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
사람들은 하나님을 불변하시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초월적이고 무시간적인 존재이기에 세상에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 분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리스적 사고일 뿐, 성경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낮은 자들의 신음소리를 못 견뎌하시고, 억압자들을 높은 자리에서 내치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에게 등을 돌리는 백성으로 인해 상심하시기도 하고, 당신의 뜻을 따르는 이들로 인해 기뻐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물론 초월적인 분이고 시간 너머에 계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세상사를 초연하게 바라보시지 않습니다.
땅은 그분의 발등상이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품성을 표현하기 위해 즐겨 사용하는 단어 혹은 구절은 다섯 개입니다.
‘자비로움’, ‘은혜로움’, ‘노하기를 더디 하심’,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함’(출34:6)이 그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초기에 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에 큰 저항감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이 질투하신다고. 쪼잔하게.’
질투란 우월한 사람을 시기하고 증오하는 감정입니다. 그러나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그 말은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역설적으로 표현한 말이라는 것을.
성경의 하나님은 우리들의 선택과 결정에 의해 영향을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이사야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비록 어머니가 자식을 잊는다 하여도, 나는 절대로 너를 잊지 않겠다”(사49:15b)라는
말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시는 분이십니다. 초지일관이 늘 좋은 것은 아닙니다.
길을 잘못 들었는데 기왕 접어들었으니 내처 가자고 하면 그처럼 어리석은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돌이켜 원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한때 어떤 민족이나 나라의 뿌리를 뽑아내거나, 그들을 부수거나 멸망시키겠다고 하셨더라도
그들이 죄악에서 돌이키기만 하면 재앙을 거두십니다.
반대로 어떤 민족이나 나라를 세우고 심겠다고 말을 하였더라도, 그들이 순종하지 않고 악한 일을 하면
약속했던 복을 거두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속한 민족이나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느냐, 그 뜻을 거역하느냐’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인내의 시간입니다.
심판과 구원 사이의 시간, 즉 돌이킬 기회가 부여된 시간, 회개의 시간입니다.
지금은 자다가 깰 때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은혜의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고후6:2b).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거듭해서 다시 빚고 계십니다.
그 은혜의 손길 아래 우리 몸과 마음을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작고 여린 것들이 폭력으로 유린되는 세상에 분노하십니다.
크고, 빠르고, 효율적인 것이 숭상되는 세상이지만
실상 평화는 작고, 느리고,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것들 속에 깃들게 마련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언제나 어리석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 어리석음이 세상을 구원합니다.
지금 주님의 발걸음이 어디에 머물고 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 그곳이야말로 우리가 있어야 할 곳입니다.
--김기석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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