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의 표징
마 12:38-42
(2016/06/19 강림 후 제5주)
[그 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에게서 표징을 보았으면 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예언자 요나의 표징 밖에는, 이 세대는 아무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을 땅 속에 있을 것이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서, 이 세대를 정죄할 것이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선포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아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서, 이 세대를 정죄할 것이다. 그는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부터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아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 볼 눈이 없는 사람들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아름다운 세상, 한과 눈물이 없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애쓰다가 속절없이 세상을 떠난 이들, 특히 김관홍 잠수사, 조 콕스와도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수없이 많은 경계선이 드리워진 세상에 산다는 것이 참 힘에 겹습니다. 적대적인 시선과 말이 횡행하는 거리 풍경이 우리를 참 우울하게 만듭니다. 엠마우스 운동을 통해 집 없는 사람들을 돌보았던 아베 피에르 신부는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이 신자와 비신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제시하는 기준은 단순합니다. 홀로 만족하는 사람과 공감하는 사람, 다른 사람의 고통 앞에서 등을 돌리는 사람과 고통을 나누려는 사람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믿는 사람 가운데도 홀로 만족하는 사람이 있고, 믿지 않는 이들 가운데서도 공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마음에 더 합한 사람일까요?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디 편에 속해 있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어떠한 사람인가 입니다.
세상에 증오를 퍼뜨리는 이들은 자기 속에 두려움이 많거나 지나칠 정도로 자기 확신에 가득 찬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옳음을 지나치게 확신하기에 다른 생각이나 삶의 방식을 가진 사람들을 용납하려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들은 자기 속에 고착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배우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부인하는 이들입니다(Jim Wallis).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문가를 자처하는 그들에게 예수는 정말 낯선 존재였습니다. 자기들의 인식 범주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 주변을 맴돌면서 예수의 정체를 밝히려 애씁니다.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열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들은 자기들의 자리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 가운데 몇이 예수를 찾아와 말합니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에게서 표징을 보았으면 합니다."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나타내는 결정적 증거, 곧 자기들도 마음으로 설복할 만한 표징을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들이 사용한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디다스카레'인데 진리를 가르치는 자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예수님께 나름대로 존경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런 것일까요? 말은 정중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예수를 부정할 증거를 찾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표징은 이미 충분히 주어졌습니다. 마태복음 12장만 보더라도 예수는 회당에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셨고, 귀신 들려 눈이 멀고 말을 못하는 사람도 고쳐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그 사건에 몹시 놀랐습니다. 그 때 바리새파 사람들이 뭐라 했습니까? "이 사람이 귀신의 두목 바알세불의 힘을 빌지 않고서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할 것이다"(마12:24). 그들은 이미 예수와 함께 도래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볼 눈이 없었습니다. 예수는 그들에게 다만 불편하고 낯선 존재, 곧 제거해 버려야 할 존재였던 것입니다. 낯선 것은 늘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듭니다.
1917년에 뉴욕에서 앙데팡당 전이 열렸습니다. 참가비 6달러만 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었던 젊은 예술가들의 등용문과 같은 전시회였습니다. 그런데 리처드 무트(Richard Mutt)라는 이름의 화가가 출품한 '샘'(Fontaine)이라는 작품이 좀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건 작품이 아니라 제품이었습니다. 공중화장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남자용 변기에 R. Mutt라는 서명만 해서 보내왔던 것입니다. 큐레이터들은 그것을 차마 전시할 수 없어서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두었다고 합니다. 그 작품은 실은 마르셸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년)의 작품이었습니다. 그는 일상적인 것을 일상적이지 않는 공간에 재배열함으로써 사물의 실용적 의미를 교란하려 했던 것입니다. 사물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장소를 벗어날 때, 그리고 예측 가능한 시간 순서가 교란될 때 사람들은 당황하게 마련입니다. 늘 드나들던 음식점 주인을 뜻밖의 장소에서 만날 때의 생경함을 떠올려 보십시오. '샘'은 미술의 권위에 대한 조롱일 수도 있고, 미술의 정의를 새롭게 해야 한다는 주장일 수도 있었습니다. 논란이 많았던 이 작품은 현대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 표징을 거절하시다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예수가 바로 그러한 존재였습니다. 불편하고 낯선 존재, 자기들의 평온을 교란하는 사람 말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표징을 보여달라고 말한 것은 그를 믿거나 제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부정할 증거를 찾고 싶어서였습니다. 우리는 광야에서 사탄이 주님을 시험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악마는 예수를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마4:6) 하고 유혹합니다. 하나님이 천사들을 보내셔서 그의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할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이것은 호의가 아니라 무너뜨리기 위한 것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성전 체제에 속한 이들은 예수를 통해 나타난 수많은 표징을 이미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인정할 생각이 없습니다.
교회에 새로운 담임목사를 청빙할 때 많은 교회가 내세우는 조건 가운데 하나는 교회를 양적으로 크게 성장시켰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양적 성장이 꼭 복음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그런 것을 요구하는 것은 복음보다는 자본주의의 정신에 투철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회는 이력서를 낸 목사들에게 설교 동영상을 제출할 것을 요청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런 일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정히 궁금하면 청빙 위원들이 주일에 그 교회를 찾아가 설교를 들으면 될 일입니다. 교회의 발전 계획서를 제출하라는 교회도 있습니다. 도대체 그 교회 공동체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목사에게 어떤 발전 계획서를 제출하라는 것인지요? 예수님은 표징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예언자 요나의 표징 밖에는, 이 세대는 아무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12:39)
'악하다'는 말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살아가는 인간의 죄성을 일컫는 말이라면, '음란하다'는 말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 관계에 신실하지 못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 또한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이지 하늘로부터 오는 표징이 아닙니다. 종교가 본질에서 멀어질수록 외적 징표에 집착하게 마련입니다.
표징을 거절하면서도 주님은 요나의 표징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즉시 물고기 뱃속에 사흘 밤낮을 머물던 요나가 되살아난 이야기와 무덤 속에 계시던 주님의 부활을 연결시키려 합니다. 형태적 유사성이 도드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 요나의 표적은 그것만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요나 이야기에서 정말 놀라운 것은 "사십 일만 지나면 니느웨는 무너진다"는 요나의 선포를 듣고 참회한 니느웨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예기치 않은 돌이킴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무겁게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허다한 표징을 보고도 믿지 않는 이들은 얼마나 딱한 사람들입니까? 죄인이 변하여 의인이 되고, 자기만 알던 사람이 변하여 타자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는 사람이 되는 것, 바로 그것이 요나의 표징이 아닐까요?
• 마음의 변화
얼마 전 SNS에서 본 게 생각납니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생각하는 과제'를 내줬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생들에게 생각하는 훈련을 시키기 위한 것이었을 겁니다. 사진이 한 장 제시되고 있었는데 머리통은 크고 팔다리는 나뭇가지처럼 야윈 아이의 모습이 담겨 있었습니다. 남루한 옷차림의 아이는 길 모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땅에 떨어진 과자 혹은 빵 부스러기 같은 것을 주워 먹고 있습니다. 지시문은 이렇습니다. "내 자신을 그림 속의 아이와 비교해 봅시다. 난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이유를 들어서 설명해 봅시다." 선생님은 어떤 대답을 기대했던 것일까요? 엄마 아빠의 보호를 받으며 부족한 것 없이 살고 있는 현재에 감사하라는 것이었을까요? 그런데 한 아이가 적어낸 대답이 놀라웠습니다. "남의 아픔을 보고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아는 것은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같이 아픔을 해결해 주려 하고 같이 잘 먹고 잘 살아야 될 것이다." 이게 아이의 생각인지 아니면 어른의 도움을 받아 적은 답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아이는 어른들의 생각에 균열을 내고 본질적인 것을 보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많은 어른들이 그 문제를 낸 선생님과 비슷한 태도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남이야 어떻든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암암리에 우리를 지배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주님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 이르신 것은 바로 이런 현실을 가리키시는 것일 겁니다.
외국에서 촬영된 동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축제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사탕을 가득 채워 놓은 사람 모양의 인형이 나무에 매달려 있습니다. 어른들은 안대로 눈을 가린 아이들을 그리로 이끌어 막대기로 그 인형을 때리게 합니다. 인형이 터지면서 사탕이 쏟아지면 즐겁게 그 사탕을 맛볼 수 있도록 한 것이지요. 영상은 막대기로 조심스럽게 인형을 툭 치던 아이가 안대를 벗고는 인형에게 다가가 가만히 안아주며 흐느껴 우는 장면을 보여주었습니다. 연출한 것이 아니었기에 그 장면은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어른들이 무심코 재미삼아 시킨 놀이, 그 가학적인 놀이가 아이에게는 폭력으로 인식되었고, 예민한 아이는 이유없이 매를 맞아야 했던 인형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할 길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울음이야말로 이 폭력적인 세상을 치유하는 묘약이 아닐까요?
20세기의 위대한 영성가 토머스 머튼은 깊은 고독 속에 머물기를 소망했지만 사람들을 돌보라는 수도원장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도원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는 슬픔의 바다에 살고 있는 인류의 마음을 깊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낯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걱정은 무엇일까?', '무슨 직업을 가졌을까?', '무슨 슬픈 일이 있을까?' 그런 마음으로 바라보니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귀하게 보였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아 은둔하고 싶어했던 그는 마침내 자기가 찾아가야 할 진정한 사막은 '연민'이라는 깨달음에 이릅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진정한 은둔 생활은 미래에 거는 희망이 아니다. 도리어 현재를 심화하는 것이다"(토머스 머튼, <토머스 머튼의 영적 일기>, 오지영 옮김, 바오로딸, 2009년 2월 15일, p.397)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이웃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기 시작할 때 세상도 변할 것입니다. 요나의 표징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요?
• 또 다른 숲을 시작하세요
예수님은 심판의 날에 니느웨 사람들과 남방의 여왕이 일어나 사람들을 심판할 것이라 말합니다. 남방의 여왕은 아마도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 찾아왔던 시바의 여왕을 가리키는 말일 겁니다. 니느웨 사람과 남방의 여왕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과 그 말씀을 따라 자기 삶을 변화시켰다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속해 있는 민족이나 종교가 아니라 삶의 태도입니다. 그들은 존재 자체로 다른 이들을 평가하는 척도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그러나 보아라"라는 구절을 두 번 반복하면서 요나보다도, 솔로몬보다도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더 크다고 하는 것일까요? 자신이 더 위대하다는 말일까요?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누구보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 인류에 대해 더 큰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 할 수 있는 한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주려 한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주님은 크신 분입니다. 성공이 지상의 목적이 되는 한 우리는 예수께서 보이신 진정한 위대함에 당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큰 사람은 남을 괴롭혀서라도 자기가 원하는 바를 손에 넣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바라는 바를 포기하더라도 남을 해롭게 하지 않으려는 사람입니다. 경쟁이 심화되는 세상에서 그렇게 사는 사람은 좀 반편이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손해를 좀 보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평화 노래꾼 홍순관 집사가 앨리스 워커(Alice Walker)의 시에 곡을 붙인 노래 '또 다른 숲을 시작하세요'를 들어보셨는지요? 이 노래의 원제는 '고문'(Torture)입니다. 시인은 '그들' 곧 힘으로 세상을 장악하려는 이들이 와서 우리 인생에 정말 소중한 사람들을 붙잡아다가 고문하고 죽인다면, 그래서 견딜 수 없는 아픔이 몰려오면 나무를 심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나무를 고문하여 푸른 숲마저 사라지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노래는 "또 다른 숲을 시작하세요"라는 구절이 반복되며 끝납니다. 희망은 이렇게 포기하지 않는 이들을 통해 더디지만 확실하게 우리 곁에 다가옵니다. 진정한 위대함을 잃어버려 밋밋해진 이 시대에 요나보다도, 솔로몬보다도 더 크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가 정신의 위대함을 드러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스스로가 표징이 되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증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 영혼이 점점 성장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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