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 모음

[스크랩] 예화모음[23개]

천국생활 2007. 8. 3. 16:46
♣ 선행 - 친구의 선물

영생은 순수한 선물처럼 값없이 받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돈을 많이 내고 공로를 쌓고 종교적인 행위로 어떤 자격을 얻는다 해도 그것으로 천국의 영생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선생님)의 소중한 친구가 귀한 선물을 준비해 가지고 와서 (선생님)을 깜짝 놀래주려고 하는데 (선생님)이 즉시 지갑을 꺼내들고 선물 값 얼마를 갚기 위해 돈을 만지작거린다면 얼마나 모욕적인 행동이겠습니까! 선물은 값없이 거저 받아야만 선물입니다. 한푼이라도 지불을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선물이 아닙니다. 천국의 영생을 얻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 죄의 정의

죄를 생각할 때 우리는 단지 강도나 살인이나 간음 등을 염두에 둘 때가 많아요.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지 못하거나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모든 것이 다 죄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성미를 부리거나 도둑질을 하는 등,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한 것도 죄예요. 또 기도를 하지 않거나 성경을 읽지 않거나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지 않는 등,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도 역시 죄예요. 죄는 행동으로만 짓는 것이 아니라 거짓말, 욕설, 정욕, 교만, 미움 등 생각과 말로도 짓게 돼요. 성경은 이 모든 것이 죄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 하루 세번의 죄 예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하루에 열 번이나 다섯 번 혹은 단지 세 번의 죄만 짓는다고 생각해 봅시다. 아니, 그런 사람은 걸어다니는 천사나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하루에 세 번 이상을 불친절한 생각을 하거나 화를 내거나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본분을 어기는 일이 없다면 그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이처럼 선하다 할지라도 일년이면 그가 줄잡아 1천번의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70평생을 산다면 그가 하나님의 법을 7만번이나 어긴 범죄 기록을 갖게 될 것입니다. 형사법원에서 7만번의 범죄기록을 가진 상습범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생각해 보십시오! 틀림없이 중형을 받겠지요. 그렇다면 이와 같은 죄인인 우리가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 썩은 계란이 들어간 요리 예화

우리가 싱싱한 계란 다섯개에 썩은 계란 하나를 섞어서 요리하여 손님에게 대접하고 그것을 기꺼이 받으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사람들은 선하다고 생각할 것들이 많이 들어 있을지 모르나 실상은 부패한 생각과 행위로 가득한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이 그것을 기쁘게 받으시리라고 기대할 수는 더욱 없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선행으로 천국에 가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완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표준은 언제든지 그에게 완전히 순종해야 된다는 것이고 결국 우리는 모두 다 이 표준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선생님)이나 저나 또 어느 누구라도 왜 행위를 가지고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가를 이해하시겠지요?


♣ 은행강도 예화

어떤 무장강도가 은행에서 5백 만원을 털었다고 생각해봅시다. 비밀 카메라가 그 현장을 포착했고 은행 직원들과 그 밖의 목격자들이 피의자를 확인했습니다. 판사 앞에 선 피의자는 범행을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제가 죄를 졌습니다." 하고 자백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강도가 "판사님, 제가 강도 짓을 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돈도 그대로 돌려드렸고 또 아무도 해치지 않았으니 저를 이대로 풀어주신다면 다시는 은행을 털지 않겠습니다."하고 말했다고 합시다. 판사가 만일 그를 풀어준다면 그가 과연 공정한 판사이겠습니까?
판사가 지켜야 할 공정한 표준이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강도를 풀어준다면 세상에 온전히 남을 은행이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판사도 정의 때문에 범법자를 벌해야만 한다면 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더 죄를 벌하셔야만 하겠습니까!
성경이 형벌 받을 자를 결단코 면죄하지 않으리라고 말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 죄를 기록한 책 예화

제 오른손에 있는 이 책이 제 삶을 아주 상세히 기록해 둔 책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여기에는 제가 지은 모든 죄와, 제가 한 모든 말과, 제 마음에 스쳐간 모든 생각과, 제가 한 모든 행위가 낱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책을 들어 올린다) 문제가 있습니다. 이 책에 기록된 제 죄가 (책을 왼손 손바닥에 올려 놓는다)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저를 (왼손 손등을 가리킨다) 사랑하지만 제 죄는 (왼손 손바닥 위의 책을 가리킨다) 미워하셔서 반드시 벌하셔야만 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이 세상에 (오른손을 위로 들었다가 책을 든 왼손의 위치와 나란히 내려 놓는다.) 보내셨습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 대목에서 단번에 분명한 동작으로 왼손의 책을 오른손에 옮겨 놓는다.) 라고 했습니다.(사 53 : 6)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제 모든 죄가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에게로 옮겨졌습니다. 예수께서는 친히 나무에 달려 자기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습니다.(벧전 2 : 24) 그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되어 계시다가 (책을 무릎에 내려 놓는다)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선생님)과 저를 위한 처소를 마련하시기 위해 승천하셨습니다. 이제 그는 천국의 영생을 (선생님)과 저에게 선물로 제시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 테텔레스타이 예화

그런데 저는 부모된 입장에서 깜짝 놀랄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게 맞고 고난을 당하셨으며 하나님이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진노 곧 하나님의 무한한 진노를 당하셨습니다. 드디어 최후의 죄값이 치러졌을 때 예수께서는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원문에는 이 말이 흥미 있는 낱말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테텔레스타이라는 상업 용어로서 "완불되었다, 빚이 다 갚아졌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 천국문을 여는 열쇠 예화

믿음은 천국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선생님)도 이와 같은 열쇠꾸러미를 갖고 있을 것입니다. 이 열쇠들은 다소 비슷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 열쇠들을 가지고 우리 집 현관문에 가서 다 시험을 해보면 제 열쇠를 찾아야만 문을 열 수가 있습니다. 다른 열쇠로도 문이 열릴것이라고 아무리 믿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바른 열쇠라야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천국문을 여는 바른 열쇠는 구원 얻는 참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천국문을 열어 줍니다. 그 참 믿음이 아닌 다른 믿음이 천국문을 열어 주리라고 아무리 진실하게 믿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얻는 참 믿음은 무엇일까요?


♣ 역사상의 어떤 사실들에 대한 지식적 동의

어떤 사람들은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을 믿는 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들은 그가 실제로 이 땅 위에 살았던 것을 믿습니다. 하지만 그가 역사상의 실제 인물이었으나 지금 그들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믿지는 않습니다.


♣ 귀신예화

성경은 말하기를 귀신들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성경은 말씀하기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2:19)고 했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 얻는 참 믿음이 아닙니다. 가다라 지방의 귀신들린 사람 속에 들어있던 귀신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마 8:29)했습니다. 귀신들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귀신들은 구원을 얻지 못했습니다.


♣ 일시적/ 현세적 믿음

사람들이 구원 얻는 믿음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선생님)이 재정적인 문제로 주님을 의지할 때 그것은 재정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의 가족을 돌아보아 주시도록 주님을 의지할 때는 그것은 가족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이 무슨 결정을 내리는 일을 도와주시도록 주님을 의지할 때는 그것을 결정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행할 때 (선생님)은 여행믿음을 갖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다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믿음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다 일시적인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문제들이 일단 해결되거나 지나가고 나면 (선생님)은 더 이상 그 일로 주님을 의지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다 이생의 것들, 곧 잠시 있다 지나갈 이 세상의 것들입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이 모든 일시적인 문제들을 위해서 주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 얻는 참 믿음은 (선생님)을 구원하실 예수 그리스도만을 영원히 신뢰하는 것입니다.


♣ 경건생활의 동기 예화

프린스턴 대학교의 이전 총장은 이렇게 말했어요. "나는 젊어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영생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 나머지의 모든 생애는 단순히 그 날에 덧붙여진 하나의 덤으로서 ' 주님 그 때 내게 주신 것을 인하여 감사합니다.' 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경건생활 동기는 영생에 대한 감사에 있어요.
*고후 5 :14 -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 그리스도의 사역-인간이 처한 궁지의 해결책

우리에게는 인간이 처한 궁지를 해결할 공식이 있다. 인간의 죄에 하나님의 공의를 더하면 영원한 지옥의 형벌이라는 답밖에는 안나온다. 우리는 마땅히 그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만 한다. 그러나 여기에 더해야 할 요소가 또 하나 있다. 우리가 만일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공의에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더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답이 나온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죄 값을 대신하여 갚으셔야 했던 것이다.


♣ 거지의 손 예화

믿음은 어떤 왕의 선물을 받기 위해서 내어민 한 거지의 손과도 같아요. 이 거지는(저도) 수년 전에 깨끗하지 못하고 무가치한 손을 내밀어 영생의 선물을 받았어요. 그 때 저는 이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었어요. 지금도 자격이 없어요. 그러나 저는 영생을 갖고 있어요! 은혜로 얻었어요! (가능하면 그 집안의 장식품 중 가까이 있는 것 하나를 예화 중의 선물로 사용한다. 미리 그것을 오른손에 들고 있다가 믿음은 어떤 왕의 선물을 받기 위해서 내어민...하는 대목에서 왼손을 내어민 다음 예화를 마칠 때 내밀고 있던 왼손으로 그 선물을 받는다.)


♣ 인간의 능력 한계 - 넒이 뛰기

여기 이 의자와 탁자를 엄청나게 깊은 협곡 양편에 깍아지른듯이 마주 보고 서 있는 두 절벽이라고 생각해 보자. 이 두 절벽 사이의 넓이는 100m라고 해두자. 이제 협곡 이편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지금까지 지구상에 살아온 모든 사람들과 또 앞으로 태어날 모든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다고 하자. 임박한 위험으로부터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다 협곡 저편으로 건너가야만 한다고 생각해 보자. 만일 이편에서 저편으로 건너가지 못할 경우에는 다 죽고 말 것이다. 그들은 넓이 뛰기를 해서 이쪽 절벽에서 저쪽 절벽으로 건너가야만 하게 되어 있다. 현재까지 수립된 넓이 뛰기 세계 기록은 과연 얼마인지 아는가? 고작해야 8.4m에서 9m 사이일 뿐이다! 전체 인류 가운데서 100m 넓이의 협곡을 건너뛸 사람은 몇이나 되겠는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정말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아무도 이처럼 넓은 협곡을 건너뛸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6m 이상 뛸 수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불과 몇 미터밖에는 못뛸 것이다. 불구자들은 제대로 뛰지도 못하고 절벽 끝에서 굴러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저편까지 건너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저편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중간에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말 것이다.

인간의 영적인 상황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인간과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는 깊은 협곡 혹은 구렁이 끼어 있다. 사람들은 그 협곡을 건너뛰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다. 사람들은 교회에 나가기도 하고 십계명도 지키고 고의로 남을 해치지 않고 가능한 한 협곡 이편에서 저편으로 멀리 뛰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이것이 바로 저자 자신의 과거 생활이었다. 그것은 저자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멀리 뛰려고 애를 쓴 생활이었다! 저자는 다른 여러 사람들보다도 더 멀리 뛸 수 있다는 데에서 위로를 얻고 있었다. 저자는 하나님이 가장 멀리 뛰는 사람을 받아주실 것으로 생각했었다. 저자는 아무도 완전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최선을 다한 사람을 받아주실 것으로 생각했었다. 저자는 하나님이 그의 표준을 낮추어 주실 것으로 생각했었다. 이것은 하나님이 비례식 채점을 하실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전체 인간의 능력에 비례해서 채점을 하지는 않으신다! 저자는 과거의 생각이 잘못임을 깨달았다. 하나님은 오직 한 가지 표준, 곧 완전의 표준을 갖고 계실 뿐이다. 예수께서 말씀하기를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의 온전(완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완전)하라"고 하셨다. 나는 완전한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순간적으로 저자는 저자만큼 선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여 내가 무시했던 사람들도 결코 저자보다 못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저자는 우리 모두가 동일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가 얼마나 선하든지 간에 우리 앞에 가로놓인 협곡을 건너뛸 수 있을 만큼 선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모두 다 동일한 영원의 죽음을 맞아야 할 운명에 놓여있다. 우리가 천국에 갈 만큼 선하게 되지 않는다면 모두 다 지옥에 갈 것이다. 우리가 다른 길을 통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그 협곡을 건너갈 수가 없다.


♣ 하나님의 거룩하심 - 음이 맞지 않는 악기

어떤 음악회에서 관현악단이 연주를 하는데 악기 하나가 음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자. 여기서 지휘자가 관현악단 전체를 밖으로 내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음이 맞지 않는 악기는 내보내야 할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영적인 관계를 생각할 때 우리는 마치 음이 맞지 않는 악기와도 같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나 우리는 불의하다. 하나님은 완전하시나 우리는 불완전하다. 하나님은 죄가 없으시나 우리는 죄로 가득 차 있다. 관현악단이 온전한 연주를 하기 위해서는 음이 맞지 않는 악기를 내보내야 하듯이 자기 자신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계시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도 죄 때문에 그와 함께 있을 수 없는 인간을 내어 보내셔야만 한다. 하나님은 죄와 공존하실 수가 없다. 하나님은 죄인과도 교제하실 수가 없는 분이다. 그는 절대 완전하시고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분이다.


♣ 의자 예화(변형된)

(선생님), 이 의자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지요? 그럼 이 의자가 저를 편히 쉬게 해줄 수 있다는 사실도 믿으시지요? 그러나 저는 지극히 단순한 이유 때문에 편안하지 않아요. 그것은 제가 이 의자 위에 앉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한동안 저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이와 마찬가지였어요.

송구스럽지만 이 의자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가정해보겠습니다. 저는 한동안 이 의자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믿은 것과 마찬가지로 그 분이 실제로 계시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또 이 의자가 저를 편히 쉬게 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은 것과 같이 그분이 저를 도와주실 수 있다는 것도 믿었습니다. 그래서 제 자신에게 일어나는 재정문제, 가족문제, 결정을 내리는 문제, 여행의 안전문제 등(성경책,열쇠,함께 성장해요,볼펜을 하나씩 의자에 내려놓는다) 일시적인 문제들이 생길 때마다 문제들만 예수님께 맡겼습니다. 그러나 제 자신은 여전히 예수님께 맡기지 않았습니다. 힘들고 피곤했습니다. 그것은 제 자신의 선행이 천국에 들어가게 해 줄 것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생을 얻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제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이 모든 문제를 안은 채 (의자 위에 있는 물건을 한꺼번에 든다) 저를 예수님께 맡겼습니다 (의자 위에 앉는다). 비로소 저는 영생을 얻었습니다. 얼마나 평안하고 기뻤는지 모릅니다(벅찬 감격과 기쁜 모습으로).
(선생님) 조금 전에 하나님이 (선생님)을 천국에 들여보내야 하는 이유를 물으실 때 (선생님)이 어떻게 대답하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다시 생각해 보지요. (선생님)은 "최선을 다 해서... 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셨는데 (선생님)의 대답에서는 누구만 강조되고 있습니까?
"나"이지요?
그 대답을 하실 때 누가 (선생님)을 천국에 들어가게 해 줄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까?
"(선생님) 자신"이었지요?
이제 영생을 얻으려면 (선생님)의 신뢰의 대상을 (선생님) 자신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옮겨야만 합니다.


♣ 하나님의 의로우심 - 아레오바고의 재판관

그리이스(희랍)의 아테네에있는 아레오바고의 재판관은 얼마나 공정한 재판을 베풀었던지 그의 불의한 처사를 지적할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그의 판결은 항상 공명정대한 것으로 입증이 되었다. 하물며 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은 얼마나 더 공명정대하겠는가!


♣ 하나님의 거룩하심 - 유산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는 만삭이 거의 다 되어 유산을 한 어머니와 태아 사이의 관계와도 같다. 복중에서 아이가 자라는 동안 어머니는 그 아이를 사랑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그 아이가 태어나서 함께 지낼 날을 기대하였다. 그런데 그 아이의 생리 구조에 이상이 생겨서 어머니의 생리 구조에 실제로 역행하는 현상이 일어나 유산을 하고 말았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영적인 관계를 설명해 준다. 인간은 실제로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하여 불화를 초래하였다. 이제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인 인간을 내어 쫓으셔야만 한다. 하나님은 아직도 인간을 사랑하신다. 그러나 만일 인간이 계속해서 하나님과 함께 남아 있으면 하나님의 완전성이 파괴되어 하나님은 더 이상 하나님이 되실 수가 없을 것이다.


♣ 그리스도의 사역-인간이 처한 궁지의 해결책

우리에게는 인간이 처한 궁지를 해결할 공식이 있다. 인간의 죄에 하나님의 공의를 더하면 영원한 지옥의 형벌이라는 답밖에는 안나온다. 우리는 마땅히 그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만 한다. 그러나 여기에 더해야 할 요소가 또 하나 있다. 우리가 만일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공의에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더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답이 나온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죄 값을 대신하여 갚으셔야 했던 것이다.


♣ 인간의 능력한계 - 탱자나무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킬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본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데에 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킬 내적인 능력이 없다. 어떤 사람의 집 마당가에 탱자나무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탱자나무는 고작해야 시디신 탱자를 맺는다. 그런데 만일 그 집 주인이 귤을 키우고 싶은 나머지 마당가의 탱자나무에서 신탱자를 다 따내고 그 자리에 달콤하고 즙이 많은 귤들을 가져다가 매달아 두었다고 하자. 잠시 동안은 그 탱자나무에 동네에서 가장 맛이 좋은 귤들이 주렁주렁 달려있을 것이다. 사람들의 눈에는 그것이 "귤"나무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실상 그것은 어디까지나 귤들을 매달아 놓은 탱자나무일 뿐이다. 우리가 나무의 본성을 바꿀 수는 없다.

우리 인간의 본성은 시디신 탱자와도 같다. 우리는 자주 그 본성을 싫어하여 그것을 개선할 결심을 한다. 우리는 그 시디신 인간 본성의 열매들을 다 내버리려고 온갖 애를 쓴다. 어떤 사람은 술을 끊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말조심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가족관계와 사업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 노력하기도 한다. 이 모든 일들은 탱자를 따내고 그 자리에 귤을 매달아 두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나쁜 습관을 버리고 좋은 습관을 기른다. 그러나 이것이 삶의 원천을 바꾸어 놓지는 못한다. 우리의 본성은 우리의 결심과 개선의 노력으로 바꾸어 놓을 수가 없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선하게 바꾸어 놓을 수 없는 것은 탱자나무를 귤나무로 바꾸어 놓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성품이 필요하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다.


♣ 인간의 능력 한계 - 민족의 혈통

우리가 만일 다른 나라에 이민을 간다면 우선 그 나라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을 배우고 또 그 나라 사람들의 관습을 익히게 될 것이다. 그 나라에 정착하여 불편 없이 살아가려면 그 나라 사람들의 말과 관습뿐만 아니라 사고방식과 생활방식까지도 철저히 익혀야 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생각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얼굴 표정도, 몸짓도, 옷 입은 것도 그 나라 사람들과 같아진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혈통마저 같아질 수 있겠는가? 그럴 수는 없다. 우리가 무슨 수를 쓴다 해도 우리 자신이 지닌 민족의 혈통을 바꾸어 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그것은 영적인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과 똑같은 말을 하고 그리스도인과 똑같은 옷을 입을 수 있다. 그가 그리스도인의 단체에 가입을 하고 그리스도인들이 부르는 찬송을 부르고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인과 똑같은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중에 어느 것도 그를 그리스도인으로 바꾸어 놓을 수는 없다. 그는 죄에 빠진 인류의 혈통을 이어받고 태어난 죄인일 뿐이다. 그가 아무리 외적인 노력을 한다고 해도 이 사실을 바꾸어 놓을 수는 없다. 한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나야 한국인이 되듯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야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다른 민족의 혈통을 받고 또 다시 태어날 수는 없다. 그러나 능치 못하실 일이 없으신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는 있다. 거듭난 사람들은 자기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의지한다.


♣ 하나님의 자비 - 토마스 후커의 임종

토마스 후커(Thomas Hooker, 1586? - 1647, 영국 케임브리지 출신의 목사로서 1633년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 보스톤에 이민 온 후 1636년에는 현재 예일 대학이 있는 커넥티커트 주의 뉴 헤이븐에 재정착하였고 초기 미국의 교계와 정계의 지도자로서 큰 몫을 담당하였다: 역자 주)의 임종시에 그의 친구 하나가 말하기를 "자네는 이제 수고의 대가를 받으러 가는구만" 하였다. 토마스 후커는 겸손히 대답하기를 "아닐세, 하나님의 자비를 받으러 간다네" 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할 뿐이다. 자비를 얻지 못하면 잃어버린 자가 된다. 하나님의 공의는 우리에게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안겨준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은혜는 우리에게 천국을 안겨준다.

1860년 어느날 미국의 나이애가라 폭포에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여 줄타기의 명수 블론딘(Blondin)이 폭포 위로 매어 놓은 줄을 타고 이편에서 저편으로 건너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블론딘은 무섭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 위로 50m 정도의 높이에 300m 정도의 밧줄을 매어 놓고 수도 없이 건너다닌 경력이 있었다. 이날은 블론딘이 군중을 향해서 자기가 사람 하나를 데리고 건너갈 수 있다는 것을 믿느냐고 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물론 사람들은 모두 불론딘의 말에 동의하였다. 이에 그는 어떤 사람 앞에 다가가서 그를 등에 업고 폭포를 건너겠다고 제의했다. 그 사람은 불론딘의 제의를 거절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지식적인 동의나 설사 그것을 말로써 표현한다 하더라도 그 자체만을 가지고는 충분치 못하다. 거기에는 힘이 아닌 신뢰가 따라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믿고 의지하는 신뢰가 따라야 하는 것이다.

출처 : 인터넷로고스선교회
글쓴이 : David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