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운 사랑아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리자’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찬미면 찬미지 왜 그 말이 제사와 결합되는 것일까요?
희생이 없는 찬양은 진정한 찬양일 수 없다는 뜻일까요?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여기에 제사라고 번역된 영어 단어 ‘새크리파이스sacrifice’는 성스러운 제의祭儀를 뜻하는 ‘사크라sacra’와
수행하다/실행하다는 뜻의 ‘facere’가 합쳐진 말입니다.
깨지고 찢기는 산하를 위해 몸으로 울고 있는 사람들,
거리로 내몰린 이들과 연대하기 위해 낮은 곳을 향해
길 떠나는 사람들이야말로 하늘의 찬양대가 아니겠습니까?
며칠 전 우리는 허병섭 목사님의 부음에 접했습니다.
그분을 아시는 분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도시 빈민의 대부’, ‘살아 있는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를 ‘길 잃은 목자’라고도 불렀습니다. 서있는 자리에 따라 한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이 이렇게도 다릅니다.
그는 목사가 된 이후에 가난과 절망과 자기 멸시에 빠진 사람들의 벗이 되어 그들을 일으켜 세워주는 것을
자기의 소명으로 알았고, 하월곡동 산동네에 ‘동월교회’를 세워 주민들과 한 몸이 되어 살았습니다.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는 이들을 위해 무료 진료를 알선하고, 아이들을 위해 탁아방도 만들고,
집 없는 이들에게 잠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1988년에는 신분이 가지는 권위조차 벗어던지기 위해 목사직을 반납하고 미장이 일을 배워 노동자로 나서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그는 땅을 가까이 하는 삶에서 희망을 보고는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무주로 내려가 푸른꿈고등학교를 세우고
산고 끝에 거창에 녹색대학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보여준 참 목자였습니다.
그는 진영 밖으로 나가 주님의 치욕을 짊어지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고마운 사랑아>라는 노래로 그와 석별의 정을 나눴습니다.
고마운 사랑아 샘솟아 올라라
이 가슴 터지며 넘쳐나 흘러라
새들아 노래 불러라
나는 흘러흘러 적시리
메마른 이내 강산을
뜨거운 사랑아 치솟아 올라라
누더기 인생을 불질러 버려라
바람아 불어 오너라
나는 너울너울 춤추리
이 언땅 녹여 내면서
사랑은 고마워 사랑은 뜨거워
쓰리고 아파라 피멍든 사랑아
살갗이 찢어지면서
뼈마디 부서지면서
이 땅 물들인 사랑아
이 땅 물들인 사랑아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것으로 우리 할 일을 다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가시는 저 성문 밖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참된 생명의 빛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으로 온 땅을 물들인 예수님은 지금도 고난의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성큼성큼 그 길을 따라 걷지 못한다고 부끄러워하거나 속상해하지 마십시오.
아주 조금씩이나마 그 길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보이지 않는 보폭으로 담을 채우는 담쟁이넝쿨처럼,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도 사랑의 세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모두 ‘그 길’의 사람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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