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으로 사는가?
롬1:16-17
(2016/05/22, 웨슬리 회심주일)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 복음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 속에 나타납니다. 이 일은 오로지 믿음에 근거하여 일어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
• 깍두기 혹은 왕따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주일인 동시에 감리교회운동을 시작한 존 웨슬리 회심 278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지난 며칠 동안 여름 날을 방불케 하는 더위에 시달렸습니다. 무더위 보다 더 힘겨운 것은 우리 사회 도처에 스멀스멀 안개처럼 번지고 있는 증오심입니다. 한 젊은 여성이 강남역 부근의 남녀 공용 화장실에서 무참하게 살해당했습니다. 그게 '묻지 마 범죄'인지, '여성 혐오 범죄'인지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습니다만 분명한 사실은 그 범인이 자기보다 약한 여성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사회에 대해 품은 분노와 증오심을 사회적 약자 특히 여성에게 집중시켰다는 사실 앞에서 많은 이들이 충격을 받고 있습니다. 누구나 그런 폭력의 표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는 아주 빠르게 위험사회로 변하고 있습니다. 약자에 대한 배려와 돌봄이 제도 속에서는 어느 정도 구현되고 있지만 우리 의식 깊은 곳에서는 아직도 부족합니다. 예수님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버려두고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 잃어버린 한 마리를 도외시하고 보살피지 않는 사회는 상황이 바뀌면 그 아흔아홉에 속한 이들 가운데 누구라도 버릴 수 있는 무정한 사회입니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을 요구하는 사회는 병든 사회입니다.
폭력을 폭력으로 되갚아줄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집중되는 폭력 혹은 사회적 증오는 악마적입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특정한 사람들을 혐오의 표적으로 삼아 자기 속에 있는 공격성을 마구 표출할 때 세상은 혼돈에 빠지고 맙니다. 건강한 사회는 사회적 약자들을 품고 가는 사회입니다. 몇 해 전에 숙명여대 김응교 교수님이 페이스북에 쓰셨던 글이 생각납니다. 어린 시절에 마을 아이들이 편을 갈라 놀 때면 늘 남는 아이가 있게 마련입니다. 몸이 약하다든지, 어리다든지, 운동 능력이 부족하다든지, 이유는 다양했습니다. 그러면 게임에 참여할 아이들이 가위바위보를 해서 편을 가른 후에,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아이를 어느 한편에 끼어주었습니다. 그런 이들을 일러 '깍두기'라 했습니다. 그런데 김교수의 다음 말이 참 재미있습니다. 깍두기는 승리의 기쁨은 함께 나누지만 패배의 책임은 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깍두기도 마당에서 즐길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인정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약한 아이들은 늘 배제를 경험합니다. 여기에도 저기에도 낄 수 없는 이들을 일러 '왕따'라 합니다. 동일한 사람이 깍두기도 될 수 있고 왕따도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사회의 분위기입니다.
승자만이 인정받는 세상, 경쟁을 내면화하고 살아가는 세상은 소수의 승리자들과 다수의 패배자들이 갈리는 세상입니다. 승리자들의 오만과 패배자들의 한숨과 원망이 넘치는 세상은 위험한 세상일 뿐입니다. 이전보다 물질은 넉넉해졌지만 사람다운 삶의 가능성은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혐오 범죄의 뿌리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출세하라는 세상의 노골적인 가르침에 잇대어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 사는 이들은 누구나 긴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스트레스와 우울증이 많아집니다. 타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여백은 점점 사라집니다. 집 밖 세상은 적대감에 가득 찬 공간처럼 생각되기 시작합니다. 거리를 걷는 이들을 보십시오. 온유하고 따뜻하고 선한 눈길과 만나기 어렵습니다. 친근하고 다정한 말과 만나기 어렵습니다. 도처에서 라멕의 노래가 들려옵니다. 라멕은 에녹의 고손입니다. 그는 자기 두 아내인 아다와 씰라에게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아다와 씰라는 내 말을 들어라. 라멕의 아내들은, 내가 말할 때에 귀를 기울여라. 나에게 상처를 입힌 남자를 내가 죽였다. 나를 상하게 한 젊은 남자를 내가 죽였다. 가인을 해친 벌이 일곱 갑절이면, 라멕을 해치는 벌은 일흔일곱 갑절이다."(창4:23-24)
• 지속적으로 마음을 지배하는 습관
그러나 우리는 다른 노래에 동참하라는 부름 앞에 서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 삶을 바쳐 부른 노래입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5:43-44)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을까요? 우리 마음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직접 이런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에게 싸늘하게 등을 돌린 이들을 용서하셨고, 박해하고 조롱하는 이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늘 아버지께 청하셨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모든 모순과 폭력, 미움과 증오, 슬픔과 연약함을 당신의 두 어깨에 짊어지셨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런 삶이 영생에 이르는 삶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까? 라멕의 노래입니까? 그리스도의 노래입니까?
믿음의 뿌리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가 기뻐하는 일을 합니다. 예수를 사랑하는 이들은 예수가 기뻐하시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를 사랑한다 말하면서도 제 좋을대로 사는 이들은 아직 믿지 않는 이들입니다.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는 종교적 삶이란 세속적인 삶에 뭔가를 덧붙이는 게 아니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제 생각에 종교란 지속적으로 마음을 지배하는 습관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생각을 새롭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모양을 회복하는 것이며, 마음과 삶을 지극히 거룩하신 구원자의 마음과 생각과 계속해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케네스 콜린스, <존 웨슬리 톺아보기>, 이세형 옮김, 신앙과지성사, 2016년 4월 13일, p.68에서 재인용)
지금 우리 마음을 지배하는 습관은 무엇입니까? 세속적인 성공과 출세를 위해 온통 마음을 기울이고 사는 것은 아닌지요? 타자를 깊이 배려하고 조금이라도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계신지요?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고 있습니까? 이웃들이 우리를 보고 당신을 보니 하나님이 살아계신 게 분명하다고 고백할까요? 믿는 자로 산다는 것은 거룩하신 구원자의 마음과 생각에 자기를 일치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우리도 기뻐하는 것이고, 주님이 마음 아파하시는 것을 우리도 아파하는 것입니다.
• 영혼의 날개
감리교인들이라면 대개 1738년 5월 24일 저녁에 있었던 한 사건을 기억합니다. 존 웨슬리는 그 해 2월에 당시 식민지였던 조지아 주의 서배너에서 사역하다가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1년 9개월간의 서배너 사역은 그에게 회한만 남겨 주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의 자기의 영적 상태를 '불신앙', '교만', '망각', '정신의 경솔함과 방만'이라는 네 단어로 요약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파렴치한 사람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거룩한 삶을 맹렬히 추구하는 사람이었기에 그의 자기 진단은 냉정합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깊이 실망했습니다. 우울함이 찾아왔습니다. 책을 읽을 수도, 묵상을 할 수도, 노래나 기도를 할 수도 없었습니다. 영혼의 어둔 밤이 찾아온 겁니다.
그러나 밤이 깊으면 새벽이 오는 법입니다. 그 운명의 날이 다가왔습니다. 그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런던의 올더스게이트가에서 열린 모라비안들의 신도회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마음에 일으키시는 변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는데, 그 때 웨슬리의 마음이 이상하게 훈훈해졌습니다. 사람들은 이게 화끈한 불체험이라고 말하고 싶어 하지만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아주 조용한 마음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생전 처음으로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주님께서 자기의 죄를 다 거두어 주셨고,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되었다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두고 존 웨슬리의 회심이라 말합니다.
그 이후 존 웨슬리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거룩한 삶, 성화된 삶을 꾸준히 추구했습니다. 그는 새로운 신앙 운동을 통해 타락했던 당시 사회를 정화했습니다. 웨슬리의 동료들은 더 이상 교회 안에만 갇혀 지내지 않았습니다. 아픔과 눈물이 있는 곳, 죽음의 그늘진 땅에 사는 이들이 있는 곳 어디에나 다가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새로운 삶이 가능하다고 증언했습니다. 증언만 한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삶의 본을 보였습니다. 몸과 마음을 온전히 바쳐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수행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까지 날아오르고 싶어했습니다. 존 웨슬리는 '의도의 단순성', '사랑의 순수성', '말과 행동이 하나 되는 것', '우리의 모든 기질을 지배하는 하나의 열망'이 자기 영혼의 날개라고 고백했습니다(앞의 책, p.45).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또 이웃들에게 복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마음과 잇대어 살기 위하여 노력했던 것입니다. 복음적 삶이란 바로 그런 것일 겁니다.
•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 복음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16)이라고 고백합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이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우리를 얽어매 부자유하게 하던 것에서 해방됩니다. 이전에는 차마 사랑할 수 없던 사람까지 사랑하게 됩니다. 복음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우리가 진정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십자가 복음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의에 감사한다면, 이제 우리는 이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한점 불빛이 되어야 합니다. 미움과 증오와 극한의 이기심이 지배하는 것 같은 세상에 사랑과 따뜻한 온기를 가지고 들어가야 합니다. 따돌림 받는 이들, 무시당하는 이들의 친구 혹은 설 땅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한 분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엊그제 세상을 떠나신 정선희 권사님의 삶은 하나님의 은총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보여주는 징표입니다. 권사님은 경상도 태생이지만 아기 때 부모님을 따라 중국 길림성에 정착하셨습니다. 아주 어린 나이에 부모임을 잃고 동생을 건사해가며 고생을 참 많이 하셨습니다. 그리고 배움에 대한 열의 때문에 야학을 통해 한글을 배우셨습니다.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자 책이 읽고 싶었고, 옆집에 있는 낯선 책 한 권을 빌려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눈이 환해졌습니다. 라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습니다. 새로운 인생이 그의 앞에 펼쳐졌습니다. 그 책은 성경이었고, 권사님은 그 놀라운 책 이야기를 주위 사람들에게 들려주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많은 이들이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 마을에 하나님을 믿는 이들의 공동체가 형성되었습니다. 사람이 많아지고 나서야 목회자를 청빙할 수 있었습니다. 그냥 거기에 그친 것이 아닙니다. 권사님은 또 다른 마을에도 복음을 전하곤 했습니다. 누군가 복음을 전하러 떠나면 남은 교우들은 그를 위해 '뒷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뒷 기도란 중보 기도를 일컫는 말입니다.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을 돕는 일에도 열심이셨습니다. 한국에서 살고 있던 딸들을 돕기 위해 서울에 오셔서 우리 교회에 출석한지 10년이 되었습니다. 저는 권사님을 뵐 때마다 그 겸손하고 따뜻한 표정과 마음씨와 깊은 믿음과 헌신에 놀라곤 했습니다. 행여라도 중국인이라 하여 따돌림을 당하지 않을까 염려하였지만 청파교회는 권사님에게 제2의 고향처럼 포근한 곳이었습니다.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지만 저는 그가 하나님 곁으로 옮겨가셨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는 정말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부끄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구원을 얻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패배의 상징이 아니라 패배를 넘어서는 궁극적 승리의 상징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세상이 험하다 하여 우리까지 마음이 움츠러들어서는 안 됩니다. 증오보다 사랑이 더 근원적임을 삶으로 입증해야 합니다. 사회적 약자들을 혐오의 대상으로 삼고, 누군가에게 수치심을 안겨줌으로 스스로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이들은 가련한 영혼들입니다. 유다서의 말씀처럼 "자기들의 수치를 거품처럼 뿜어 올리는 거친 바다 물결이요, 길 잃고 떠도는 별들"(유1:13)입니다. 우리는 돈이나 우리의 경험 혹은 능력으로 사는 이들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어렵더라도 그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을 때, 어느 순간 우리 영혼에 날개가 돋아날 것입니다. 그 날개로 하나님의 마음을 향해 날아오를 때 우리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기쁨과 평강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미움과 증오가 사라지는 날을 내다보며 오늘도 내일도 주님과 동행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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