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요엘 2:13]
옷을 찢는다든가 종교적 감정을 나타내는 다른 외적 표시들은 나타내기는 쉬운 반면 위선적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참회개는 이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훨씬 적게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아주 복잡하고 자세하게 규정된 의식들을 준수하려 듭니다.
이런 것들은 육을 기쁘게 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기독교는 사람을 너무 겸손하게 만들고 그 마음의 동기까지 철저히 조사하기 때문에
세상적인 인간의 취향에는 잘 맞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겉이 화려해 보이고 세상적이며 얄팍한 것을 선호합니다.
외적인 종교 의식을 준수하는 것은 우리에게 일시적인 만족감을 줍니다.
우리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고, 자만심을 부풀려 주며, 자기 의를 세워 줍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기만하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이 사망의 강을 건너 심판대 앞에 섰을 때는 종교 의식보다
더 실속 있는 어떤 것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참경건을 떠난 모든 신앙 생활은 완전히 헛된 것입니다.
진지한 마음 없이 드리는 모든 종류의 예배는 하나의 속임수로 천국의 위엄을 조롱하는 뻔뻔스러운 짓입니다.
마음을 찢는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 것으로 진지하고 엄숙하게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개인적으로 은밀히 체험하는 슬픔입니다. 단순히 어떤 의식을 지키는 형식 속에서가 아니라
성도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역사하시며 그 영혼을 움직이시는 성령의 역사에 의해 체험되는 슬픔입니다.
단순히 말로 설명되거나 믿어질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 있는 모든 자녀들이
그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아주 예민하고 민감하게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굉장히 겸손케 만들며 죄를 완전히 추방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기를 낮추지 않는 교만한 영들은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자비로운 위로를 받을 수 있게 해주는 달콤한 준비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택자들에게만 속한 것이기 때문에 분명히 차별적입니다.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마음을 찢으라고 명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연적인 마음은 대리석만큼이나 단단하니 어떻게 그 마음을 찢어야 할까요?
그 마음을 갈보리로 가지고 가야 합니다.
죽어가던 구주의 음성에 바위들이 단번에 터졌는데 주님의 그 음성은 지금도 여전히 강력합니다.
오 복되신 성령이여,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죽어가시며
부르짖은 그 부르짖음 소리를 듣게 해주소서.
그러면 애통할 때 그 옷을 찢었던 사람들처럼 우리의 마음도 찢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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