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 모음

꿈이여 다시 한 번 --법률신문

천국생활 2008. 12. 24. 15:13

꿈이여 다시 한 번
황적화 부장판사(서울중앙지법)


 

 

30여년 전 사병으로 입대해 전방에서 군복무를 하던 필자는 전역을 몇 달 앞둔 어느 늦가을에 불의의 사고로 부상을 입고 지방 도시의 국군통합병원으로 후송돼 장기간 투병했다. 석고붕대에 칭칭 감긴 채 묵묵히 누워있으려니 치열했던 일상은 까마득히 사라지고 광대한 고독의 시간이 사막처럼 펼쳐졌다. 밤이 오면 주변 침대의 동료들이 부서진 몸보다 더 아픈 가슴앓이로 숨죽여 울었고, 그 흐느낌 속에서 젊은 날의 빛나던 꿈은 마지막 잎새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한 무리의 학생들이 적막한 병실로 찾아와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다정하게 우리를 위로했다. 그때 한 병사가 학생들에게 답례삼아 한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이 필자의 추억 속에 선명히 남아있다.

“저는 한 팔을 잃고 다리도 성치 못하게 된 후 절망의 깊은 어둠 속에 갇혀있었습니다. 그러나 죽을 힘을 다해 현실을 받아들이고 부정적인 생각과 수없이 맞서 싸운 다음에 비로소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 고마운 일이고 저의 삶이 이대로 끝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누군가의 말대로 병상(病床)은 인생의 최고학부(最高學部)인지도 모른다. 이 시절의 경험 덕분에 필자는 어떤 경우에도 감사할 줄 아는 겸손함과 함부로 절망하지 않는 진중함이 얼마나 귀한 것인 줄 알고 있다.

어느새 연말이 다가온다. 잠시 동안의 평온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세상이 수시로 급변하고 요동치다가 급기야 경제위기의 불안한 그림자를 길게 드리워 놓았다. 서민들의 남루한 살림살이가 한층 쪼들리게 됐고, 미래를 설계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10년 전 외환위기 때 겪었던 고난의 기억이 생생한 중장년층들은 긴 한숨 뿐 달리 할 말을 잃었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법원에도 애절한 사연들이 밀려들고 있다.

우리는 정말 막다른 길에 들어선 것일까? 그러나 어이하랴. 다시 떨치고 일어나지 않으면 어찌 할 것인가. ‘역경(易經)’에 나오는 64괘 중 제일 마지막 괘는 ‘미제(未濟)’인데 ‘어린 여우가 시냇물을 건너려다 그만 꼬리를 적시고 마는 형국’이라고 풀이된다. 이는 곧 미완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길흉이 미정이라 아직도 희망이 남아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느 때보다도 춥고 쓸쓸한 한 해의 끄트머리인 요즘의 형세는 미제의 괘를 닮았다. 동양학자 조용헌 선생이 주역의 핵심을 ‘음중양 양중음(陰中陽 陽中陰)’이라고 갈파한 것처럼 세상사 음양의 이치에 따라 순환하는 것. 가벼운 낙관은 금물이로되 함부로 비관해서는 더욱 안 될 일이다.

필자에게 인생을 가르쳐 준 병원생활의 마지막 장면은 따스하다. 오랫동안 몸을 옥죄고 있던 깁스를 톱으로 썰어 벗겨내면 군살이 떨어져나간 발바닥은 아기의 살이다. 발뼈가 살을 찌르는 아픔을 딛고 걸음마를 하면서 다시 일어서고 싶었던 소망을 이룬 감격에 눈물짓던 어느 병사의 뒷모습은 필자가 그립게 떠올리는 해피엔딩의 에필로그다. 한 해 내내 격동의 시간을 이겨낸 독자들의 마음에도 참된 위로와 평화가 깃들고, 알뜰히 갈무리한 꿈과 희망의 온기로 새봄을 준비하시는 계절이 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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