다.
(2) 하나님 공경
기독교의 신앙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높이고 그를 섬기고 그를 기쁘시게 한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5:23에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아버지와 아들을 꼭같이 공경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과 꼭같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도 공경해야 합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공경하지는 아니하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모독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죽었다고 하는 사신신학(死神神學)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년 전에 이웃 나라의 어떤 대학의 신학부의 강단에 가보니 거기에 검은 조기(祖旗)를 세워 놓았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유를 물었더니 하나님이 죽었기 때문에 조기를 세워 놓았다고 하더랍니다.
예수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것은 물론 이해가 됩니다마는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하나님을 공경하지 아니하고 무시하거나 멸시하는 것은 참으로 불경한 일이고 불신앙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을 공경해야 하겠습니다(잠 3:9참고).
(3) 절대회개
기독교의 신앙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요단강가에 나타나서 제일 먼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외쳤고(마 3:2), 예수께서도 그 제일성(第一聲)으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4:17). 이와같이 회개는 신앙의 제일보입니다. 회개는 신앙의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런고로 회개하는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고 회개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칼빈은 ‘복음적 회개’는 “자기가 지은 죄를 아파하면서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보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기독교 강요》 3권 P. 185).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은 죄를 다 아시면서 어찌하여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라고 하시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하여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요한1서 1:9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여 주십니다.
그런고로 용서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회개해야 합니다.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회개해야 합니다(잠 28:13참고).
(4) 하나님 의지
기독교의 신앙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은 연약하고 불완전하고 죄가 많기 때문에 강하고 완전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람을 지으실 때에 자기 자신만 믿고 살라고 자존적 존재로 짓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강하시고 완전하시고 의로우심을 의지하고 살라고 의존적 존재로 지어 주셨습니다.
역대의 모든 성도들은 겸손하고 성실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시편 86:2, 115:9~11에 “…내 주 하나님이여 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할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방패시로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의지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도와 주시고 방패와 같이 지켜 주시고 보호하여 주십니다. 칼빈은 “믿음은 인간이 자신을 신뢰하던 태도와 대조해서 …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부단히 신뢰하고 나아가는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기독교 강요》 3권 P. 110).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를 거절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5) 소 망
기독교의 신앙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소망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1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믿음을 정의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믿음은 바라는 것(소망하는 것,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 실제로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는 것이고, 또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지금 볼 수 없는 것들)이 그대로 실제로 있는 것을 실증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나 그대로 있는 것을 믿고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소망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을 보지 못하였으나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우리가 보지 못하였으나 믿습니다. 하늘 나라 천국을 우리가 보지 못하였으나 믿습니다.
이렇게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들은 더 복된 사람들입니다. 그런고로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20:29에서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으나 믿습니다. 이렇게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들은 더욱 복된 사람들입니다.
칼빈은 신앙을 주관적으로 볼 때는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로서 지식적인 동의만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신뢰하고 요지부동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기독교 강요》 3권 P. 110).
또 로마서 8:24~25에서 바울 사도는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보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와같이 보지 못하는 것을 참으로 믿고 바라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3. 믿음의 필요성
(1)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필요합니다. 고린도후서 5:9에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를 기쁘시게 해야 하겠는데 그 기쁘시게 하는 방법은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6에서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말씀하였으니, 이 말씀을 반대로 해석하면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2) 구원을 받는 데
믿음은 우리가 구원을 받는 데 필요합니다., 요한복음 3:16과 베드로전서 1:9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3) 의를 이루는 데
믿음은 의를 이루는 데 필요합니다.
창세기 15:6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14:23에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고 말씀하였으니, 이 말씀도 반대로 해석하면 믿음으로 좇아 하는 모든 것은 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고로 믿음은 우리가 의를 이루는 데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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