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초대
잠언8:32-36
[그러므로 아이들아, 이제 내 말을 들어라. 내 길을 따르는 사람이 복이 있다. 내 훈계를 들어서 지혜를 얻고, 그것을 무시하지 말아라. 날마다 나의 문을 지켜 보며, 내 문설주 곁에 지키고 서서, 내 말을 듣는 사람은 복이 있다. 나를 얻는 사람은 생명을 얻고, 주님께로부터 은총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놓치는 사람은 자기 생명을 해치는 사람이며,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죽음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붙들고 사는 언어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지난 주간에도 시원한 소식도 있었고, 답답한 소식도 있었습니다. 촛불집회 당시 군대가 계엄령을 모의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런가 하면 해고되었던 KTX 승무원들이 복직되었다는 소식도 들려왔습니다. 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세상입니다. 지난 한 주간 어떤 언어를 사용하며 살았나 한번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언어는 우리의 생각을 표현하는 도구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감정과 의지를 좌우할 때가 많습니다. 사용하는 언어가 바뀌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도 바뀌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도 달라집니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가 드러나는 장소(Ort)’라고 말했습니다. 사용하는 언어를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이 머물고 있는 장소가 드러난다는 말일 겁니다.
늘 부정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외부 세계를 늘 불만어린 눈으로 바라봅니다. 그들은 그런 언어를 통해 주변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 세상을 어지럽고 혼탁하게 만듭니다. 그들의 언어는 마치 갑자기 터져 나오는 재채기처럼 주위에 불쾌함을 흩뿌립니다. 하지만 정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잘 아는 어느 집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어린이집에서 물놀이 복장을 갖춰 보내달라는 전갈이 있었기에 엄마는 큰 딸 아이에게 수영복을 입히고 있었습니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라고 생각했던지 세 살 박이 동생이 물었습니다. “엄마, 언니 어디 가요?” “응, 어린이집에 갈 거야.” “와, 좋겠다.” “너도 어린이집에 가잖아?” “와, 신난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밝아졌습니다. ‘와 좋겠다’, ‘와, 신난다’. 아이는 말로 좋은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어린 아이처럼 생을 이렇게 단순하게 받아들일 순 없는 것일까요?
요즘 우리는 문자 중독이라 할 만큼 많은 정보를 접하며 삽니다. 그런데 생산되는 정보를 많은 이들에게 노출시키기 위해서 사람들은 매우 자극적인 제목을 달곤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클릭하기 때문입니다. 담담한 언어, 담백한 언어의 자리는 점점 협소해지고 오히려 노골적이고 극단적인 언어가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 끕니다. 정보의 소비자들은 거기에 자극적인 댓글을 달아 응답합니다. 사람들에 의해 이렇게 혹사당하는 언어는 제 본래적 기능을 잃어버리기 일쑤입니다. 언어의 본질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것인데, 오히려 언어가 사람들을 갈라놓고 있는 것입니다. 언어의 복수입니다. 언어가 타락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어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고 말합니다. ‘말씀’은 ‘로고스’를 번역한 것인데, 이 단어는 헬라 철학에서 상당히 다양한 의미로 쓰입니다. ‘도’, ‘진리‘ 등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말’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적인 에너지 혹은 말씀을 뜻하는 히브리어 다바르(Dabhar)의 번역어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사건을 일으키셨습니다. 말씀과 실행 사이에 틈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참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도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어떤 사건을 일으킵니다. 누군가를 비난하는 말을 하면 비난의 대상이 된 사람 속에 원망이나 분노 혹은 자괴감이 형성되고 그것이 고스란히 그의 행동 속에 반영됩니다. 누군가를 칭찬하고 긍정하는 말을 하면 반대의 결과가 나타납니다. 우리는 말로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을 짓고 있습니다. 말이 달라져야 세상도 달라집니다.
세상이 혼란할수록 우리가 꼭 붙드는 말이 있어야 합니다. 좌우명이든 가훈이든 우리 삶이 세파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닻 구실을 해주는 말이 필요합니다. 격언은 우리를 쳐서 바로잡아 주는 말이고, 속담은 민중적 지혜를 전해주는 말입니다. 격언과 속담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을 간단명료한 문장으로 요약해줍니다. 아포리즘(aphorism)은 삶의 교훈 등을 간결하게 표현한 글인데, 문장이 단정적이고. 내용이 체험적이며. 그 표현이 개성적이고 독창적이어서 기억하기 좋습니다. 격언과 다른 게 있다면 그 말을 한 사람이 잘 알려져 있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문장은 파스칼의 것이고, “사랑이란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둘이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문장은 생텍쥐페리가 한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잠언箴言은 격언의 일종입니다만, ‘바늘’ 혹은 ‘침’, ‘경계’를 뜻하는 ‘잠‘이란 글자를 사용함으로써 잠든 영혼을 깨운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 지혜의 근본: 여호와 경외
잠언의 핵심 문장을 우리는 잘 압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1:7)이 그것입니다. 이 문장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이를 아는 것이 슬기의 근본”(9:10)이라는 말로 변주되기도 합니다. 주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주님을 공포나 두려움의 대상으로 바라본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존중하고 공경하는 태도를 일컫는 말입니다. 즉 우리보다 압도적으로 크실 뿐만 아니라, 선함 자체이시고, 자비가 한량없으신 하나님에 대한 외경심에 더해 그런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경외라는 말입니다. 경외심이야말로 인간이 알아야 할 모든 지식의 뿌리입니다. 아브라함 헤셸은 “희랍인들은 이해하기 위하여 배웠다. 히브리 인들은 공경하기 위하여 배웠다. 현대인들은 사용하기 위하여 배운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선집3, <누가 사람이냐>, 이현주 옮김, 종로서적, 1996년 4월 20일, p.201)고 말합니다.
현대인들은 뭐든지 도구화합니다. 세계도, 사람도, 가치도 도구화하고 맙니다. 그들에게 세상은 사용 가능한 것과 사용할 수 없는 것, 내게 이익이 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뉩니다. 아름다운 것, 장엄한 것에 대한 감각은 퇴화되게 마련입니다. 이럴 때 인간의 영혼은 납작해집니다. 세계를 도구로 보는 순간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사라지고, 인간에 대한 존중 또한 약해집니다. 헤셸의 문장 하나를 더 소개하겠습니다.
“히브리의 옛말에 따르면 세계는 공부, 예배, 자애라는 세 개의 기둥 위에 서 있다고 한다. 공부는 하늘의 지혜를 더불어 나누는 것이요 예배의 대상은 창조주며, 자애는 이웃의 아픔에 대하여 마음을 열고 동정을 베푸는 것이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앞의 책, p.201)
지금 이 세 개의 기둥이 든든한지요? 기둥뿌리가 부식되어 위태롭지는 않은지요? 헤셸은 “참된 배움이란 자신을 영원하면서 보편적인 어떤 것에 연관시키는 한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이게 모든 교육의 본질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걸 저는 하나님의 뜻을 기준음 삼아 내 뜻을 조율하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할 수 있고,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을 사랑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이런 근본이 무너져서 우리 삶이 곤고합니다. 삶을 위한 방편을 마련하기에 바빠 참 사람됨의 길을 애써 찾지 않는 것이 현대인들의 내적 빈곤의 원인입니다.
∙ 편재하는 지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이스라엘 학자 유발 하라리는 그의 책 <호모 데우스>에서 세상의 모든 정보를 다 다룰 수 있는 신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출현할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름다운 유토피아가 아니라 인간다움의 종말일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4차 산업혁명이나 AI(artificial intelligence)에 대해 말합니다만 그걸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세상은 분명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향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속도를 따라갈 것이고, 그들의 권력은 더욱 커질 것입니다. 세상에서 창출되는 부의 대부분이 아주 소수의 사람들에게 귀속될 것입니다. 그들은 못할 일 없는 신적인 존재가 됩니다. 경계하지 않으면 권력은 지배 욕망과 쉽게 결합하게 마련입니다. 소수의 사람에게 집중된 권력은 반드시 타락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종교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종교는 역사가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선도하고 길을 밝히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참된 삶이 무엇인지 일깨워주어야 합니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굉장히 주제넘은 말로 들립니다. 한국교회는 계몽의 대상으로 전락한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역할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버리지 않으신 것은 아직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링반더룽(Ringwanderung)이라는 등산 용어가 있습니다. 산길을 걷다 보면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같은 자리를 빙빙 도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 삶이 오리무중입니다. 옳고 그름이 분명하지 않고,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의 분별도 쉽지 않습니다. 역사가 진보하는 것 같긴 한데 별반 나아진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좋은 지도와 길을 잘 아는 안내자가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꼭 붙들어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수영을 할 때 가끔 고개를 들어 숨을 쉬어야 하는 것처럼 가끔은 일상에서 고개를 들어야 우리가 갈 길이 보입니다. 삶의 지혜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특별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닙니다. 겸손하게 세상을 살피면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잠언 8장은 지혜가 태초로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세움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의인화된 지혜가 1인칭으로 자랑스런 노래를 부릅니다.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을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이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8:27-31)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유지되고 있음을 지혜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지혜는 하나님의 섭리가 지속되는 세상을 기뻐합니다. 지혜가 있는 곳에 기쁨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너무 분주해서 세계에 가득 차 있는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지 못하고, 그 창조의 리듬 속에서 쉬지 못합니다. 그래서 근원적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순리를 따르면 삶이 쉽지만 거스르면 힘든 법입니다. 많은 이들이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를 좋아합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너도 그렇다”. 이게 시 전문입니다. 그런데 ‘풀꽃2’도 있습니다. 이건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색깔을 알고 나면 친구가 되고/모양까지 알고 나면 연인이 된다/아, 이것은 비밀”. 참 좋지요? 이름도 색깔도 모양도 모르기에 우리는 진정한 이웃도 친구도 연인도 되지 못합니다.
돈과 권력과 명예에 탐닉하는 이들일수록 두려움이 많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한껏 누리지 못합니다. 요한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면서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체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은 모두 하늘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요일2:16)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욕망에 사람 잡힌 이들은 지금 자기 곁에 있는 이들을 자기들의 욕망 실현을 방해하는 존재로 여깁니다. 의구심으로 눈으로 다른 이들을 바라보는 이들이 행복을 누릴 수는 없는 없습니다. 조금 가벼워져야 합니다. 가벼워지려면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려놓아야 숨을 돌릴 수 있고, 숨을 돌려야 이웃이 보입니다. 그때 비로소 공부, 예배, 자애라는 세 기둥이 다시 우뚝 서게 됩니다.
∙복된 삶의 길
지혜가 우리를 초대합니다. 지혜의 도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훈계를 들어 지혜를 얻고 그것을 버리지 않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지혜는 일상의 모든 순간에 우리 앞에 있습니다. 지혜가 우리를 이끄시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연이어 나오는 세 동사가 인상적입니다. ‘들으라, 따르라, 지켜보라’. 우리가 진정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이 권고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40대 초반의 나이에 강진으로 유배되었습니다. 그는 시절을 원망하기보다는 자기를 갈고 닦고, 또 세상을 경륜할 지혜를 쌓는 데 주력했습니다. 그리고 인재들을 불러들여 공부를 시켰습니다. 어느 날 아전의 자식이었던 열다섯 살 소년 황상이 다산을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저같이 머리 나쁜 아이도 공부할 수 있나요?" 다산은 오로지 부지런히 노력하면 안될 일이 없다며 ‘삼근계三勤戒'의 가르침을 글로 적어주었습니다.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라'. 다산은 재능 있는 이의 병통이 무엇인지도 가르쳤습니다. "외우는데 빨라 매사에 소홀하고, 재주로 글을 지어 글이 들뜨고, 빨리 깨달아 결이 거칠다. 둔탁한 끝으로는 처음엔 뚫기 어렵지만 한 번 뚫리면 막힘이 없고 갇혔던 봇물이 한 번 터지면 흐름이 장대해지며 답답함을 이기고 연마하면 더욱 더 빛이 나는 법이다". 가만히 돌아보니 재주 많은 사람이 우직하게 노력하는 사람을 당하지 못한다는 말이 맞습니다. 황상은 늙어서도 공부하는 자기를 비웃는 이들에게 다산 선생님은 20년 동안 책상다리로 앉아 공부에 몰두한 결과 과골, 곧 복사뼈가 세 번이나 구멍이 났다면서 자신이 게을러질 수 없는 까닭을 밝혔습니다. 그게 바로 과골삼천踝骨三穿이라는 말의 유래입니다(정민, <스승의 옥편>, 마음산책, 2007년 2월 20일, p.20-25 참조).
비록 이런 우직함과 열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지는 못한다 해도,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명심하고 그 말씀을 따라 우리 삶을 조율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속에 허물어지지 않는 단단한 기둥이 들어섭니다. 바람이 조금 불어도 이리저리 흩날리는 겨와 같은 삶을 살지 않으려면 속으로 단단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는 것, 이웃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 바로 그것이 사람 된 보람입니다. 지혜가 우리를 부릅니다. 그 부름에 응답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 말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기쁨을 사모하며 사십시오. 주님의 은총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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