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가장 무서운 질병은 인간의 욕망이 만든것

천국생활 2009. 10. 30. 09:52

가장 무서운 질병은 인간의 욕망이다 -------<김헌식 칼럼>신종플루 신드롬와 괴물의 탄생

 

 

버스를 기다리던 옆 사람이 재채기를 하면 우려스럽게 쳐다보고 그가 침이라도 뱉으면 경악한다. 평소 시민들이 애용하는 버스는 침이 섞인 흙탕물을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튀기며 지나간다. 그렇게 영화 ‘괴물’에서 시민들은 바이러스 공포에 시달린다.

다행히 이 영화에서 바이러스는 실체가 없는 것이었고, 그것을 조장하는 정부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신종플루를 이러한 범주에 놓으면 안 되겠다. 분명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목숨은 인류의 전부이다. 이때문에 신종 전염병은 인류의 역사와 사회를 변화시켜왔다.

홍역과 두창은 황금시대를 구가하던 아테네를 멸망시켰다.

543년 동로마에서 발생한 페스트는 나라를 멸망으로 이끌 만큼 위력이 치명적이었다.

유럽에서 건너간 전염병은 신대륙의 원주민을 몰살시켰다.

발진티푸스는 러시아 정벌에 나선 나폴레옹의 50만 대군을 전멸하도록 만들었다.

1917-21년까지 러시아에서는 300만명이 이 질병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14세기 중엽 유럽의 흑사병(Black Death)은 인구의 절반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변화시킨 것은 단순히 인구의 수가 아니었다.

농토는 황폐화되었고 무역은 사라졌다.

사회경제적 구조, 종교에 대한 태도, 가치관 등이 변화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중세봉건 질서의 붕괴를 가속화 시켰다.

 

특히 신앙의 독실함에 관계없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따라서 교회에 대한 믿음은 급격하게 이반되었고, 인간 스스로 자신의 삶을 구제하려는 노력이 더 강화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인간의 합리성의 극단화인 과학의 발달이었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은 오히려 새로운 질병을 끊임없이 발생시켰다. 전염병과 과학의 물고 물리는 추격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영화 ‘괴물’에서와 같이 질병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파고들어가 사회문화를 바꾸어 놓는다. 이번 신종플루도 마찬가지다.

술자리와 회식문화가 바뀌었다.

찌개를 시켜 같이 퍼먹지 않고, 앞 접시를 주문한다.

술잔을 주고받지 않으며, 폭탄주를 돌리지도 않는다.

같이 공유하는 것은 이제 금기의 대상이다.

또한 알 수 없는 곳에 섞이는 것도 마찬가지가 되었다.

모든 활동과 쓰임의 단위는 개인으로 이제 확 바뀔 것이겠다.

해외여행은 가지 않으니 제주도가 신혼여행지로 각광받는다.

하지만 사람들이 많이 참여하는 축제 참여 인구가 감소되었고, 숙박시설은 줄어든 손님에 울상이다. 단체행사가 줄어들고 단체 모임은 취소 된다. 앞으로도 상당기간 지속되면서 공동체적 공유의 참여문화는 침체될 가능성이 많아졌다. 혼자만의 여행이나 공간을 선호하는 과정에서 걷기, 트레킹 여행은 더욱 늘어났다. 어쨌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공간은 기피하게 되고 개인 혼자만의 공간에 스며들었다.

기침이라도 하면 눈을 흘리고 피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사회심리가 형성되었다. 신종 플루 때문에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신종플루 바이러스 자체가 아니라 다른 이들을 무서워하게 되었다. 오로지 자신만을 믿고, 자신에게만 침잠해 들어갔다. 이웃은 모두 바이러스를 갖고 있는 괴물이 되었다.

같은 반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도 불신하게 되었고, 심지어 가족도 믿지 못하게 되었다.

타인은 여전히 경쟁 상대이며 이제 나의 생명을 위협할 뿐이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생각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항상 나를 위협하는 존재일 뿐이다. 모든 잘못은 다른 이들에게 있다.

인간의 한계란 다른 이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이러스를 보지 못하기에 공포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데 있다. 이 때문에 뜻하지 않게 바이러스에 걸린 것 때문에 선량한 사람도 악인이 된다. 도덕적 판단의 기준은 바이러스가 아니라 재수없게 걸린 이들이다.

결국 그 인간의 한계 때문에 서로는 서로에게 괴물이 되었다.

하지만 면역력이 약해진 사람들은 대개 열심히 성실하게 삶을 살려고 발버둥친 사람들이다.

무리할 필요없이 언제든 충분한 수면과 영양요소를 섭취하고, 병원에 가라고 하지만 생활인들은 쉽지 않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무서운 질병은 우리의 욕망이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점이다.

신종플루이건 조류독감이건 인플루엔자는

동물의 공장식 가축화와 생산에서 비롯한 것이다. 돼지의 구제역도 마찬가지다.

이뿐인가. 광우병도 더 많은 고기를 생산하는 것에서 비롯했다.

에이즈는 밀림의 벌채 남발로 바이러스가 있는 원숭이와 인간이 접촉한데서 확산되었다.

무엇보다 악성 독감은 면역력이 약해진 틈으로 약품에도 죽지 않는 변종 바이러스에서 기인한다.

맑은 공기와 좋은 공기, 흙, 수풀 등지에서 있어야할 동물들이 그렇지 않은 공간에서 길러질 때 당연히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면역력이 약해진 동물에게 항생제만 투입하다보니 더욱 약체가 된다. 그 가운데 강해지는 것은 바이러스뿐이다. 어디 이것이 동물에게만 해당될까. 사람도 사육되고 있다.

좋은 공기, 물, 흙, 숲에서 살아야할 사람이 그렇지 않은 공간에서 고밀집도로 몰려 살다보니 항생제만 먹고 저항력이 약해졌다. 1918년 스페인 인플루엔자로 미국에서만 55만 이상이 죽었다. 뉴욕에서만 9천명이 죽었다. 사육장에서 닭과 돼지가 서로 원망의 눈초리들이 대하듯 시민들은 서로를 불신하고 무서워하고 괴물로 대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 면에서 신종 플루 등이 단순히 몇 가지 의학적 조치로만 해결될 수는 없다.

국민소득 몇 만 불이 목표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시민이 건강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좋을 것이다.

 

1950년 이후 30여종의 전염병이 찾아와 불안사회를 만들었고 이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반복될 것이다.

갈수록 이러한 질병의 발생은 공동체적 국가적 단결과 통합을 저해하고 발전을 이루는데 큰 장애를 낳을 것이다.

단기적으로 이 난국을 타개하는데 정책적 노력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사회와 문화구조를 장기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언제나 생명의 손실,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소모 등은 반복된다. 그것은 한나라만이 아니라 지구공동체 각나라가 연대해야 할 아젠다이다. 이런면에서도 한국이 주축국이 되는 것이 중요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