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힘써 알자

축복의 통로란 불우한 이웃과 나누는 삶

천국생활 2008. 11. 24. 09:29

 

 

 


야콥 푸거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독일의 유서 깊은 도시 아우크스부르크를 방문하면 ‘푸거라이’(Fuggerei)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빈민 구제 시설을 만날 수 있다.

 

푸거라이는 1521년에 독일의 거부였던 야콥 푸거(Jakob Fugger)가 극빈자들을 위해 설립한 사회 복지 기관이다. 지금도 푸거라이에는 67동의 건물에 147가구가 살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1년 전세 비용이 0.88유로, 우리 돈으로 1,000원 남짓이라는 사실이다.

 

지난 500년 동안 푸거라이는 극빈자들에게 주거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을 하루 빨리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왔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나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도 이곳에서 손님으로 머문 적이 있고, 모차르트의 증조부인 프란츠 모차르트도 한때 이곳에서 산 적이 있다.

 

필자는 푸거라이를 둘러보면서 ‘귀족은 귀족다워야 한다’라는 프랑스 격언에서 유래해 지금은 사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마땅히 지녀야 할 도덕적, 정신적 의무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진정한 의미를 떠올릴 수 있었다.


예수님은 영생에 대해 묻는 부자 청년에게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막 10:21)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 대해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간 부자 청년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만이 만물의 주인이시며 자신은 단지 위탁받은 청지기일 뿐이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맡기신 부를 선한 청지기로서 ‘남용 없이 선용’할 때에 비로소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는 ‘경건의 능력’을 갖추는 데 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경건의 구체적인 내용을 말하고 있다.

야고보서 1:27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경건이란 종교적 의식이 아니라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는 것’ 곧 사랑의 실천이라고 정의한 것이다. 이처럼 경건의 능력은 사랑할 줄 아는 능력, 나눌 줄 아는 능력이다.
주님을 위해 자신의 가장 귀한 옥합을 깨뜨린 여인처럼, ‘거룩한 단순성’을 사모해 모든 재물을 버리고 맨발로 평생 동안 주님을 따랐던 아시시의 성자 프란체스코처럼,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가장 귀한 것도 그분께 즐거이 드릴 수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다.

                                                           ---박경수 교수의 이야기 교회사---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복은 축복의 통로가 되라고 주신 것이었지만

이스라엘은 선민 의식을 가지고

자기들만 만족하고 나누기를 싫어하였습니다.

선교하여야할 선택된 백성들이고 주신 복을 나누어야 하는 책임이 있었지만

그들은 자기에게만 충실했고 이웃이나 이웃나라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버림을 받게되었지요.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경건이 예배 잘 드리는 것만 아니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실천하지 아니하므로

이 사회로 부터 점차 영향력을 잃어가면서 버림을 당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대형교회의 부는 무엇을 위함인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