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자녀로 입증하는 참된 표지(요1:12-13)--로이드 존스 박사
자녀의 관계와 자녀로서의 역할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자녀 관계와 자녀역할 관계---분명히 다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지를 시험해 볼 수 있는 방식입니다.
자녀의 삶은 그것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곧 아버지께로서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자녀는 그렇게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유유상종입니다.
그의 삶, 그의 모든 것을 그의 아버지의 차원에서 행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자녀가 닮습니다.
모든 것을 아버지께서 보시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온 이후에 삶에는 사실상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내 삶이 온전하게 하나님의 통제를 받는 것이든지 아니면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상에서 행해지든지 둘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해당되는 것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삼고 하나님의 조정에 의해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주님께서 친히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이었습니다.
그가 말씀하시는 것이 그 점을 보여줍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며 내가 하는 일은 내 스스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사 그렇게 말하라 하셨기 때문이며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은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것들이다.”
그분의 삶 전체가 하나님 아버지를 중심으로 삼고 있습니다.
분명히 그리스도의 삶 전체가 분명히 아버지의 통제를 받았습니다. 모든 방면에서 말입니다.
십자가를 지실 때가 왔을 때에도 그렇게 두려워 떨면서도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의 분량에 따라서 그렇게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에게 그 점이 필연적으로 해당되는 것입니다. 어떤 일에 있어서 여러분 자신의 모습을 보고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는 다시 그 점을 그의 요한일서에서 아주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께로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닌 자들이 세상적으로 생각하는 것같이 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 말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반드시 비열하고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는 죄를 짓는 자들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아주 극히 높은 추앙과 존경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세상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세상에 속한 자이며, 밖에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안중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이성과 더 나은 인간의 지식과 학식을 의지하며 생각합니다. 이 하나님의 계시가 그에게는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외인입니다.
반면 그리스도인이 넘어지고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의 삶 전체는 하나님에 의해서 통제됩니다.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차원에서 봅니다. 이 세계를 보더라도 그것을 모든 사람들이 보는 방식대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세상을 이기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을 압니다. 이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과 가진 관계 때문입니다. 그는 더 이상 그러한 것을 놀라운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는 진정 놀라운 것이 무엇이며 정말 영광스러운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보편적인 사고의 추세가 어떠한가
하지만 여러분의 보편적인 사고와 생각은 어떠합니까? 여러분의 생각의 추세는 어떠합니까? 이것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떤 이들은 눈에 보이는 진술로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되며 참 하나님의 자녀라고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것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구절을 배우고 반복하여 마치 앵무새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지는 사고방식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본적인 사고방식과 자세의 문제입니다.
어떤 사고방식과 자세를 가지는가?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가 아닌가를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자녀도 넘어질 수 있습니다. 실수하고 잘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회개합니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녀는 사랑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의식이 있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귀신도 믿고 떱니다. 마귀도 하나님을 믿으나 하나님을 미워합니다.
그러나 자녀는 하나님을 좋아합니다.
자녀도 잠시 느슨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여전히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필연적으로 그 마음속에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 가운데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신 일을 인하여 말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사 우리의 구주로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을 믿는다면, 어찌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온전하게 갖지 않고 절반만 가지고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께 대해 가지는 느낌이 어떠한가
여러분의 정성과 목숨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이 질문을 던지는 것은 여러분의 대답이 무엇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다시 이 질문을 던집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자신에 대해 불만이 가득 차 있어서 자신의 사랑이 약하고 희미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오 은혜로우신 주여, 더욱 주님을 사랑하게 하소서’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자녀의 표현입니다.
그 사랑이 아무리 희미하고 연약하다 할지라도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방식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존경심이 있는가
이 신비로운 태도에 있어서 우리가 놓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존경의 시금석입니다.
이것은 정말 불가피한 요소입니다. 여러분이 참 하나님께 대해서 관계를 가지고 있다면 또한 자녀에 합당한 자세를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면서도 아울러 존경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자녀가 어떠한 계명과 명령 중에 싫은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사랑합니다. 매우 가난한 아버지에게도 그 가난한 자녀는 중심에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옛 설교자들의 사고 구조를 오늘날 이 세대의 사람들이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왜 바울 사도는 "하나님 곧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서"(엡 1:3)라는 구절을 다루면서 어째서 그냥 “우리 하나님, 우리 아버지”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 곧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했습니까? 옛 설교자가 한 설교를 표현하는 것이 적절한 대답이 될 것입니다. 옛 설교자는 ‘성령의 숙고하심과 섬세함이 그렇게 하게 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정말 불행하게도 이 세대의 사람들 중에 어떤 이들은 가정과 '아버지'를 생각할 때에 아버지의 사랑과 관심과 배려와 공의와 친절과 긍휼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버지라는 말만 떠올리면 술주정뱅이가 생각나곤 합니다. 아버지만 생각하면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아버지께서 누구시며 어떠한 분이신지를 묘사합니다. 그러나 삶 속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것만으로는 전혀 도움을 받지 못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사도로 하여금 “우리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그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아들이 그러하면 아버지도 그러하니, 하나님이 구주 예수님의 아버지시라면, 그 분이 나에게 있어서 어떠한 아버지이신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입에 발린 천박한 하나님 사랑 표현은 영적이지 못함
‘나는 하나님을 사랑해요’라고 말할 준비가 항상 되어 있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술에 걸맞는 실속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친숙함을 나타낼 필요가 있는 것같이 하기는 하지요. 이유는 숨기고 있지만, 사실은 실속이 없는 천박한 정신구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에서 ‘좋으신 하나님’(Dear God)이라는 표현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영성의 진정성에 대한 표지는 바로 그러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고 아주 쉽게 친밀해지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신약에서는 그러한 식의 표현이 나오지 않습니다. 아들 되신 그리스도께서도 기도하실 때 “거룩하신 아버지”라고 했고, 우리에게 합당한 표현으로 ‘우리 아버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겨지기를 원하나이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사랑’과 ‘존중’은 서로 양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존경함이 없이 사랑만 있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천박한 정신구조의 소치에 불과합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존경도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대해 자녀가 되는 진정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자녀는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존경합니다. 하나님을 우러러 보는 것입니다. 그분과의 거룩한 관계를 떠나서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고 능력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분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외경심과 친숙함 사이에는 서로 모순이 없습니다. 이 둘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만일 그 둘을 분리하게 되면 반드시 방황하게 됩니다. 사랑은 존경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옵소서.”
그리스도인의 긍지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긍지에 대한 의식입니다.
이것이 다섯 번째로 적용하는 시금석입니다. 자녀는 자기가 자기 가문에 속하여 있다는 것을 늘 자랑합니다. 거기에는 잘못이 없습니다. 우리가 건전한 긍지를 가지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자식은 자기가 영광스러운 가문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늘 자랑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물론 뽐내고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아름답게 하는 것은 악하고 죄악적이며 미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긍지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은 나라에 대한 자연스러운 긍지를 죄악적으로 정죄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 나라로부터 모든 것을 생각하고 그것만 생각하면 잘못이며 죄악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나서 어떤 가문에 속하게 되고 어느 사람으로 태어나게 되면 그 가문과 나라에 속한 자긍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나라에 태어나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합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된 것은 혈통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입니다.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난 것을 정말 사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녀는 바로 이 사실을 자랑합니다. 그의 삶에 있어서 그 사실이 정말 위대한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으로 그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 알고자하는 것이 자녀의 소원
그 점은 이제 여섯 번째의 시금석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이것은 생물학적으로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것입니다. 자녀는 하나님을 더 잘 알고자 하는 소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의 아버지 하나님의 무리들과 함께 있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합니다.
자녀는 매일 밤 부모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립니다.
아버지가 일을 다 마치고 돌아오면, 아버지께로 달려갑니다.
자녀는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을 지겨워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본능입니다.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영적인 차원에서 그것을 바꾸어 생각해도 같은 진리입니다
하나님을 더 잘 알고자 하는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 분 앞에서 할 수 있는 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 합니까?
자녀가 부모로부터 받은 특별한 사랑은, 기도의 말을 통해서, 미소로 표현합니다.
자녀가 부모에 대해서 가진 사랑을 표현하듯이 말입니다.
삶에 있어서 가장 큰 기쁨은 아버지 하나님이 주신 사량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사랑을 아들이 아버지께서 주신 특별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 같이 표현합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미소를 더 많이 보기 위해서, 여러분을 향하신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 온 세상과 모든 소유를 다 드릴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는 마땅히 그렇게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자녀는 하나님을 알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더 이상 종의 두려움의 영을 갖지 않고
아바 아바지라 부르짖는 양자의 영을 갖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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