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힘써 알자

시대의 대적을 헤쳐가는 칼빈주의 돼야--김재성

천국생활 2008. 12. 17. 15:26

시대의 대적들을 헤쳐나가는 칼빈주의 돼야


김재성 / 합동신학교 교수



오늘의 한국교회 안에는 자신의 정통신앙 과시하기 위해서 보수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다.

교단과 교파를 초월하여 신학의 원리로서는 칼빈주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그러나 명맥만 칼빈주의자로 말할 뿐이지, 역사와 사회에 책임 있는 영향을 미쳤던 칼빈주의의 정신과 신앙 을 실제적으로 알고 되새기는 경우는 매우 부족하다.


오늘의 교회는 매우 심각한 고목화 현상에 직면하고 있다. 로마 가톨릭과 유럽의 동방정교회들은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심지어 칼빈주의 교회들마저도 생명력과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다. 명목만 개혁신앙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거대하고 교만한 개혁주의에 대해서 현대인들은 점차 회피하고 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기에는 너무나 거대해서 어찌할 수 없는 공룡처럼, 아무런 변화와 반성이 없이 굳어져가고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칼빈주의가 공헌했던 신앙적 유산을 간단하게 돌아보고 미래적 과제를 제시하려고 한다.

인생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가를 밝혀주지 못하고,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성공의 신학’에 휩싸여서 천박해지고 피상적이 되어가는 현상을 극복해가는 또 하나의 걸음이 되기를 기대한다(프란시스 쉐퍼, 「20세기 말의 교회」 39쪽 MichaelScott Horton, Made in America,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 서울 나침반, 1996을 볼것 ).

 



진리의 위기에 대처한 칼빈주의의 공헌


칼빈주의가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을 전후로 놀라운 영향력을 발휘하였는데, 이는 스위스의 독립도시에서 나타난 지도자들의 헌신과 신학적 감화 때문이었다. 종교개혁은 오래 지속된 진리의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이었고, 어려움이 많았던 시기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간섭으로 신앙의 부활과 삶에의 새로운 희망을 주었다. 16세기에 칼빈을 중심으로 체계화되고, 17세기에 발전되었으며 20세기초반까지 그 영향이 지대했던 칼빈주의에는 중요한 신학적 원리들이 있다.

 

첫째는 만물이 주님에게서 나오고 주님으로 말미암고 주님께로 돌아간다(롬 11:31)는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한 것이다.

둘째로 성경을 최상의 권위로 인정, 신앙과 인생과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밝혀주는 유일한 기초와 근거로 강조했다는 것이다.

셋째로 인간은 아담의 타락이후로 본질적으로 부패하였다는 성경적 인간관을 밝히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에 이르게 됨을 강조한 것이다.

넷째는 구원을 주시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 행하는 모든 노력마저도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주장한 것이다.

다섯째는 교회의 귄위와 성도의 자유를 완전히 인정하며, 질서를 위해서 권징을 실시하고, 목사와 성도의 대표인 장로로 당회를 구성하여 일반성도들의 참여의 자유를 존중한 것이고,

여섯째는 정부와 국가간의 관계에서 국가는 교회를 지배할 수 없고, 각자가 하나님이 주신 자주권을 행사한다고 하여, 특히 정당한 교회의 저항권을 높인 것이다.

일곱째는 성도들의 성실하고, 근면하고, 절제하는 생활을 높이 승화시킨 것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존하여 경건에 이르는 삶을 통해서 윤리적인 생활을 권고하고, 질서있는 생활을 통해서 전인격적 구원을 강조한 것이다.

이와같은 칼빈주의의 원리들은 제네바의 교리문답서(1537, 1545),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 (1563),벨직신경(1561), 제2차 헬베틱 신앙고백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3-48)등의 문서를 통해 지속적으로 형성되고 발전되었다. 그러나 시대마다 거센 도전에 직면하여 왔다.

 

 



칼빈주의가 헤쳐나간 물결들


먼저는 알미니안주의의 도전을 들 수 있다. 칼빈주의의 영향이 확대되어가고 있을 때, 칼빈주의에 대한 중요하고도 커다란 진리의 위기는 알미니우스(1560-1609)를 추종하는 자들에게서 나타났다. 이들은 1618-1619년에발표된 「돌트신경」 을 만들어낸 칼빈주의자들, 즉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개혁신앙의 영향력에 걸려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비교적 수월하게 정돈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선택권을 강조했던 것은 먼 미래로 볼 때, 위기의 첫 시작이었다.

 

돌트신경은 이른바 칼빈주의 5대교리라고 일컬어지는, 구원론을 확립하였다.

즉 인간의 전적인 부패,

    무조건적인 선택,

    불가항력적 은혜,

    제한속죄,

    성도의 궁극적 견인 이다.

또한 뉴잉글랜드에서도 칼빈주의가 헤쳐나가야 할 파도가 있었다. 그것은 청교도의 변질에 관한 것이었다.
칼빈주의는 영국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마틴 부서와 하인리히 불링거, 그리고 칼빈이 미친 영향으로 엘리자베드 여왕의 통치기간(1558-1603)을 전후로 해서 칼빈주의 사상이 널리 퍼졌다. 17세기에는 극심한 박해로 인해서 많은 청교도들이 신대륙으로 건너갔다. 1625년 죤 윈트롭이 청교도의 대표로 선호한 표어는 "언덕위에 빛나는 하나님 나라  도성의 건설"이었다.


철저한 순수성을 부르짖었던 청교도들은 금욕적이고 세상에 대한 적극적인 개혁이 불탔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교수였던 루이스 (C.S. Lewis)는 말하기를 "청교도들을 매료시켰던 인물은 위대한 신학자 칼빈이었다"고 했다.


청교도들은 세가지 조건을 근거로 시민권을 보장하였다. 즉 회심체험, 건전한 칼빈주의 교리의 고백, 그리고 신령한 경건생활이었다. 하나님의 택함 받은 사람인가에 대해서 철저히 조사하였다.


그러나 30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미국에 온 초기 이민자들이 죽거나 영향력이 감퇴하자 새로운 세대는 절충주의 중도노선을 택하게 되었다. 이것은 "반언약제도(Helf-waycovenant)"라고 불리워진다. 믿지 않는 부모라도 만약 자신들의 삶이 방탕하지 않고 뉴잉글랜드 교회의 기본교리만 따른다면 그들의 자녀들도 세례를 줄 수 있다는 허락이다. 심지어는 죤 코튼의 아들이던 메터 코튼 목사에 의해서 중생의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성찬은 개방되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청교도들이 채택한 국가의 제도나 체제가 그들이 영국에서 그렇게 비판하던 바로 그와 똑같은 제도와 체제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칼빈주의의 대몰락은 엘리자베드 여왕의 절충주의(via media)를 닮아 타협주의로 바뀌고 말았다.


1636년에 세워진 하바드대학에는 점차 교역자를 양성하기 위한 순수한 목표를 잃어버리고, 신학적으로 변질하기 시작하였다. 지금까지 회중파의 유니테리안 거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또한 1746년 통나무대학에서 승격된 뉴저지대학이 확대되어 1755년 프린스톤대학으로 청교도사상의 명맥을 이어오다가, 다시 진화론과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으로1929년 웨스트민스터가 또 다시 설립해 나가야만 되었다.


진리는 더 이상 뉴잉글랜드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신앙을 의미하지 않게 되었고, 하나의 학설로 전락하고 말았다. 칼빈주의가 독립운동 직전까지는 희미하게 나마 빛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에드워드의 대각성운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1734-5년의 대각성운동으로 뉴잉글랜드 청교도 목사들은 심오한 신학적 깊이와 감화력 있는 설교로 큰 교육적 사명을 다해가고 있었으나, 점차 칼빈주의적 정통신학을 포기하는 방향으로 기울이면서, 지적인 사고체계마저도 무너지고 말았다.

 



이성과 자유의 물결에 직면한 칼빈사상


18세기 유럽대륙에서는 독일에서 루터파의 쇠퇴로 인하여 종교개혁이 영향을 잃자, 남부에서도 이탈리아, 스위스에서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이 가졌던 인간에 대한 낭만적이고 자율주의적인 생각이 고개를 쳐들었다. 계몽주의자들은 쟝 쟈크 루소와 임마누엘 칸트(1724-1804)로 대별될 수 있을 것이다.

18세기를 거치는 동안에 칼빈주의는 사실상 거의 영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일부 소수의 신앙으로 몰락하였다. 1775년부터 1785년까지 미국의 독립전쟁이 있었고, 이 때부터 청교도의 전통은 사실상 빛를 잃었다. 이 시대를 주도한 인물들은 모두 크리스천이 아니었다.

칼빈주의에 도전과 시련은 20세기로 넘어오면서도 점증하였다. 칼 마르크스(1818-1883)와 레닌(1870-1924), 트로츠키(1878-1940, 스탈린(1879-1953)등에 의해서 점차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로 변질되어 나타났다.

 

 



부흥운동과 감정주의의 도전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세상을 추구하는 칼빈주의자들에게 거센 민중종교와 대중종교의 도전이 불어닥쳤다. 창조주대 피조물의 관계를 중요시했던 인간관은 사라지고, "국민의,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정치"라는 개념이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정신보다도 우위에 서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웨슬리안 부흥운동이 가져온 피해가 컸다.

18세기 영국의 사회개혁을 낳았다는 존 웨슬리(Wesley)와 찰스 웨슬리


(CharlesWesley)가 주축이 된 부흥운동은 「값없이 받는 은혜」라는 소책자를 중심으로 칼빈주의를 비판하고 나섰다. 이 책에는 하나님의 주권이나 택하심에 대한 언급이 없다.

흔히 부흥운동이 많은 사람들을 회심시켰다는 결과만 내세우면서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곤 한다. 그러나 부흥운동은 종종 진리의 위기를 몰고왔다. 부흥운동이 몰고온 천박한 열정주의를 통해서 사람들은 쉽게 열광하였고, 칼빈주의는 이들을 외면하게 되자 점차 사회적인 주도세력으로부터 결별하게 되었다. 따라서 역사의 교훈이자 극복의 과제로 한국교회 내에서도 부흥운동의 폐해를 주목해야만 한다.


죠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가 뉴잉글랜드와 신대륙, 그리고 영국을 오가면서 칼빈주의의 신학에 근거한 복음을 감명 깊게 전파하였다. 휫필드는 교파에 대해서는 매우 관용적이었다. 그러나 웨슬레의 신학에 대해서 크게 이의를 제기하였다. 제랄드 크래그의 설명은 정곡을 찌르고 있다.


"휫필드가 보기에는 알미니안주의는 죄가 가지는 중요한 의미를 모두 희석시켰다는 사실이 명백하였다. 알미니안주의는 사람들을 자신만만하게 만들었다. 반면에 선택(예정)은 사람들에게 세상적인 안전을 추구하지 않도록 촉구하는 경향이 있었다. 칼빈주의가 인간의 모든 희망을 짓밟아버리고 무관심을 고조시킨다는 웨슬레의 주장은 모두 옳았는가? 알미니안주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생명력 있는 개념을 모두 내어버리지않았던가! 웨슬레는 자기 친구인 휫필드에게 자네의 하나님은 나의 악마야' 라고 가시 돋힌 말을 한적이 있었다"(Gerald R. Cragg, e Church and the Age Reason, New York: Penguin, 1985, P. 145).


에드워드와 횟필드는 개인주의적인 부흥운동보다는 공공에 봉사하고, 사회적인 책임을 강조하고, 하나님나라의 건설자로서 역사의식을 고취하였다. 개인적인 회심만이 아니라 사회의 정의와 사회복지의 이념을 함께 강조하였다.


칼빈주의는 유니테리안주의로 넘어간 뒤에, 웨슬레안 알미니안들에 의해서 세속화되기 시작하였다. 칼빈주의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다.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으리이까"(행 16:30)라는 외침에 대해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으로서만 가능하다는 답변이 있을 뿐이다.

아이러니칼 하게도 위대한 칼빈주의 설교자 죠나단 에드워드의 손자인 드와이트(Timothy Dwight)가 제1차 대각성운동의 신학을 변질 시키는 데 가장 선봉에 섰다는 점은 우리를 가장 슬프게 한다.

선지자 엘리의 자손들이 타락했고, 사무엘의 자식들이 그러했으며, 위대한 지혜의 사람 솔로몬의 아들들이 그러했다는 성경의 교훈처럼 세대를 이어서 바른 신학을 전수하기란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다.


찰스 피니(Charles Finney, 1792-1875)가 쓴 조직신학에는 인간의 테크닉에 의존하는 많은 언사들이 강조되고 있다. '우리 주의 많은 종들이 역사하는 복음을 부지런히 추구해야 한다. 중생을 효과있게 하는 작업이 요구된다 .죄인은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순종을 하기에 요구되는 각종 기능과 자연적 성품을 가지고 있다. " 피니에게는 회심과 성화의 과정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인간의 테크닉에 의존하고 있었다. 부흥은 기적이 아니며 수단을 올바로 사용한 결과이다(Finney,Systematic Theology, reprint: Minnea-polis: Bethany, 1976.서문).


19세기 말 드와이트 무디는 구두 세일즈맨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전도자로 회심하였다. 따라서 그에게도 역시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방법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든지, 죄인들을 회심시키면 되는 것이다. 전도자 선데이도 역시 극적인 회심을 강조하면서, 어떻게든 인간의 의지를 발휘하여 회심하도록 요청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초월적인 간섭보다는 인간의 인과법칙에 우선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인간의 종교적인 노력에 좌우될 수는 없다. 초자연주의를 반대하는 부흥사들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마치 무엇을 해야한다고 주문하고 즉시 그들의 부름에 손을 내밀라고 불러일으키고, 앞으로 걸어 나오게 촉구하였다. 구원이 부흥사의 테크닉에 좌우된다는 인상을 짙게 풍기게 되었다.


한국 칼빈주의에는 연합의 과제가, 우리는 바르게 질문하고 대답하고 비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올바르게 생각하는 반성의 자세을 익혀서 우리를 스스로 준엄하게 점검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개혁교회의 이념들은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는가?

첫째, 칼빈주의는 연합정신의 구현에 앞장서야 한다. 20세기 칼빈주의 개혁신앙의 쇠퇴원인은 세계교회협의회의 출현으로 인한 세력대결에서 명분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데 있다. 이 운동은 일부의 복음주의자들이 가담하고, 자유주의, 신정통주의자들의 선창으로 영국 성공회, 로마가톨릭과 동구 유럽의 정교회등이 혼합된 종교박람회였다. 신앙고백은 달라도 하나님나라는 함께 건설할 수 있다. 교리를 너무 주장하면 기독교계는 분열되고, 세상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자고 명분을 내세우고 있다. 이로 인하여 숫적인 열세에 몰리게 된 칼빈주의 교회들이 지속적으로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를 거부하게 됨으로써, 보수와 진보의 대결에서 차츰 영역을 잃어버리는 비극을 낳게 되었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교리는 우리를 분열시키지만, 신앙의 경험은 우리를 하나되게 한다'는 식으로 자신들의 일치운동을 정당화시킨다.


또한 만인구원론이나 보편구원에 대한 견해는 성경적인 연합의 진정한 의미를 무색케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보혈의 유일성을 사람들로 받아들이고 믿게 하는 데 결정적인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대부분의 에큐메니칼운동가들은 만인구원론, 보편속죄론의 입장에 서있다.

이것은 기독교와 발트주의자의 차이를 노정시킨 것이다.

에큐메니칼 운동가들은 루터와 칼빈의 그리스도를 대치시킨 바르트의 기독론을 극찬하면서 신.구교의 화합을 이룩하고자 한다(Van Til, Christianityand Barthianism, 1962. p. vii.). 그러나 그리스도의 보혈의 유일성을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같은 고백을 드릴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점에서 세계교회협의회의 교회연합운동은 교리를 무시한 채, 사역의 전략에 맞춰서 일하고 있다. 숫적인 우세를 내세우고, 세계적인 여러 국가적 교회단체들의 대표성과, 일체성을 내세우지만, 기독교의 기본교리를 희생시킨 그들의 가는 길은 성경의 가르침과 상관이 없는 걸음마이다. 오늘의 복음운동이라는 여러 종류의 연합운동이 치닫고 있는 길도 역시 교리에 대한 서로의 생각이 정리되지 않는다면 마찬가지로 혼합이 가져온 혼란을 면할 길이 없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연합운동에 대항하는 개혁신앙의 후예들이 내세운 단체들이 효과적으로 진정한 교리적 연합을 이룩하지 못한 점도 뼈아픈 반성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1943년 미국에서 미국복음주의협회(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라는 단체의 태동으로 대응세력의 구심점이 되긴했다. 하지만 역시 일리노이주 휫튼에 위치한 이 단체의 '타협없는 교리를 중심으로 한 협동"은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이 복음주의 운동역사를 들여다 보면, 권력, 인기, 성장에 대한 잘못된 가치관, 환상에 대한 동경을 부채질한 결과들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에서는 칼빈주의 교회들의 거듭된 교단분열 때문에 적과의 전쟁에서 내부 집안사정으로 인해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안에서 세칭, 총신을 중심한 합동주류, 고신, 대신, 기혁, 합동개혁, 합동 보수, 즉 서로 신앙고백에서 차이를 발견할 수 없는 교회들이 진정한 자기 반성이 뒤따르지 않은 채 계속 세포분열을 거듭하는 가운데, 교회가 가져야 할 진정한 리더십을 상실하였다. 우리장로교 교단들도 달라져야 한다.

한국교회는 지방색에 근거한 교회정치의 비극을 자주 노정하였다. 연합의 기치를 들고 있는 통합측이나 기독교장로회 등은 에큐메니칼의 장자교단임을 내세우는 까닭에 분열하지 않는다. 여성안수라는 첨예한 문제까지도 타협해나가고 있다. 연합이라는 명분을 중시하는 결과요, 주도권을 갖고 있는 사람들끼리 협상하는 분위기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1980년의 합동신학원의 태동은 칼빈주의 교회내의 교권주의가 핵심 잇슈였다. 여전히 한국 칼빈주의 교회들이 과감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합신은 성경적인 교리의 실천을 다짐하면서 작은 노력을 기울이면서 탄생하였다. 여전히 개혁주의자들은 분파주의자들이라는 오점을 간직하고 있다.

개혁 교단끼리의 활발한 교류와 교제를 통해서 벽을 허는 일에 눈을 떠야 한다. 같은 교단내에서 마저도 타 신학교출신자에게 먼저 악수의 하는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문화와 사회변혁의 영향력을 발휘해야


또한 칼빈주의 신학이 한국사회 안에서 그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우리의 현실에서 볼 때, 교회성장의 둔화와 함께 칼빈주의 개혁신앙은 한층 더 중요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영역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한국의 국민들의 열렬한 소망이던 군사독재에서의 민주화의 염원을 위해 박해속에도 활동한 사람들은 주로 가톨릭의 신부들이었다. 따라서 사회의 존경과 신뢰를 그들에게 내어준 꼴이 되었다. 급진적인 민중신학과 로마 카톨릭의 해방신학이 서로 손을 잡고 광주사태와 대학생들의 민주화 투쟁에 선도적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이러한 영역에서 지도력을 상실하였다. 또 하나는 통일 의식을 국민의식으로 확산시키는 데 있어서 칼빈의 사상을 따른다는 한국교회는 주도권을 잃어버렸다. 더구나 고 문익환 목사의 돌연한 북한 방문으로, 젊은 이들사이에는 영웅주의적인 통일의 환상을 선망하는 분위기를 낳았다.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고서야 한국 칼빈주의 교회는 오해받을 소지가 없어졌음을 인식하고, 북한문제와 통일의 과제를 선교적 중심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1980년대 말까지만 하더라도 통일을 말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의 시대에 매우 위험한 인물로 치부되는 분위기였다.

그동안 칼빈주의 교회들의 해외선교는 놀라운 업적과 함께, 갑작스런 선교열풍으로 그 부작용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쌓이게 되었다, 선교사와 본국 교회의 상호불신, 선교지내에서 국내 선교사들끼리 영역갈등, 주도권다툼, 국내 선교경험 미숙에서 오는 시행착오들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선교는 지상명령이요, 한국교회의 마땅한 사명으로 여겼다. 그러나 북한 교회재건과 통일의 과제는 진보정치인들의 주장이었지, 칼빈주의 교회의 핵심주제가 되지 못했었다. 방법도 없고, 정보도 없고, 공연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많았다. 따라서 국민적인 열망을 신앙으로 이끌어가면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데서 주도권을 상실하였다. 반면에 급진신학의 대안논의와 활발한 접촉은 괄목할 만했다(이만열,"한국기독교의 통일운동 전개과정," 신학정론14권 1호, 11쪽).


1990년대 이후로 각종 시민운동, 환경운동과 윤리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칼빈의 정신을 따른다고 하면서 개혁신앙을 가진 한국교회들은 이제 이런 운동에도 활발하게 참여하면서 지역사회에 파고 들어야 한다. 성도들의 영혼을 돌보는 목회자로서 그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제시했다. 먼저 교회의 갱신과 설교의 개혁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신학이 민주화와 인권운동에 지나치게 좌우된 자유주의 신학과 교회의 모습을 보충해야만 한다. 강단이 정치강연이나, 이데올로기의 전유물로 농락당한 경우를 개혁해야 한다.


동시에 개혁교회는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신앙인격에서 우러나오는 건전한 가치관을, 통일, 교육, 범죄예방, 장애인 후원, 환경파수 ,공명선거 교통대책 등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교회와 목회자들의 건전한 의식을 제시해야 한다.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심화시켜 나가야


오늘의 시대에 가장 무서운 적은 복음주의를 가장하고 나선 성장위주, 성공주의 상업주의와 부흥운동의 열기가 빠져나간 뒤에 오는 성도들의 허탈감과 불신감이다. 외견상으로 드러난 교회의 부흥은 경쟁적으로 교회당의 증축과 신축을 불러 왔지만 사회의 아픈 곳을 돌아보지 못하는 무능력한 교회로 전락하였다.


오늘의 우리 칼빈주의 교회는 이 시대을 본받지 말고, 따라가지 않으려는 비판적인 검토와 새로운 도전을 필요로 하고 있다. 우리 칼빈주의 교회들이 직면하고 있는 심각한 문제는 시대 정신과 시대 문화에 동화되고, 방관하고 있으며 부분적으로 세속화에 물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순히 비판자가되는 것으로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당당하게 사도적 신앙의 계승자로서,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세속문화에 오염되지 않는 기독교회의 정신을 살려나가는 일에 있다. 우리는 세상에 떡을 위해서 살지 않고, 역사적 기독교의 연속성을 지키고 살려나가는 성도들의 모임이 되어야 한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정신 차려서 지켜나갔고, 수많은 희생 속에서도 역사속에서 명맥을 이어가다가 어거스틴이 펠라기우스와 싸우면서 정립하였고, 종교개혁자 칼빈과 청교도들이 재발견하여 새롭게 역사를 변화시키고자 몸부림쳤으며, 미국의 칼빈주의자들이 전해준 평양신학교의전통을 이어받아서 면면히 살아있는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을 타협하지 말고, 확고히 지켜나가야 한다.


칼빈주의 신앙인들이 모범으로 바라보는 16세기 종교개혁의 지도자들과 성도들, 박해속에서도 역사에 푸른 신선함을 남기도 있는17세기 청교도들의 모습은 어떤 삶에서 영향을 입었던가? 바로 신약성경에 나오는 초대교회 성도들과 사도들의 삶이었다. 이들은 소수였지만, 로마가 감당치 못했고, 제국이 무너지는 혼란기에 마침내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되는 놀라운 밀알이 되었다.


목회 방법론에 치우쳐서

신학교에서 배운것들은 모두 다 목회 현장에는 맞지 않는다는 식의 강변을 듣게 된다. 이것은 매우 가슴 아픈 일이다. 과연 오늘의 목회 현실이 신학에서 무엇을 배우고 있으며 정작 목회현실이 기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반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빈야드 운동, 신유와 치유사역, 예언과 방언의 능력 등 성도들이 원하는 남다른 체험이란 일시적 종교적, 심리적 위안에 초점이 맞춰지기 십상이다. 왜냐하면 이런 것은 개인적이고 비 윤리적이고, 공동체의 책임과 교회의 공동체 의식이 결여된 가치관의 변질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 칼빈주의가 많은 난관들과 싸웠던 것처럼

한국교회는 칼빈주의로 부터 이 시대를 이기는 지혜와 용기를 얻어야 한다.

말로만의 칼빈주의는 이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이 세상이나 그 정욕은 다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가는 것들이다.

한때의 아름다움이라는 미스 선발대회와 같이 천박하고 저질스러운 것이 인간의 영화와인기다.

유행과 인기와 평판과 명예에 휘말리지 않고, 소금과 빛이 되어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살아가려는

칼빈주의의 가치관 정립이 이 시대의 대안이요, 진리에 이르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