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목사(청파교회)

 야만의 시간에도

천국생활 2012. 4. 21. 07:19

 

 

 

야만의 시간에도


다시금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던 시간, 세상은 흑암과 절망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정의와 진리와 사랑과 선이 잦아들고,

악마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는 것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군인들이 예수님의 손과 발에 쾅쾅 쳐 못을 박을 때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사는 사람들,

진실과 정의가 승리한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의 가슴에도

 대못이 박혔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한껏 조롱하던 이들은 강자의 편에 서서

자신의 용렬함과 비겁함을 숨기려 했습니다.

그 어둠의 시간, 야만의 시간에도 주님은 당신께 맡겨진 일을 계속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눅23:34).

 

저는 이 말씀에 감동하고 또 감동합니다.

죽음의 문턱에서도 주님의 사랑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폭력과 미움과 비겁함과 무지함을 사랑으로 감싸 안으셨습니다.

 

이 대목을 묵상할 때면 신동엽의 시 <껍데기는 가라>의 마지막 연이 떠오릅니다.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기로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든 쇠붙이는 가라

시인은 한반도에서 모든 전쟁 무기들이 사라지는 세상을 꿈꾸고 있습니다.

절절한 평화의 염원을 담고 있는 ‘흙가슴’이라는 표현이 이채롭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품에 안아 기어이 정화시키고야 마는 흙을 닮은 마음이 바로 흙가슴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야말로 흙가슴입니다.

 

어느 날 외국 기자가 장일순 선생을 찾아와 물었습니다.

“혁명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혁명이란 따뜻하게 보듬어 안는 것이라오.”
“그런 혁명도 다 있습니까?”
혁명은 새로운 삶과 변화가 전제가 되어야 하지 않겠소?

 

새로운 삶이란 폭력으로 상대를 없애는 게 아니고, 닭이 병아리를 까내듯이

자신의 마음을 다 바쳐 하는 노력 속에서 비롯되는 것이잖아요?

새로운 삶은 보듬어 안는 정성이 없이는 안 되지요.”(최성현 엮음, <좁쌀 한 알>, 156-7쪽 요약)

우리는 야만의 시대에 대해 분노해야 하지만,

사람들을 네 편 내 편으로 가르고, 누군가를 적으로 규정하는 일은 피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의 길이 아닙니다.

불의에 치열하게 저항하면서 정의를 추구해야 하지만,

미움과 증오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주님은 하늘 군대를 동원하여 원수를 없애기보다는

당신의 몸으로 세상의 어둠을 받아들여 빛으로 바꾸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의 혁명입니다.

어리석어 보이고, 너무나 더딘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길이야 말로 생명의 길이고 평화의 길입니다.

 

마하트마 간디의 말이 떠오릅니다.

“자기의 몸을 신에게 바친 사람은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신을 믿는 사람은 결코 희망을 잃지 않는다.

진리가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리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김기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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