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신후
예수님이 제일 먼저 찾으신것은 교회(제자)이었다.
제자들에게만 관심이 있어셨다. 제자들을 만나 평안을 주시고, 눈으로 본바요 귀로 들은바요 주목하고 손으로 만진바라고 고백할수있는 확신을 주셨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사역을 놓고,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간후에 살아났다고 했다는 것과 예수님이 기절을 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말들로 부활을 부인하려고 애를 쓴것은 과거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는 오히려 부활을 더 잘 증거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형을 집행한 빌라도에게 나타나셨다면 더 확실하지 않았겠는가?
대제사장과 그 무리들이 보는 앞에 살아난 모습을 보이 셨다면
더 확실하지 않았겠는가? 하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사람들의 생각처럼 하지 아니하셨을가?
예수님은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하셨다.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 예언에 없었다. 하나님의 계획에 없었다.
그 보다 예수님께서 세운 교회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래서 제일 먼저 교회를 (제자들) 찾으신 것이다.
예수님 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셨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교회에 모든 관심을 가지시며 지극히 사랑하고 계신다. 주님은 사랑하는 교회가 보는 가운데 승천하심으로 소망을 주시는 것이 주님의 뜻 이셨다.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는 낙심한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처음 만남을 상기 시키시고 자신이 십자가에 죽기전의 모습으로 살아났음을 재확인 시키시기 위하여 고기를 구워 함께 드시면서 말씀도 하시고 평소와 다름없이 함께하시면서 자신의 부활체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게 하시고, 음식을 드신 후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시기위하여 그리고 그를 회복시키기위하여,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21:15-17)고 질문을 하셨다. 배신하고 도망한 제자들, 부인한 베드로를 만나 질책하지 아니하심으로 용서하셨고, 베드로에게 3번의 질문으로 회복시키셨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3번 반복하심은 의미가 있다.
그렇다. 주님께서 교회를 향하여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질문을 하신 것이다.
교회는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교회을 세우고 확장시키며 끝까지 봉사할수있다. 카리스마적인 인물이나 세상적인 실력과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운영의 원리는 예수를 사랑하는것에서 시작되고 마무리 된다. 사랑이없는 예배, 사랑이 없는 교육, 사랑이없는 선교, 사랑이 없는 봉사, 사랑이 없는 친교는 아무것도 아닌것이다. 교회의 원리는 사랑임을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 율법사들에게 율법중 가장 큰것은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내몸같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셨다. 모든 종교행위의 point가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에 있음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구약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상으로 주신 말씀이며, 그 내용은 하나님 사랑, 유대인들 끼리 사랑, 동족사랑이었으며, 조건은 사랑과 용서가 없을때 는 심판하는 조건이었고, 사랑의 근거는 율법과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었다.
신약에서 예수님이 강조하신 사랑에 관한 교훈은 그 대상이 유대인 뿐만아니라 모든 인류이며 한계가 없었고 모든 조건을 초월한 사랑이었다.
그 내용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땅끝까지 전하는 벽을 넘어선 사랑이었다. 사랑의 조건은 무조건이었고 사랑과 용서의 한계가 없었고 심판을 보류하는 사랑이었다. 베드로가 질문했을때 7번 뿐만 아니라 70 x 7의 무한한 사랑이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돌로 치는 것은 구약의 율법에 적법한 행위였지만 예수님은 용서해 주시고 정죄하지 않는 사랑이었다.
사랑의 근거는 자원하여 지상에 오셔서 조건없이 인간들을 사랑하신 하나님이 주신 사랑 즉 예수님의 모범이었다.
예수님께서 사랑에 관한 새계명을 주셨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13장 34-35).
새 계명은 구약교회를 향하여 주신 율법과 명령에 의한 사랑이 아니라
새 계명은-- -
1) 예수님이 제자를 사랑한 그 모범된 사랑.
2) 서로서로 사랑--하는 사랑을 뜻하셨다.
이와같이 예수님께서 율법사들의 이해를 초월하는 구약의 참된 율법의 가치의 가장 큰 사랑을 가르치셨고, 그리고 제자들에게 새계명을 주셨는데 예수님 처럼 사랑하는 것이고 서로서로 사랑하라는 한층 수준을 높이신 율법을 완성한 주로서 새계명을 주신 것이다.
우리가 깊이 생각하여야할 것은 주님께서 율법중 가장 큰것을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이라고 설명하신 이후, 최후의 만찬석에서 새계명을 주셨고, 새계명을 주신것으로 끝나지 아니하시고 부활하신후 교회를 찾아 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는냐?" 는 사랑에 대한 확인 질문까지 하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거듭 말씀하신것을 상고할때에 예수님의 의중을 확실히 알수있다. 고전13장에서 바울이 깨닫고 설명한 사랑의 내용은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인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에게 가장 결핍된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사랑이다. 모두가 손가락으로 지시하는 사랑. 말로하는 사랑. 자기감정 자기 생각이 기준이 되는 사랑. 자기 뜻대로 다해놓고 하나님 사랑한다는 사랑. 촛불과 같은 사랑.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고운 사랑. 윤리적 도덕적 만족을 얻는 사랑. 열심히 기도해도 그 기도가 사랑이 아닌 사랑........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은, 이성과 훈련과 노력과 의지로 오는 사랑이 아니라 성령으로 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소낙비 처럼 부은바 된 그 사랑이다(롬5:5).
예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교회를 찾으신다.
모든 것을 다 갖추고 부족함이 없게 보여도 이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갖추지 않은 것이 된다. 이 예수 사랑의 반석위에서 지어져가는 교회가 되어야하는 것이다.
공동체로서의 교회이던 성령의 전으로서의 성도 개인교회이던 예수사랑이 기초가 되지 않으면 모래위에 지은 집과 마찬가지이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고 예수님 처럼 살기를 소원하는 교회가 예수 사랑을 가질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조건없는 사랑은 경험해 본바 없는 사랑이며 태양과 같은 사랑이다.
이 사랑은 성령세례를 물붙듯이 부음 받아야 가능한 사랑이다.
믿으면 그리스도인이 된다. 그러나 새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면 제자가 된다. 제자훈련으로만 불가능하고 서로 사랑해야 가능하다. 봉사하면서 상처받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을 주고 받는 봉사가 제자의 사랑이다.
교회에 사명을 주신 예수님은 이 제자와 같이 주를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 일을 사랑으로 열심히 감당하는 교회를 주님께서 오늘도 찾으신다.
이러한 예수사랑을 알고 깨닫고 고백하고 실천하는 교회는 이제 그리스도의 분량에 까지 지어져 가게된다. 예수님은 예수 사랑으로 지어져가는 교회를 찾으신다.
겉사람은 고물처럼 후패해 가나 속사람은 날마다 새것이 되어가는 사람을 찾으신다. 인본주의의 모래위에 지어져가는 사람은 버려두시고, 신본주의 반석위에 지어져가는 사람을 찾으신다.
그리고 오직 예수사랑으로 흠없고 하나 된 교회를 기쁘게 찾으신다.
엡5:27절에서 교회는 티나 주름잡힌것이 없고 거룩하며 흠이 없기를 바라시며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나아오기를 원하고 계신다.
예수께서 기도하실때 대제사장으로서 교회가 하나 되기를 기도하셨고(요17장), 교회 구성원인 성도는 같이 천국에서 살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 되어야 하며(요17:24), 한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에(요17:1-5),한 성령의 감동을 받고 있기 때문에(요16:7,롬8:16), 같은 성경 말씀을 받고 있기 때문에(요17:14),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기 때문에(요17:11),구원받은자는 한 아버지를 섬기며 모두 아들들이기 때문이라고(요17:6-10) 말씀하셨다.
그러한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는 모범적인 교회가 가지는 장점들이 가득함으로(행9:31),평안하여 즐거운 교회가 되게 하시며, 든든히 서 감으로 건강한 교회가 되게 하시며, 주를 경외함으로 겸손한 교회가 되게 하시며, 성령의 위로로 거룩한 교회로 세워가시며, 수가 더 많아지게 하심으로 복스러운 교회가 되게 하신다.
그리고 예수 사랑으로 인하여 화평과 거룩함을 동시에 가진 교회를 찾으신다.
거룩만 주장하다가 화평을 잃어버렸어도 안되며, 화평을 주장하다가 거룩을 잃어버려도 안된다. 연합은 하나됨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지만 이 둘을 모두 가진 연합이라야 한다. W.C.C는 화평을 위주로 하다가 거룩함을 잃어 버림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였고, I.C.C.C는 거룩을 주장하다가 소극적인 분리주의적인 자세로 화평을 잃어 버리는 결과를 낳는 역사 경험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cord가 달라도, grade가 달라도 예수사랑 안에서 하나되기를 원하신다.
주님과 하나되지 못한 교회를 예수님께서 지적하시기를 첫사랑을 잃어버린 교회이고(계2:4) 고난 받기를 두려워하는 교회이었으며(계2:10) 교리의 오점을 가진 교회이었으며(계2:14-15) 도덕적 느슨함을 가진 교회었고(계2:20) 영적으로 둔한 교회이었으며(계3:1-2)믿음에 붙어있지 못하는 교회이었고(계3:11) 미지근한 신앙을 가진 교회이었다(계3:15-16).
그리고 예수사랑으로 임무들을 잘 감당하는 교회를 찾으신다(마28:18-20).
교회일을 할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일해야하며(행5:32), 일해야 할 시기가 지금임을 알고 일에 참여해야 한다(고후6:2). 교회에서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보상이 있음을 믿고 변함없이 일해야 하며(고전3:9-15), 그리스도의 심판날 까지 변하지 않고 일해야 한다(고후5;10).
이단과 악한자를 용납해서는 안되며 거짓을 드러내야하고 인내하고 게으르지 아니해야한다. 이것은 예수사랑이 진실하다면 가능하며 그 사랑으로만 감당할수있다.
그리고 예수사랑으로 인하여 믿음에 부요하고 죽도록 충성하는 교회를 찾으신다.
죽음 앞에도 믿음을 배반하지 안기를 바라시며 주님의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처음 보다 나중이 더 많기를 원하신다. 행위가 온전하기를 바라시며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말씀을 배반하지 안기를 원하신다.
미지근하거나 차지 아니하고 더웁기를 바라신다. 첫 사랑을 회복하기를 고대하시며 발람의 교훈, 니골라당의 행위, 이세벨의 행위에서 회개하기를 촉구하고 계신다.
교회생활에서 주의 할점은 교회를 멸시하는 말과 행동을 해서는 절대 아니되며 공회를 무시해서는 아니된다. 사람을 보고 일해서는 안되며 금전 거래를 삼가해야 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말을 해서는 안되며 자원하는 마음으로 봉사해야지 나를 위해서 봉사해서는 안되며 존경과 사랑을 먼저 보여 주어야하고 모든 일을 주께 하듯해야 한다.
교회 안에는 여러 형태의 뼈가 구성되어 있다. 원하기만 하고 아무런 영적 힘이 없는 물렁뼈가 있으며 말만 많이하여 갈등을 만들고 시끄럽게 하고 분열시키는 턱뼈가 많으며 툭하면 교회에 안간다고 하는 공갈뼈가 있기 마련이고 형식만 있고 성령이 없는 마른 뼈가 가장 많다. 그러나 교회를 받쳐주는 영적인 기둥과 같은 척추뼈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귀는 전략 방법에 있어서 느슨한 입술을 이용하여 상처를 만들며(약3:6) 변심된 마음을 충동하여 거짓말을 만들고(갈6:9) 분열된 생각을 통해 협조가 되지 않도록 하고(벧전5:8) 주의 일을 무너뜨린다. 토라진 일꾼을 통해(고전15:58) 공회를 공격하여 교회의 힘을 빼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라도 예수사랑으로 죽도록 충성하는 믿음에 부요한 교회를 찾으신다. 우리는 항상 교회와 자신을 감찰해야한다.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주님이 찾으시는 교회인가 아니면 사람만 모인 교회인가를 스스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감찰하며 회개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날마다 찾아오셔서 동행하는 교회가 되어야 마땅하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고 묻고 계신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주님께서 지금 묻고 계신다.
우리에게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를 묻지 아니하신다. 우리에게 얼마나 많이 배웠고 지식을 가지고 있는냐고 묻지 아니하신다.
우리에게 은사활용을 잘하고 있느가를 묻지 아니하신다. 우리에게 제자훈련을 잘받고 있는냐고 묻지 아니 하신다. 우리에게 새벽기도 잘 나가는냐고 묻지 아니하신다. 우리에게 봉사하고 있는냐고 묻지 아니하신다.
예수님이 지금 우리에게 묻고 계신 말씀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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