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멍이든 하나님
아주 오래 전 기가 막힌 현실에 대한 증언을 들은 후 ‘하나님, 당신도 우리처럼 가슴이 미어지십니까?’ 하고 울부짖던
어느 목사님의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들으시는 하나님, 보시는 하나님의 가슴에 시퍼런 멍이 들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 될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시인 최승호는 일찍이 “끙끙 앓는 하나님, 누구보다 당신이 불쌍합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탐욕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신음소리를 들었던 것입니다.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시는 하나님,
인간대접 받지 못하고 조롱당하는 이들의 시커멓게 타버린 가슴을 고스란히 품어 안으시는 하나님,
신음하는 피조물의 탄식소리에 가슴이 타는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몇 분 동안이나 구조 요청 전화를 했지만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여성의 비명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옵니다.
아벨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는다고 말씀하셨던 주님의 말씀이 들려오는 듯합니다.
그 절체절명의 시간, 세상은 한 개인의 고통을 외면했습니다.
연예 기획사 사장이 자기의 지위를 이용해 연예인 지망생을 성폭행했다는 소식도 들려옵니다.
게다가 그는 어린 가수들조차 그 일에 가담하도록 지시하고 자기는 CCTV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욕망의 포로가 된 사람이 어떻게 괴물로 변하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중학생 하나가 친구의 괴롭힘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등졌습니다.
뒤에서 연필로 자꾸 찌르고, 때리고, 부하처럼 거느리려 했기에 그는 공포와 아울러 굴욕감을 느꼈습니다.
상처 입은 자존감을 회복할 방법이 없자 그 학생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사람됨을 배워야 할 학교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카이스트 학생 한 사람은 경쟁에 시달리다가 삶의 무의미성을 해결하지 못한 채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마치 우리 삶의 자리가 죽음의 벌판이 된 것 같습니다.
효율성, 수월성 교육이라는 명분 아래 경쟁 속에 내몰리는 이들의 가슴을 열어보면 퍼런 멍이 들었을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을 느닷없이 떠나보낸 가족들의 비통한 울음소리가 잦아들기도 전에, 우리는 또 다른 죽음 소식을 듣곤 합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미군이 자살 폭탄으로 훼손된 아프가니스탄 병사의 시신을 조롱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 도대체 인간이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까?
우리 사회는 어느덧 이웃의 고통에 둔감한 곳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온 산을 헤매고 다니는 목자의 이야기는
‘어느 좋은 날’의 신화가 되어버리고 만 것 같습니다.
하버드 대학 교수인 새러 로이(Sara Roy)의 글을 보며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는 나찌의 수용소에서 생환한 아버지의 팔에 새겨진 푸른색 번호를 보며 자란 사람입니다.
어릴 때부터 나라 없이 떠도는 이들의 설움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여러 해 전 그는 팔레스타인 땅을 찾았습니다.
학자로서 ‘점령’의 현실이 점령지 사람들의 경제생활, 일상생활, 의식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자기 삶에 대한 통제권을 갖지 못한 이들의 비참한 현실을 목격했습니다.
어느 날 일단의 이스라엘 군인들이 나이 지긋한 팔레스타인 사람을 조롱하는 현장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3-4살 쯤 된 손자와 함께 당나귀를 끌고 지나가던 노인을 불러 세웠습니다.
군인들은 당나귀에 실린 짐을 검사한 후 당나귀의 입을 벌려보며 말했습니다.
“이봐, 이 당나귀의 이가 왜 누래? 날마다 닦아주지 않나보지?” 노인은 당황했고 아이는 겁에 질렸습니다.
노인이 침묵하자 군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대답하라고 윽박질렀습니다.
다른 군인들은 야비한 웃음을 짓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고 노인은 굴욕을 당하면서도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군인은 노인에게 당나귀 뒤에 서게 한 후 당나귀 엉덩이에 입을 맞추라고 지시했습니다.
노인은 거절했지만 군인의 강압에 못 이겨 마침내 고개를 숙이고는 당나귀 엉덩이에 입을 맞췄습니다.
아이는 발작적인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 광경을 보며 군인들은 웃으며 사라졌습니다.
그 노인과 둘러선 사람들에게 모욕을 주려던 그들의 목적이 달성되었기 때문입니다.
(Sara Roy,
새러 로이의 글을 읽으면서 떠오른 말씀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지만, 궁핍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공경하는 것이다.”(잠14:31)
힘 있는 자들에 의해 자행되는 이런 모욕과 폭력이 일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가슴은 멍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 멍을 풀어드리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저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사람들, 하나님을 역사의 섭리자로 믿는 사람들은
동료 인간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쉬지 않고 힘써야 합니다.
사람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하나님, 기가 막힌 현실을 보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지금 쓰린 가슴을 부여잡은 채 광야 길로 접어들고 있는 이들은 누구입니까?
주님은 바로 우리들을 당신의 심부름꾼으로 삼아 그들의 가슴에 희망을 부어주려 하십니다.
이런 놀라운 일에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가슴에 든 멍을 풀어드리기 위해 움직일 때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돌덩이를 녹여주십니다.
환하게 피어난 꽃들이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을 가져다주듯이,
주님의 빛을 받아 환해진 우리들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평화의 꽃, 생명의 꽃, 웃음꽃이 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문학평론가 김기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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