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주님이 베푸시는 잔치

천국생활 2018. 8. 9. 13:34

주님이 베푸시는 잔치
사25:6-9
 

[만군의 주님께서 이 세상 모든 민족을 여기 시온 산으로 부르셔서, 풍성한 잔치를 베푸실 것이다. 기름진 것들과 오래된 포도주, 제일 좋은 살코기와 잘 익은 포도주로 잔치를 베푸실 것이다. 또 주님께서 이 산에서 모든 백성이 걸친 수의를 찢어서 벗기시고, 모든 민족이 입은 수의를 벗겨서 없애실 것이다. 주님께서 죽음을 영원히 멸하신다. 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말끔히 닦아 주신다. 그의 백성이 온 세상에서 당한 수치를 없애 주신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그 날이 오면,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할 것이다. 바로 이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 바로 이분이 주님이시다. 우리가 주님을 의지한다.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으니 기뻐하며 즐거워하자.]

∙두 죽음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내내 시편의 한 구절을 곱씹었습니다. “‘나에게 비둘기처럼 날개가 있다면, 그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가서 나의 보금자리를 만들 수 있으련만. 내가 멀리멀리 날아가서, 광야에서 머무를 수도 있으련만‘ 하였다. 아, 주님, 그들이 사는 성에는, 보이느니 폭력과 분쟁뿐입니다. 그들을 말끔히 없애 버리시고, 그들의 언어가 혼잡하게 되도록 하여 주십시오”(시55:6-9). 가끔 현실에 염증을 느낄 때면 나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곳에 가서 머물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폭력과 분쟁, 이간질과 모함, 음모와 사기가 판치는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입니다.

늘 약자들의 편에 섰고, 촌철살인의 언어 감각으로 정치의 품격을 높였던 노회찬 의원이 세상을 떠났습니다(7월 23일) . 강연료로 알고 무심히 받았던 돈이 올무가 되어 그를 죽음의 벼랑으로 내몰았습니다. 자신의 존재가 진보 정치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는 자신을 내던졌습니다. 그가 겪었을 내면의 혼란과 두려움 그리고 외로움이 어쩌면 앞서 읽은 시편 시인의 마음과 같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의 잘못이 없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사람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설 자리를 없애버리는 세태가 무섭습니다. 울음으로 넘실거렸던 추모의 물결이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꿈으로 영글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냉소와 조롱을 일삼거나, 이러쿵저러쿵 그의 죽음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차라리 침묵하는 예의라도 지킬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같은 날 소설가 최인훈 선생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교과서에도 실린 <광장>이라는 소설로 많은 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분입니다. 내가 성인이 된 후에 처음으로 산 전집이 1979년에 나온 열두 권짜리 최인훈 전집니다. 방황하던 내게 그분의 작품은 심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의 작중 인물들은 이 쪽에도 저 쪽에도 속할 수 없는 회색인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한쪽 극단에 서지 않습니다. 때로는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는 비겁자라는 조롱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외롭습니다. 하지만 세상일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선과 악, 빛과 어둠, 거룩함과 속됨, 의와 불의는 그렇게 선명하게 갈리지 않습니다.
때로는 의도적으로 한편에 서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교조적이 되지는 말아야 합니다. 저는 그런 태도를 예수님에게 배웠지만 최인훈 선생의 영향도 적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밀과 가라지 비유를 잘 아시지요? 종들이 주인에게 와 밀밭에 가라지가 자라고 있다면서 ‘뽑아버릴까요?’ 하고 묻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대로 버려두라고 말합니다. 가라지를 뽑으려다가 밀까지 뽑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입니다. 가라지는 추수하는 날에 적절하게 처리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세상일이 어떠하든 상관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나의 옮음이 대한 확신과 행동이 때로는 폭력적이거나 반생명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첫 사람들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으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선악과를 따먹었고, 그때부터 인간은 자기를 선과 악을 판단하는 주체로 내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분쟁과 갈등이 일상이 되고 염려와 근심이 떠나지 않습니다. 안식 없음, 고향상실, 방황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 낙담하지 말라
엘 살바도르의 순교자인 오스카 로메로는 사방이 꽉 막힌 듯 보일 때 하늘을 보는 것이 초월이라 말했습니다. 히브리의 한 시인도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본다. 내 도움이 어디에서 오는가? 내 도움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주님에게서 온다”(시121:1-2)고 노래했습니다. 땅의 현실이 우리 영혼을 확고하게 포박할 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 삶을 더 큰 질서 속에서 살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 삶을 살피고 재구성할 용기를 내야 합니다.

이사야가 살던 시대도 암담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전쟁의 위협은 항시적이었고, 지도자들은 무능력했습니다. 백성들을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는 이들은 자기 이익을 확보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고, 재판관들은 공정하게 재판하지 않았습니다. 타락한 종교인들은 강자들의 편에 서서 사람들을 오도했습니다. 꾸짖어야 할 때 거짓 평화를 약속하고, 위로가 필요한 이들은 외면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사야는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외쳤습니다.

세상에는 정말 악인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말로, 행동으로 힘없는 이들을 괴롭힙니다. 그들은 사회적 약자들을 존엄한 인격을 가진 동등한 존재로 대하지 않습니다. 인간 이하의 존재, 함부로 대해도 괜찮은 존재, 반-인간(half-person)으로 대합니다. 자기와 입장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조롱하고 모욕하는 일에 희열을 느낍니다. 심지어는 무고한 이의 죽음조차 조롱거리로 삼습니다. 이사야는 그런 이들을 가리켜 ‘성벽을 뒤흔드는 폭풍’ 혹은 ‘사막의 열기’와 같다고 말합니다(사25:4-5). 그들의 기세는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이사야는 우리를 전혀 다른 현실 앞에 세웁니다.

“참으로 주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요새이시며, 곤경에 빠진 불쌍한 사람들의 요새이시며, 폭풍우를 피할 피난처이시며, 뙤약볕을 막는 그늘이십니다”(25:4)

구원자로서의 하나님의 이미지가 아름답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가난한 사람 곧 짓밟히는 이들의 요새가 되시고, 구름 그늘이 뙤약볕의 열기를 식히듯이 포악한 자들의 노랫소리를 그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그런 방향으로 이끌고 계십니다. 더딘 것처럼 보여도 가을이 되어 알밤이 후두둑 떨어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때는 차곡차곡 무르익어 갑니다. 누구도 그 시간의 도래를 막거나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당장 우리가 원하는 결과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낙심할 것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 속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삶 속에서 실현해가는 것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꿰뚫어보는 것입니다. 현실이 어둡다고 하여 낙담하지 말아야 합니다.

낙담은 두 가지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첫째, 낙담은 우리로 하여금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아무리 애써 보아도 세상은 달라질 리 없다는 생각이 우리 발목을 붙잡기 때문입니다. 둘째, 낙담한 영혼은 삶의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잿빛 우울이 그의 영혼을 물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삶이 어려울수록 인간다운 삶을 모색해야 합니다. 나치의 수용소에 갇혔던 이들 가운데서 끝끝내 살아남은 이들은 대개 인간다운 삶을 포기하지 않은 이들이었다고 합니다. 이따금 제공되던 멀건 찻물을 어떤 이들은 홀짝 다 마셔버리지만, 일부만 마시고 남은 찻물을 가지고 얼굴과 몸을 씻는 이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수용소의 고통을 잘 견딘 이들은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프리모 레비라는 이탈리아의 화학자는 그 절망스러웠던 수용소에서 자기를 지켜준 것은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한 대목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대는 자신의 타고난 본성을 생각하라.
그대들은 짐승처럼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덕과 지혜를 구하기 위하여 태어났도다."

가끔 지고 가는 인생의 짐이 너무 무거워 낙담할 때가 있습니다. 자기가 무가치한 존재가 된 것 같아 마음이 아뜩해질 때도 있습니다. 수치와 모멸감에 몸서리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보다 큰 존재입니다. 나는 작지만 하나님은 크십니다. 그 은총 앞에 우리를 맡겨야 합니다.

∙ 여호와의 잔치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시련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이들에게 은혜의 잔치를 베풀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 약속은 백성들이 겪고 있는 현재의 참상과 대비되는 풍성함의 이미지로 충만합니다. 기름진 것, 오래된 포도주, 제일 좋은 살코기, 잘 익은 포도주가 바로 그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롬14:17)이라고 말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구약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는 잔치의 이미지와 분리할 수 없습니다. 좋은 음식과 향기로운 포도주도 중요하지만 그 잔치가 더욱 흥겨운 것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그 자리에 임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열방을 덮고 있는 슬픔과 탄식의 수의를 찢어서 벗기시고 없애십니다. 더 이상 전쟁과 폭력이 사람들을 찢어놓을 수 없는 세상이 주님과 더불어 열립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을 닦아주시고, 당신의 백성들이 당한 수치를 없애주실 것입니다. 인간을 영원히 괴롭히는 죽음도 멸하실 것입니다. 잔뜩 주눅든 이들 앞에 제시된 이 생명의 잔치에 대한 약속이야말로 고단한 현실을 견딜 힘이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이 희망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 세상이 열리기를 맥없이 기다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런 세상을 삶 속에서 시작할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일체의 차별을 철폐하고, 지금 눈물 흘리는 이들 곁에 다가서서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쁨을 안겨 주어야 합니다. 다른 이들에게 수치심을 안겨주는 행동을 그치고 사랑으로 다른 이들의 연약함을 부둥켜안아야 합니다. 그것이 생명의 하나님을 믿는 이들의 소명입니다.

사람들은 ‘내 짐을 지고 가는 일도 벅찬 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묻습니다. 물론 어려운 일입니다. 신앙은 신비이고 역설입니다. 자기 짐에 집착할 때 그 짐은 우리를 점점 짓누르지만, 다른 이들의 짐을 대신 지려고 할 때 우리의 짐은 가벼워집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를 부르신 주님 앞에 나왔더니 주님은 오히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멍에는 십자가입니다. ‘내 짐이 무거워 허덕이는 판에 주님의 십자가까지 지라구요?’ 누구든 불퉁거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신비는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를 질 때 우리 짐이 가벼워집니다. 다른 이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마음 쓸 때 우리 생의 비애가 줄어듭니다. 다른 이를 행복하게 하려고 노력할 때 이전에는 알지 못하던 기쁨이 우리 속에 스며듭니다. 생에 대한 두려움이 잦아들고 영적인 자유가 찾아옵니다.

∙ 공기를 훔치는 사람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마음과 자꾸만 접속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힘을 덧입어야만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삶에 지쳐 어깨가 늘어진 이들, 오직 땅의 현실에만 몰두하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고개를 들라고 말합니다.

“너희는 고개를 들어서, 저 위를 바라보아라. 누가 이 모든 별을 창조하였느냐? 바로 그분께서 천체를 수효를 세어 불러내신다. 그는 능력이 많으시고 힘이 세셔서,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 나오게 하시니, 하나도 빠지는 일이 없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불평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불만을 토로하느냐?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나의 사정을 모르시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정당한 권리를 지켜 주시지 않는다’ 하느냐?”(40:26-27)

하나님이 우리를 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보다 세상을 더 잘 아십니다. 요즘 저녁 산책을 하면서 밤하늘의 별을 살피는 재미가 큽니다. 휴대전화에 별자리를 알려주는 앱을 깔면 눈에 보이는 별이 무슨 별인지를 알려줍니다. 수성, 금성, 목성, 토성을 구별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별을 헤아리며 그리운 이름과 추억을 하나씩 떠올리던 윤동주의 마음이 뭔지 알 것 같기도 합니다. 별들의 수효를 헤아리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사정을 모를 리 없다는 것이 이사야의 전언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지치고 힘들게 합니다. 그럴 때마다 별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마음을 들어 올리십시오.

“오직 주님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듯 올라갈 것이요, 뛰어도 지치지 않으며,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40:31)

무더위 속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소망의 말씀입니다. 러시아 시인 오시프 에밀리예비치 만델스탐(Osip Emil’ebich Mandel’shtam)은 시인을 ‘공기 훔치는 사람stealer of the air’이라고 했습니다(정현종 산문집,<두터운 삶을 위하여>, 문학과지성사, 2015년 4월 20일, p.87). 공기를 훔친다는 시어가 의미하는 게 뭘까요? 구 소련의 숨 막히는 상황 속에서 마치 중력에 이끌리듯 땅의 현실에 사로잡혀 낙심한 이들의 영혼을 위로 잡아당기는 게 시인의 존재 이유라는 뜻이 아닐까요? 시인이 그러하다면 믿음의 사람들은 더욱 그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삶이 무겁다고 느낄 때마다 우리 영혼을 하나님께 들어 올려야 합니다. 창문을 열어 공기를 순환시키듯이 하늘 바람이 우리 영혼에 스며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참 사람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습니다. 절망의 수의를 벗으십시오. 눈물을 닦으십시오. 죽음 너머의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우리는 절망하라고 부름받은 이들이 아니라, 희망을 창출하라고 부름받았습니다. 제가 늘 마음에 새기고 있는 시편 구절로 오늘의 설교를 마치려 합니다.

“우리가 걷는 길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면, 우리의 발걸음을 주님께서 지켜주시고, 어쩌다 비틀거려도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니, 넘어지지 않는다.”(시37: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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